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1-04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이사야 40장 12-26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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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1-04
2018′경향의 강단(46) (2018년 11월 4일 / 주일 대예배)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이사야 40장 12-26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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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이사야 40장 12-26절/ 석기현 담임목사
‘맹인모상’(盲人模象)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옛날 한 임금이 코끼리 한 마리를 가져다 놓고서 장님들에게 만져보도록 한 후에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코끼리의 이빨을 만진 장님은 ‘무우’ 같다고 했고, 귀를 만진 장님은 ‘키’(箕)처럼 생겼다고 했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절굿공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코끼리의 배를 만진 장님은 ‘장독’ 같다고 했고, 꼬리를 만진 장님은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했는데, 임금이 그들의 우매함을 꾸짖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됩니다.

  그 장님들처럼 사람은 어떤 대상을 두고 그저 자기가 가진 제한된 정보와 경험만 가지고 오판을 내리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런 악습이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런 ‘인간의 우매함’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누구와 동등하게 여기겠느냐?’라는 일련의 질문들이 바로 하나님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정의하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맹인모상’ 식으로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오직 성경 말씀대로만 하나님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신구약 66권만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본성을 가장 정확하게 선포해 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을 통해 과연 성경중심의 개혁주의 기독신자가 하나님을 어떤 신으로 믿고 고백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의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는 새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12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1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인간의 그 어떤 ‘과학 기술’로도 측량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높고 무한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사람은 그 하나님은커녕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조차 아직까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바닷물”의 깊이와 “하늘” 공간의 크기와 “땅”을 이루고 있는 “티끌”(흙)의 양과 성분을 그들이 만들어낸 온갖 계량기와 측정기들을 동원하여 “헤아리고” “재어” 보고 “담아” 보고 “달아” 보았지만, 여전히 오차가 포함된 미지수일 따름입니다.
  물론 비록 “손바닥으로” 떠보고 “뼘으로” 재어 보곤 하던 선지자 이사야 시대 때보다는 그래도 과학 기술이 많이 발달이 되어서, 제법 심해 탐사선도 내려 보내고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땅속 깊이 시추구를 파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사람의 기술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이리저리 만져 보는 것은 여전히 ‘빙산의 일각’이며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에 불과함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근대 물리학의 거봉인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업적을 두고 “나는 대양을 앞에 두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는 아이와 같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과 14절은 ‘인간의 지식’으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판단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그 주위에 “모사” 즉 참모가 필요하며, 고문과 “의논”을 할 때도 있고, 전문가의 “교훈” 즉 조언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신 까닭에 전 우주와 각 인생을 “정의의 길”“통달의 도”로써 다스림에 있어서 그 어떤 보좌관도 그 어떤 정보부도 결코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결코 도울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세우시고 이루어 나가시는 깊은 뜻과 위대한 계획을 이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며 판단이나 평가는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조차 제대로 재거나 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그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의 알량한 지식으로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15절의 말씀은 인간의 강력한 ‘사회 조직’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합니다.
  특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유다 백성에게 바벨론 제국이나 앗수르 제국 같은 “열방”의 세력이란 정말 거대하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의 국력에 압도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의 눈에 세상의 대국이라는 조직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계산의 가치에도 포함 못 될, 그저 “통의 한 방울 물”, “저울의 작은 티끌”, “떠오르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그저 자기 눈에 대단하게 보이면 하나님 눈에도 대단하게 보일 것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16절은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나타낼 수 없음을 천명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고 하니, 사람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 이후에도 그 위대하심의 격에 맞을 만한 “번제”조차 드릴 능력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넓고 울창한 삼림 지역 “레바논”에 있는 모든 “짐승”을 다 잡고 그 모든 나무들을 다 “땔감”으로 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걸맞을 만한 제사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크기란 이처럼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전파망원경으로 우주 끝까지 관찰한다는 최첨단의 ‘과학 기술’로도, 노벨상들에 빛나는 모든 석학들의 머리들을 총망라한 ‘지식’으로도, 강력한 군대와 대재벌 기업과 제국이나 대국을 만들어 내는 ‘인간사회의 조직력’으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상대하기는 어림도 없고 아예 측량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인간의 가진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상대하기는커녕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다음에도 그 위대하심에 어울릴만한 ‘예물’을 마련할 능력마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에서는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존재와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그 무엇들은 다 “아무 것도 아니며”(nothing), “없는 것”(less than nonexistent)이며, “빈 것”(unreality)에 불과하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사람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것저것 다 끌어 모아도, 사람이 제 딴에는 최고라고 자랑할 만한 것들을 다 내놓아도, 왜 하나님 앞에서는 비교의 대상은 고사하고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사람이 판단하거나 이해할 수 있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처럼 ‘높고 크고 무한하신’ 까닭에 참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시지 않다면, 하나님이 만일 사람의 지식과 능력으로 어떻게 견주어 볼만한 정도의 대상이라면 그 하나님이 어찌 참 신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앙망하는 자만이, 그 하나님의 전지전능, 즉 사람의 그 어떤 지식도 능력도 초월하시는 그 위대한 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지극히 높고 크심을 믿지 않는 사람,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 주시겠습니까?

