주일낮예배 2018-12-02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 에스겔 9장 1절 – 10장 19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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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2-02
경향의 강단(50) (2018년 12월 2일 / 주일 대예배)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 에스겔 9장 1절 – 10장 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10월 25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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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

[에스겔 9장 1절 – 10장 19절] 석기현 담임목사
약 8년 전에 서울의 일부 시내버스에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라는 문구의 광고물이 부착된 적이 있었습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한 달 동안의 계약으로 올린 것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은 해당 버스회사는 4일 만에 광고를 내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스스로 사람을 창조해 놓고도 그 사람을 심판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가장 대표적인 것임을 여실히 드러낸 해프닝이었습니다.

  그 광고 문구에도 나타나 있듯이 사람은 하나님이 왜 사람을 심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자체만 두고 비판의 소리를 높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오직 ‘벌’에 대해서만 불만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모순적인 자세는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도 전혀 회개할 생각은 없이 그저 “내 죄벌이 지기에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라고 하나님께 오히려 항의했던 가인에게서부터 이미 나타난 것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비단 ‘반기독적’인 자들에게서 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좋아하지만 심판은 싫어하는 교인, 천당은 크게 외치면서도 지옥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 목사들이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양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왜 기독신자와 교회는 반드시 ‘심판’을 믿고 선포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심판을 믿는 신자라야만 ‘예수 구원’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9장 1절부터 4절에 기록하기를 “1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2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앞서 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버젓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기막힌 범죄현장을 환상을 통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9장에서는 바로 그 배교에 대한 철저하고도 공의로운 심판이 연이어 선포되면서, 그 첫 단계로 하나님께서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을 호출하여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관할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복수로 쓸 때에는 ‘감독하는 자’의 의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형벌이나 징계를 주는 자’라는 뜻의 단어인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서 곧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예루살렘을 심판할 “여섯 사람” 즉 6명의 천사들을 동원하셨는데 이들은 각자가 다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살기등등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도 직역하자면 ‘부수는 도구’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 용도가 사람을 죽이고 그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강력한 무기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즉 이 ‘죽이는 무기’라는 표현에는 그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며 그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것이 될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2절에 보면 그처럼 죽이는 무기를 손에 잡은 여섯 명의 사람들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북향한 윗문 길’이란 앞서 8장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 환상 중에 들어왔던 문이며, 유다의 우상 숭배가 바로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되었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심판의 천사들이 바로 그와 똑같은 길을 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에스겔 선지자가 목도했던 죄 때문에 내리시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해 줍니다.
  그들과 함께 등장하는 특별한 인물이 있는데, 그는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이었습니다.
  2절 중간에 이 인물을 가리켜 “그 중에 한 사람은”이라고 마치 6명의 천사 중에 하나인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그들과 함께 있는 한 사람’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일곱 번째 사람은 과연 왜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또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가는 베 옷”은 제사장의 정결한 예복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가 거룩한 제사장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한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다”고 했는데, 이 먹 그릇이란 먹물을 담은 뿔통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서기관이나 관리들이 이것을 차고 다니면서 성경을 필사한다든지 혹은 사무를 볼 때에 그 통에 담긴 먹 즉 잉크를 사용했었습니다.
  나중에 제일 끝 11절에 보면, 바로 일곱 번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라고 “복명”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일곱 번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다른 천사들과 달리 ‘죽이는 무기’ 대신 ‘먹 그릇’을 차고 있었겠습니까?
  바로 4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서 그 일곱 번째 사람에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특별지시를 내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 일곱 번째 사람은 여섯 천사들을 이끌고 제일 앞장서서 예루살렘 성읍을 “순행”하면서, 그 심판 중에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사람들의 이마에 특별한 “표”를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예루살렘의 “가증한” 우상숭배를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 즉 조국과 민족이 저지르고 있던 배교의 죄악에 대하여 깊이 안타까워하면서 회개하는 참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일곱 번째 사람의 표를 이마에 받은 사람은 아무리 다른 여섯 천사가 ‘죽이는 무기’를 가지고 종횡무진해도 결코 죽지 않도록 완전한 안전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마의 표’는 애굽에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내릴 때 하나님께서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문설주에 양의 피로 표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셨던 것과 똑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표가 이마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가차 없이 시행되었습니다.
