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1-25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창세기 45장 25절–46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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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1-25
2018′경향의 강단(49) (2018년 11월 25일 / 주일 대예배)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창세기 45장 25절–46장 4절 / 석기현 담임목사
10월 25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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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창세기 45장 25절–46장 4절] 석기현 담임목사
야구에서 ‘핀치 뒤에 찬스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수비를 할 때 위험한 순간을 잘 넘기고 나면 그 다음 공격하는 이닝에서 득점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머피의 법칙’으로 입증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제 야구에서는 맞을 때도 있고 안 맞을 때도 있습니다.
  굳이 확률로 따져 보면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이 원칙이 100퍼센트의 확률로 들어맞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야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믿음의 조상’이라 불렸던 야곱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축복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이름조차 ‘야곱’이 아니었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복을 많이 받겠다는 천성적인 욕심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쌍둥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그래서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복을 받게 되는 과정은 결코 탄탄대로의 일사천리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온갖 인생의 쓴맛을 다 보았으며, 게다가 그의 인생 말년에는 거의 절망의 끝자락에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롤러코스터 같았던 야곱의 인생은 결국 그 마지막 최악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드디어 최고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고, 그 복이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대단원의 막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극적인 반전, ‘야곱’이 진정 ‘이스라엘’이 되는 인생역전의 과정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 시간 저는 성도가 위기와 시련 다음에 오히려 더 큰 복을 받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오늘의 상황이 최악으로 보일 때에도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45장 25절부터 28절에 “25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27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시기하는 형들의 계략에 걸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던 요셉이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던 이후의 일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예언했던 대로 애굽 땅에는 7년 동안 풍년이 이어졌고 그 동안 요셉은 많은 곡식을 곳곳에 저장해 둠으로써 다가올 7년의 흉년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흉년이 시작되었을 때 가나안 땅에도 마찬가지로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곡식을 사오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자기 앞에 제 발로 찾아와서 머리를 숙이는 형들과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면서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후 두어 번의 테스트를 통하여 그 형들이 옛날의 일을 회개하고 변화되었음을 확인한 요셉은 곧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온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야곱이 열 아들들의 거짓말을 믿고 요셉이 죽었다고 포기한 지 이미 십 수 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그 말이 믿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열 아들들은 야곱에게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 즉 앞서 1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요셉이 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을 애굽으로 초청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와 함께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게” 되자 야곱은 순식간에 “기운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꿈같은 일이 진짜 생시임이 분명해지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환희가 가득 넘치면서 새로운 생기가 충만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야곱의 입에서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족하도다’ - 정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극도의 희열이 가득 차오르는 감탄사가 아니겠습니까?
  실로 그 말 그대로 야곱의 인생은 바로 이때부터 ‘축복의 정점’을 향해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야곱의 이름이 갑자기 “이스라엘” 곧 브니엘에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축복의 새 이름으로 바뀌어 기록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사건이 있기 조금 전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야곱의 인생은 ‘족하다’라는 감탄사와는 정반대의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주변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 모두가 한결 같이 최악으로 치닫고만 있는 듯이 보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36절에 보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 아들들이 처음으로 애굽을 방문했다가 아홉 아들들만 돌아온 후에 애굽의 총리가 다음번에 식량을 사러 올 때에는 막내 동생 베냐민도 꼭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곱은 문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42장 38에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 이런 식으로 가면 내 인생은 그저 울다가 죽을 일밖에 안 남았다.’라고 땅이 꺼질 듯이 장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죽었고 시므온은 애굽에 볼모로 갇혀 있고 거기에다가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고자’ 하려는 현실 상황은 야곱으로서는 ‘다 나를 해롭게 하는’, 그야말로 악재의 연속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은 결국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전능자의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을 발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43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대로 야곱은 아홉 아들들과 베냐민을 함께 떠나보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모든 것이 점점 더 꼬여가는 것처럼만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악화일로의 상황에서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의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야곱이 ‘가느다랗게 기대했던’ 것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냐민과 열 아들들을 돌려보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의 총리가 되었더이다’라는 경천동지할 희소식을 야곱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오묘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야곱은 ‘내 인생의 현실이 온통 다 나를 해롭게 하고 있다.’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가 애굽 총리대신의 아버지가 되어 ‘만족에 넘치는 이스라엘’로 여생을 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예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악재에 악재가 덮치는 일을 당할 때 자기가 ‘가혹한 운명의 장난’에 사로잡혀 있다는 표현을 흔히 씁니다.