  유명한 영화 ‘대부 1편’의 첫 장면에 보면, 어떤 장의사가 대부를 찾아와서 자기 딸을 강간한 자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대부는 “당신은 평소에 우리와 전혀 어울리려 하지 않고 있다가 오늘 여기까지 찾아와서도 여전히 나를 ‘godfather’(대부)라고 부르지 않고 아무 경의도 표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나보고 당신의 살인청부업 노릇이나 하라고 하느냐?”라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거절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장의사가 허리를 굽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godfather”라고 부르자 비로소 그 청탁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대부가 자신의 힘을 빌려 주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바란 것은 오직 자신을 높이 받들어주는 절대적 존경심, 이것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야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유한한 지식과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 역시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사람이 견주어 보기는 고사하고 판단조차 다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믿음으로써 그 전능자께서 베풀어 주시는 새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다른 그 어떤 존재도 줄 수 없는 도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18절 이하 24절에 “18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른 그 어떤 ‘비슷해 보이는 것’과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유일무이하신 존재이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신의 경험세계 밖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자신의 경험세계 안에 있는’ 피조물들과 나란히 놓고 그 어떤 유사성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죄를 반복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죄가 곧 ‘우상’을 하나님과 같이 여긴 것으로서 19절과 20절의 내용입니다.
  우상의 존재란 일단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장인”이 얼마나 그럴듯한 형상을 “부어 만들어” 내느냐에 그 존재가 달려 있고, 어떤 “장색”이 얼마나 화려하게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로 아름답게 꾸미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우상을 사모하고 앞에 와서 절하느냐가 좌우됩니다.
  돈 많은 사람은 그처럼 금은으로 우상을 만드는 반면에 그런 고급재료를 사용하지 못하는 “궁핍한 자”는 보다 값싼 재료인 “나무를 택하여” 우상을 만든다고 했으니, 우상의 존재는 또한 ‘사람의 재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 만들어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워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명색이 신이라는 것이 자기 몸 하나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오로지 사람이 바로 세워 주어야 서 있을 수 있는, ‘철저히 사람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사람이 만들어 놓고 섬기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사상이란 이처럼 오로지 ‘사람의 생각과 솜씨에 좌우되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아서 시작된 불교와 마호메트가 신비한 체험을 해서 시작한 이슬람교가 ‘스스로 계신 자’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의 숭고한 사상이 ‘태초부터 말씀(로고스)’이 되신 예수님을 결코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종교요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 종교를 만든 이가 사람이며 그 사상을 생각해 낸 이가 사람인 한에는 결코 그것이 사람이 참으로 숭배할 신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사람의 능력에만 의존해 있고 그 수준의 정도와 발전이 순전히 사람의 지적 능력에만 비례하는 우상과, 오직 ‘스스로 영존하시는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그 어찌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상숭배자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신을 신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연 만물’과 비기며 거기에서 유사성을 찾아서 자연을 신처럼 섬기는 죄 또한 인간이 오랫동안 저질러왔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21절과 22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오늘날에도 자연 즉 물질세계 그 자체가 온 우주 존재의 시작이며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고 스스로 변화하게 되었고 스스로 진화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무생물계가 생물계를 만들어 내고 생물계는 점점 더 발전하여 인간을 창조해 내게 되었고 그 인간이 정신과 영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 그 자체를 갖다 앉혀 놓고서 모든 존재의 근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자로 섬기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아무 확증도 없어서 그들 자신도 그저 가설(假說, hypothesis)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존재 세계에 대한 부동의 진리인양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지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라고 질책하십니다.
  “태초”“땅의 기초”는 사람이 ‘만물의 기원’으로 혹은 ‘존재의 궁극적 근원’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 태초와 기초는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태초 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임을 진작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땅 위 궁창에 앉으시고”,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신” 즉 우주공간 세계에서 무소부재하신 영원한 창조주이실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피조물에 불과한 물질세계를 마치 존재의 창조주처럼 모시는 행위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위대한 인간’ 또한 결코 하나님 앞에서 비교의 대상이나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는데, 23절과 24절에 기록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세상의 훌륭한 위인들이나 영웅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곤 합니다.
