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10-28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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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10-28
2018′경향의 강단(45) (2018년 10월 28일 / 종교개혁 주일예배)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석기현 담임목사
10월 28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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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석기현 담임목사
우리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고 가산을 탕진하는 일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단 교도 전체가 몇 날 몇 시에 어느 장소에 모여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허탕을 친다든지, 혹은 아예 집단적으로 자살극을 벌이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볼 때마다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상식을 가진 불신자조차 ‘어떻게 저토록 유치한 이단 종교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절로 생기게 됩니다.
  이단의 교리나 사설이라는 것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아도 오직 거짓말투성이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뻔한 사실인데도 그런 사기꾼 교주에게 어처구니없이 미혹을 당하고 있으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로 보내는 편지를 쓸 때의 심정이 바로 그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부터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책망했으며, 3절에서도 또 한 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고 한탄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멍청한, 바보 같은’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처럼 ‘이 바보 같은 사람들아!’라는, 그로서는 가장 거친 표현을 써 가면서 갈라디아교회 교인을 책망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다른 교훈에 “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꾀이다’라는 말은 ‘마법에 걸리다, 넋을 빼앗기다(bewitched)’라는 뜻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즉 당시의 일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탄의 꾐에 어처구니없이 넘어가는 바보짓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사도 바울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다시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바른 신앙인’으로 회복시켜 주기 위해 이 서신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종교개혁 제501주년을 맞이하게 된 오늘 주일에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회복하게 된 ‘바른 믿음’은 ‘어리석은 이단’과 과연 어떻게 다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믿음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본문 2절부터 5절에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음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때부터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간 그 순간이 곧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첫 신앙 체험의 순간을 돌이켜 보면서 바로 이 사실을 확인해 보라고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질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중에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선한 일을 함으로써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있었느냐? 아니면 믿게 된 순간에 자기가 성령 받았음을 체험했었느냐?’라고 일깨워 주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누구든지 믿음이 있으면 이미 성령을 받았음이 확실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는 그처럼 믿음이 들어간 이후에도 그 성도의 생활 속에서 계속 작동하게 됩니다.
  4절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많은 괴로움”이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던 온갖 시련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환난과 핍박도 오로지 믿음을 통해 입게 된 성령의 힘으로써 이제까지 잘 견디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즉 ‘이것은 너희들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내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일이다.’라고 시작하는 말 그대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선행으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했던 것입니다.
  바로 5절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그에 따라서 성령을 내려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 오직 ‘듣고 믿는 자’가 계속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신자이면서도 가장 무지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믿음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분명히 있으면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며 마찬가지로 ‘성령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곧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과 동격’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조차 모르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무슨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받아야 성령을 제대로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은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이 바로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이단 전도자가 “당신은 정말 성령 받았습니까?
 ”
라고 추궁하듯이 물어오면 “글쎄요.”하면서 당황하는 교인도 있는 것입니다.
  양자가 다 아직도 영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생긴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바로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온갖 인생의 괴로움과 불신사회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도 체험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먼저 선을 행하게 됨으로써 성령을 받고 믿음이 생기게 되는 순서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착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 믿음이 무엇인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도저히 알지 못하는, 실로 ‘어리석은 종교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시켜보았던 것처럼, 여러분께서도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그 결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억되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다들 본성적으로 불신자들이며 죄인들일 뿐이었지만, 오직 성령께서 나의 무지한 마음을 감화 감동시켜 주신 까닭에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바로 그 성령께서 계속해서 나의 게으른 손발을 충동시켜 주신 까닭에 주님께서 명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지금까지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바른 믿음이 없는 자는 일견 ‘성령으로 시작한’ 듯 보일지라도 결국은 ‘육체로 마치고 마는’ 어리석은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진실한 신앙고백과 충성된 삶을 통하여 늘 성령의 감동과 동재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른 믿음은 ‘칭의의 복’을 누리게 해 줍니다.

  6절부터 9절의 말씀에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모세의 율법을 오용하여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가르치던 유대율법주의자들에게 치명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인물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믿음의 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있게 한 ‘조부 중의 조부’였으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된 ‘복의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 인용되고 있는 말씀들은 창세기(12:3, 22:17-18)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편에서 무슨 선행이라는 것을 먼저 보여 드려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그와 같은 약속을 그의 귀에 들려주시고(창 12:3), 그의 눈앞에 펼쳐 보여 주시고(창 15:5), 몇 차례나 재확인까지 해 주셨던(창 22:17-18)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을 믿으매”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시면(창 15:5), 그는 그저 “여호와를 믿었을”(창 15:6) 뿐이었습니다.