  그 말 속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낼 길이 없다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습니까?
  ‘전능자의 은혜’를 의지할 줄 모르는 인생은 그런 냉혹한 현실과 자신의 무력함을 두고 그저 ‘설상가상’이라고 장탄식만 내뱉을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악재’들까지도 사용하셔서 결국에는 ‘복’이 되도록 실로 절묘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은 이제 울다가 죽을 일만 남았구나.’라고 포기 일보직전까지 도달하고 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위해 ‘제일 좋은 것’을 이미 다 준비해 놓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라고 여겨지는 최악의 순간에도 우리는 결코 그대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라고 실감이 날 만큼 충격적인 환난이 닥쳐와도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때야말로 ‘여호와이레’의 오묘하고도 강력한 섭리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모든 상황이 다 나를 해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때일수록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을 지킴으로써 끝내 우리의 입에서 ‘족하도다!’라는 찬탄의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때일수록 철저히 교회중심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46장 1절 이하 4절에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정말 꿈도 꾸지 못했던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이스라엘” 즉 야곱은 즉시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다가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제단’부터 쌓고 ‘제사’를 드리는 예배는 야곱이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서 고스란히 배운,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브엘세바에서의 예배’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기쁘기만 했을 것 같은 그 때에, 야곱은 자기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에 대하여 마음에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주저할 것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자기 아들 요셉이 그토록 출세를 해서 이제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남은 평생을 총리대신의 아버지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애굽을 향해 지금 바로가 보내 준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도대체 그 무슨 망설일 일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미국에 이민을 간 아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저택까지 마련해 놓은 후에 부모님의 여생을 잘 모시겠다고 초청해 주어서 지금 비행기 일등석에 앉아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문자 그대로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지 그 무슨 뒤숭숭한 느낌 같은 것이 들겠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그런 상황에서도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내려 주신 언약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조부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가나안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주셨는데, 지금 자기가 가는 걸음이 그것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지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야곱은 자기 발이 정말 가나안의 지경을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제일 먼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일러 주신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정말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두고 불안해하고 있던 야곱의 심정을 잘 아셨기 때문에 일단 그를 안심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그 야곱의 걸음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은 지금 야곱이 내려가는 애굽 땅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큰 땅’을 그들에게 주리라고 하신 약속 역시 나중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됨으로써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처럼 언약에 대한 재확인을 받게 되자 그제야 야곱은 안심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드디어 국경을 넘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가도록 최종 결심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물론 아들 요셉의 초청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이국에서 여생을 다 보낸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며, 더욱이 영적으로 생각할 때 확신이 설 수 없는 딜레마까지 있었습니다.