  존경할만한 박애정신을 남달리 발휘하며 평생을 산 사람들, 지식의 수평선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훌륭한 학자들, 혹은 총칼로 천하를 호령하며 영토를 넓힌 군주들, 이런 사람들을 칭송하면서 무슨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인물’이라고들 떠받듭니다.
  그런 “귀인들”“세상의 사사들”을 칭송하고 귀감으로 삼는 것까지야 좋지만, 문제는 그같이 남달리 훌륭했던 위인들이 곧 사람이 존경하고 받들어 모셔야 할 최고의 존재라고 착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 가운데 특히 본받을만한 훌륭한 인물들의 생을 잘 따르고 그 명철한 사람의 지식을 계속 발전시키고 그 영웅호걸의 기개를 새로이 적용시켜 나가면 점점 더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이며 심각한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시키는’ 죄,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훌륭하다 해도 결코 하나님과 비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리 훌륭한 귀인들과 사사들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폐하시며... 헛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 하나하나를 절대적으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훌륭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저 이 세상에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진” 풀뿌리에 불과합니다.
  그처럼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을 유지하는 인생을 살다가도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는” 순간 마치 가벼운 바람에 “말라... 불려가는” “초개” 곧 지푸라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 할지라도, 또 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성인과 현자와 용사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 대신 사람이 섬길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영어에 ‘one and only’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처럼 ‘단 한 분 유일한 신’이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의지하고 소망할만한 대상 가운데 하나님에 비교할만한 다른 존재가 결코 없음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 해 보았자 헛일입니다.
  하나님과 비슷해 보이는 또 다른 ‘유사(類似) 신’도 모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대용(代用) 신’까지 마련해 놓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당신 앞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을 지극히 ‘질투’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런 사람을 위해 힘을 써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회에서도 ‘양다리 걸치면서’ 도움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얄미울 뿐입니다.
  “제게는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
라고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뒤로는 여차하면 당적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국회의원 후보 지명을 해 주고 싶은 당대표가 어디 있겠으며, 지금 자기 말고 다른 남자와도 사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여자에게 자신의 저금통장을 다 털어서 결혼반지를 사 줄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수 있는 아무 다른 신이나 사람이 없음을 확실히 믿는 자라야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도와주고 싶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확실히 믿음으로써 다른 우상이나 자연이나 인간을 의지하는 자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적시적소의 도우심을 바로 그 살아 계신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한없이 높고 위대한 신이시며 그 어떤 다른 신이나 만물이나 사람과 비길 수 없는 유일무이의 신이십니다.
  그래서 25절과 26절은 결론적으로 “25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절대주권자이시며, 사람이 달리 “비교”하거나 “동등”하게 여길 비슷한 존재가 전혀 없는 유일신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과 감히 자랑하는 교만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을 다른 비슷해 보이는 종교의 신이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과학자들의 유물론이나 온 인류에게 귀감이 되기에 손색없어 보이는 위인들과 비교해 보면서 동등하게 여기는, 아니 그런 것들로써 하나님을 대체해 버리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Let God be God!)이라는 슬로건을 외쳤던 것도 바로 그런 신성모독을 지적하면서 참된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자리’에 ‘교황’을 대신 앉혀 놓았습니다.
  교황에 대한 공식 명칭 자체가 아예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요 ‘보편적 교회의 최고 대사제’(Summus Pontifex vel Pontifex Maximus)입니다.
  당연히 성자 하나님에게만 해당될 극존칭을 사람에게 붙여 놓고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는 오늘날도 온갖 우상들을 신으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각 나라와 민족이 섬기고 있는 ‘고유의 잡신’들이 천주교 안에서는 ‘같은 한 천주’로 둔갑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범신론’일 뿐임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진정한 개혁주의 기독신자는 그처럼 제멋대로 하나님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교만에 조금이라도 빠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당신을 스스로 계시해 주시는 그대로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그 어떤 ‘과학기술’이나 ‘지식’으로도 측량할 수 없고 인간의 ‘사회조직’과 견주어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제사’로써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성도는 그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그 위대하신 절대주권자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 또한 세상의 ‘우상’들이나 ‘자연만물’이나 혹은 ‘위대한 인간’들과 감히 비교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오로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라고 유일하신 성자 하나님만을 고백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그처럼 ‘위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만 바라면” 그런 신실한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어려울 때 힘 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은 스스로는 결코 발휘할 수 없지만 오직 천하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에게서는 능히 나올 수 있으며, 전 인류와 대자연과 사회조직과 과학기술의 힘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도움은 오직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께서만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위대하신 절대주권자로,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고 고백함으로써 그 전능자의 능력을 입고 그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을 따라 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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