  5절과 6절에 기록하기를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라는 말은 구원 받을 사람의 이마에 표를 하는 일곱 번째 사람의 바로 뒤를 심판하는 여섯 천사들이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이마에 표 있는 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긍휼을 베풀지”도 않는 가운데 그 ‘죽이는 무기’로 “다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그런 장면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8절)라고 탄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9절) 이제는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10절)고 추상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그때는 이미 모든 구원의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오직 철저한 멸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면이란 오직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내려질 수 있습니다.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은 멀쩡한 사람에게 대통령의 특사가 내려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원래는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없는 구원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없고 천당만 있다는 식의 복음이라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그저 가만히 놔두면 대충 살 사람에게 더 잘 살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정도라면 그렇게 대단한 일도, 그렇게 크게 감사드릴 일도 못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원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중간’이 아니라 ‘제일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사람을 ‘제일 위’로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죄로 인하여 마땅한 지옥영벌을 받게 되어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선택하셔서 그 심판을 면하고 천당영생을 얻도록 해 주시는 것이니 실로 ‘말로 표현할 길이 없고 갚을 길도 없는’ 최고의 감사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죄인으로 하여금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마에 표를 그려 주는 일곱 번째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표’가 없으면 영락없이 영벌 심판에 떨어집니다.
  반면에 그 ‘이마의 표’로 인침을 받은 택자는 반드시 천당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어정쩡하게 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실로 철저하고 무서운 것이지만, 한 번 택하신 자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철두철미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심판날 당할 때 주님을 너 맞을 준비해”(찬 529장)이라고 찬송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성도가 그 믿음대로 ‘구원’을 받게 되는 날은 곧 재림하실 주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그 날입니다.
  ‘심판하는 여섯 천사’들 앞에서 순행하시면서 택자의 이마에 ‘십자가 보혈의 표’를 그려 주시는 이 ‘가는 베 옷을 입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심판을 선포하는 교회라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10장 1절 이하 8절에 “1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3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 구름은 안뜰에 가득하며 4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5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6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가져 가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8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에스겔 10장은 소위 ‘숯불 재앙’이라는 환상을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1절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보고 있는 것은 앞서 1장에서 나타났던 그 ‘네 생물과 네 바퀴의 환상’인데, 특히 본문에서 그 중에서도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그들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 것 같더라”는 사실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남보석’이란 사파이어 비슷한 보석으로서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박혀 있는 신성한 보석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요한계시록 21장 19절에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으로 사용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 그룹들 머리 위에 남보석 같은 것이 보좌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곧 지금부터 이루어질 일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결에 따른 심판인 것을 강조해 줍니다.

  2절에 보면 그 심판은 하나님께서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 즉 앞의 9장에서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든 여섯 천사들의 심판을 진두지휘했던 바로 그 사람에게, 이제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진행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 예루살렘 성읍은 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이 쏟아 붓는 숯불 세례를 받아 불바다로 변하는 재앙을 당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바벨론 군대가 제3차로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후에 그 성벽과 성전을 불에 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2하반절에서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고 한 것처럼, 에스겔 선지자가 보는 눈앞에서 곧 그 일을 시행하려고 숯불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3절에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고”라고 했습니다.
  즉 그 ‘가는 베 옷 입은 사람’이 그룹들 사이의 바퀴에서 숯불을 받아내려고 할 시점에 그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 곧 우상숭배가 벌어지고 있던 ‘성전 북문’의 맞은편인 ‘성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또 한편으로 “구름은 안뜰에 가득했다”고 했는데, 이 ‘구름’은 곧 하나님 임재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안뜰’이란 성전의 안뜰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강력한 대조적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의 남쪽에는 지금 곧 그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 위에 쏟아 부어질 숯불을 가지고 있는 그룹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성전 안뜰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히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계속해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전개됩니다.