  자기 나이를 비롯하여 모든 현실적 상황은 그런 엄청난 약속을 믿기에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그냥 철저히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해” 주셨다고 창세기 15장 6절 하반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복이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자손이 넘치고 땅이 생기고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그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 중에 최고최대의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복’이 곧 “먼저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다고 “성경이 미리 알고” 증언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믿음만 가지면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 받은 자녀가 되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모든 세계만방의 백성들에게 활짝 열린 축복의 길이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복을 내리시면서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시 오직 ‘믿음 있는 자’만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받았던 그 복 곧 ‘칭의’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게 되고 내 자식이 잘되고 하는 것들만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복들은 정말이지 ‘이방인들도 구하는’ 아주 흔한 것들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고 그 하나님의 양자가 된 일이 그야말로 공짜로 굴러들어온 최고의 복덩어리인 줄로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복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형수가 특별사면을 받아서 마치 무죄 방면된 사람처럼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한 복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아가 정말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어서 살게 되었다면 그것보다 더 복스러운 일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입고 양자의 자격까지 얻게 되었다는 교인이 아직도 자기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줄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돈 주십시오, 승진시켜 주십시오, 제 자식이 대학에 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마치 자기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징징대고 있다면 정말 못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이 그 얼마나 큰 복인 줄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여전히 ‘다고 다고’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최고의 복인 칭의의 복을 오늘날 역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누구든지 이미 다 받아 누리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바른 믿음은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써 구원 받게 해 줍니다.

  10절 이하 14절에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고 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하여 먼저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저주”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사실 교인들조차 하나님께서 성령과 복을 내리신다는 말은 듣기 좋아하지만 저주를 내리신다는 말은 꺼려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라고 해석함으로써 그 뜻을 억지로 완화시켜 보려는 시도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율법이 축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며 또한 율법이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것과 동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율법의 저주”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놓고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며 어떤 처분을 내리시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고자 함일 뿐입니다.
  사람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를 그 ‘율법의 저주’ 즉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이끌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는 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실천해서 구원받을 능력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 앞에 참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라는 말의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having become a curse for us)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충격적인 표현이며 사실 감히 쓰기도 두려운 말이라고 할 만한데,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 바울은 글자 하나하나를 그 의미하는 그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 ‘스스로 저주의 대상’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씌워져 있던 하나님의 저주를 당신에게 통째로 옮겨 씌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전적으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전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셨던 사실은 사도 바울이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는 사실을 통하여 더욱 뚜렷하게 확인됩니다.
  즉 구약에서 사형을 집행한 후에 그 죽은 자를 나무에 매달아 놓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었다는 사실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달리신 것 역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극단적인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 이런 일이 어떻게 말이나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가 보좌에 앉기는커녕 어떻게 나무에 매달릴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제일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말도 안 될 저주의 대상이 되셨던 이유가 곧 그네들 자신이 받아 마땅했던 저주 때문인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고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나무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전혀 불가해한 모순처럼 보이는 십자가에는 이처럼 실로 오묘한 은혜가 충만하게 차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 대책이 없었던 필연적인 저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의인”은 오직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의사를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에 대하여서 환자 스스로가 배우고 익혀서 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사의 의술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병은 의사가 고쳐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열심히 도를 닦고 무언가를 깊이 깨달아야 지옥 저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내가 받아야 할 저주는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써 대신 다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참된 믿음은 사람 편의 그 어떤 노력이라든지 공로라는 요소가 전혀 포함될 수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가치란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도 “믿음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오직 귀한 보배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갚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바보짓임을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원래 저주 아래 죽게 되었던 자가 이제 영원히 살게 되었음’을 굳게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도’ 마귀의 ‘꾐’을 받아 그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를 믿는 이 간단한 ‘믿음’만 가지면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칭의의 복’을 누리며 ‘영생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마귀에게 넋을 빼앗긴, 사탄의 마법에 걸린’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세를 가리켜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지배했던 그 천 년은 그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어둡기 짝이 없는 때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인과 성녀’들에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칭의의 복’이 주는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그 대신 ‘수도와 고행’을 통해 스스로 의롭게 되어 보겠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 믿으면 간단하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대신 ‘사람의 선행’이라는 공로가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면죄부’라는 종교적 사기극에 간단히 속아 넘어갔던 것입니다.
  실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는 사도 바울의 한탄에 고스란히 해당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믿음’ 대신에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오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면서 ‘만약 정말로 재림하신다면 내가 그래도 교회출석은 했으니까 봐 주시겠지.’ - 어림도 없는 착각입니다.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감사의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고서 ‘그렇지만 내가 헌금한 액수가 꽤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전혀 모른 체 하기야 하실려구.’ - 실로 바보의 계산에 불과합니다.
  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고 있는 착각일 뿐인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성령으로 시작한 것 같지만’ 이처럼 결국에는 ‘육체로 끝나고 말’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율법주의 교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그 얼마나 많이 드러나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명명백백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만은 꼭 알아야 하고 정확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 ‘바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바른 믿음’만 있으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진짜 복,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 인정을 받는 ‘칭의’를 거저 누리게 됩니다.
  이 ‘바른 믿음’을 고백한 참된 신앙인만이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죄의 저주로부터 속량함’을 얻은 감격과 기쁨을 금세에서 날마다, 내세에서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개혁자 선배들이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사람의 어리석음’을 타파하면서 고백했던 그대로 ‘오직 믿음’을 통하여 ‘보혜사의 내재’와 ‘칭의의 복’과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굳게 확신하고 뜨겁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