  그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야곱이 선택한 해결책이 바로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 받게 되자 그 모든 불확실과 불안은 깨끗이 해결되었고, 야곱의 노년은 ‘복의 최고 정점’을 향해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내달았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예배부터 빠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어떤 시험이 닥치면 일단 교회부터 떠나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참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배에 빠지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도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해결책’이 아니라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신자는 오히려 예배시간을 더 사모하며 나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문제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판단이 어렵고 상황이 복잡한 때일수록 무조건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몸 된 교회와 행보를 끝까지 같이 하는 성도로 하여금 그 교회를 통해 약속해 주셨고 그 교회를 통해 성취해 주실 복을 반드시 누리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우리 교회의 어느 장로님과 어떤 교단적인 어려운 문제를 두고 의논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심사숙고하여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린 후에 마지막으로 제가 그 장로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는 그저 명분만 따라가느라고 뒤에 따라올 복잡한 문제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일을 저질러 놓고서, 결국 장로님에게 이런 무거운 짐만 지우게 되었으니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과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는 “이것은 장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장로님의 말씀은 저로서는 그저 송구스러울 정도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지금도 ‘스스로는 옳다고 확신을 가지고 어렵게 결단을 내린 일’이기는 하지만 일부 교인들에게는 오해나 시험까지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와 미안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의 ‘교회 사태’ 때에는 이탈측 장로들이 바로 이 교회 안에서 보여 주었던 온갖 언행을 경향교회 성도들이 직접 목도했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아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경향의 성도들 각자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최근에 일어난 ‘교단 사태’는 교인들은 직접 보지도 알 수도 없는 곳에서 목사들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여러분에게 자세히 해명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목사들의 세계에서 일어난 정말 황당하고 불미스러운 일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실상 ‘누워서 침 뱉는’ 일일 뿐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의 ‘제신노회’ 설립과 그에 따른 몇 가지 일들을 두고 성도들 가운데 ‘목사님이 왜 저렇게 하셨나?’라고 의구심을 가지게 될 분들이 있을 것을 잘 알면서도 저로서는 그저 입을 닫고 있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향의 성도들께 이것 한 가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께서 혹 목사에게서는 실망을 느끼실지라도 그럴수록 교회는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자주 저지르지만, 하나님께서 경향교회는 절대로 잘못된 길로 가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오판도 하고 실패도 저지를 수 있는 ‘성정을 가진 인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무능과 불충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경중심’의 원칙을 지키면서 나아가는 경향교회의 앞날만큼은 반드시 축복의 시대로, 지금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시대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수록 더욱 ‘제단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신자는 절대로 ‘영적 시행착오’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미래는 불안하다 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를 ‘지상교회’를 통해 완벽하게 성취해 나가고 계시는 한 그 교회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사는 성도의 발걸음은 반드시 정도(正道)로 인도해 주는 것 또한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조금 전에만 해도 ‘모든 것이 다 나를 해롭게 한다.’고 탄식했던 야곱의 입에서 ‘족하도다’라는 감격의 외침이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반전도 이런 극적인 반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축복의 조상’의 인생은 결코 ‘요람에서 무덤까지’ 만사형통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저 ‘울다가 죽고 말’ 것 같았던 최악의 순간을 통과한 직후에 오히려 그 최고 정점을 찍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상황이 꼬이면 꼬일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이미 예비하고 계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믿음만 지키면 됩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암담하고 불안할 때일수록 더욱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서 맞이하는 ‘영적 위기’는 문자 그대로 ‘더 큰 축복의 찬스’로 이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특히 저와 여러분은 이 경향교회를 통해 이 사실을 너무나 자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지난 45년 간의 경향교회 역사는 결코 탄탄대로나 일사천리가 아니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경향교회가 저런 식으로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비난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대적들로부터 ‘이번에는 진짜로 경향교회가 문을 닫는다.’라고 장담하는 소리 또한 여러 차례 듣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정말 상식적으로만 보면 영락없이 ‘모든 일이 우리를 해롭게 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모든 일이 오묘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만 판단한다면 ‘경향교회가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지만, 결국에 가서는 ‘오직 경향교회만의 특별한 복’을 쟁취하게 된 놀라운 역사를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도 ‘핀치 뒤에 찬스 있다.’는 믿음을 계속 지켜야 합니다.
  인생역전의 진짜 요령은 오직 ‘전능자를 의지’하는 데에 있으며, 환난을 벗어나 축복으로 도약하는 극적인 반전은 철두철미하게 ‘제단중심’으로 사는 성도에게 100퍼센트 성취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최악으로 치닫는 것처럼만 보일 때에도 더욱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믿고, 미래가 불안하게 여겨질 때일수록 끝까지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며 약속의 말씀을 소망함’으로써, 그런 신앙인의 입에서 절로 ‘족하도다!’라는 감사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여호와이레’, ‘환난 이전보다 갑절로 더해 주시는 복’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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