  4절에 보면 그룹 위에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게” 됨으로써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성전 문지방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안뜰에 가득한 구름을 조명함으로써 성전 안뜰 전체가 엄청난 광채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5절 이하에 보면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광경에 곧 이어서 ‘숯불 재앙’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그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 예루살렘의 성전에 당신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기운과 광채를 최고조로 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사역’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후에 에스겔 선지자는 이 모든 환상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바로 본문 18절과 19절에 “18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점 직전까지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 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숯불 재앙’이 시작될 때 그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의 문지방을 떠나서 지금 숯불 재앙을 내리고 있는 “그룹들 위”로 옮겨갔는데, 그 그룹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 “동문”이란 성전 바깥뜰에 있는 동편 문을 가리키는데, 다음 11장에 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은 거기서도 계속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 바깥 동편에 있는 감람산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도 가장 중심부인 ‘지성소’에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전 문지방’ 즉 성소의 입구로 물러나더니 바깥뜰에 있는 문으로, 그리고 아예 성 밖으로 차츰차츰 성전과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체의 장면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숯불로 인하여 한쪽 구석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하여 전체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불바다로 변해 갈 때,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부에서 떠나 점점 더 밖으로 밖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얼마나 비참한 광경이었겠습니까?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과 예루살렘이 심판을 당하는 일이 이처럼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재앙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를 수 없는 곳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감사와 찬양을 돌려 마땅함에 대하여 누구라도 100퍼센트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사역에 대해서는 조금 전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 하시는 일을 찬양하던 입술이 갑자기 닫혀 버리기 일쑤입니다.
  창조나 구원 사역에 비해서 심판 사역은 그 무언가 질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왠지 하나님의 본성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선입견이 잠재의식 속에서 발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당신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숯불로 심판하시는 중에도 당신의 영광을 최고조로 조명하고 계셨으며,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에도 역시 ‘하늘의 모든 영광’을 총동원하여 대동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이런 하나님의 심판사역을 감히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조금이라도 과소평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된 교회라면 ‘하나님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또한 선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사회참여’를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잘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거룩한 도피성’을 마련해 놓고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 주어야만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만인구원설’ 따위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그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전파하는 것을 전도라고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회는 ‘복음’과 함께 ‘하나님의 임박하고도 무서운 심판’을 소리 높여 외쳐야만 그 나라가 재앙을 면하고 그 사회가 복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도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내 백성아, 그 장망성에서 나오라!’고 외치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짝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될 뿐 아니라 심판날에는 바로 그 세상과 함께 ‘숯불 재앙’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찬 180장)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영광은 ‘천만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을 대동한 영광, 그야말로 창조 이래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장관이 될 것입니다.
  지상교회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바로 그 ‘심판주의 영광’으로써 세상을 조명하는 ‘성전 문지방’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심판사역을 통해서도 똑같은 영광을 거두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이 교회를 결코 떠나지 않도록 ‘이미 임박한 심판의 날’을 더욱 소리 높여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빌리 그래함 목사가 미국의 유명한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라는 토크쇼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사명이고 나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궤변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사람들의 가려운 귀나 긁어 주는 값싼 복음’을 외치는 목사들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정말 곰곰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고 비난을 퍼붓는 불신앙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빌리 그래함 목사처럼 ‘복음에서 심판을 쏙 빼 놓는’ 목사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도대체 그런 목사들은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심판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여러 차례 선포하신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절)라고 ‘생명의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7절)고 성부께서 위임해 주신 ‘심판권’ 역시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8절)라고 그 ‘심판날’이 반드시 임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바로 그 똑같은 한 날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절)고 ‘영생구원’과 동시에 ‘영벌심판’이 집행될 것이라고 똑똑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이어지는 말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절)고, 그 심판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시기 전부터 이미 정해 놓으신, 지극히 ‘공의로운 사역’인 것까지 재삼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전도자라는 사람이 ‘심판을 가르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사명이다.’라는 망언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 2018년이 마지막을 향해 저물어갑니다.
  올해에도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는 것은 ‘주의 날이 더딘’ 것이 결코 아니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지만 농부가 그것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시부터 이미 ‘임박한 심판’은 올 한 해가 또 지나감으로써 ‘더욱 임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연말에도 이처럼 ‘심판을 아직까지는 연기해 주시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께서 택자의 이마에 ‘표’를 해 주고 계시는 이 ‘은혜 받을 만한 때’에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께서 ‘숯불 재앙’을 땅에 쏟으시는 날이 오기 전에 ‘십사만사천 인의 남은 자’를 이 구원의 방주 안으로 부지런히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은 필연적으로 ‘심판 사역’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명심하면서, 원래 똑같이 심판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가운데 아직 죄와 저주 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해 이 ‘마지막 심판날’을 더욱 소리 높여 선포함으로써 이 경향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이 늘 충만히 임재하는 성전으로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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