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8-09-02 나와 내게 주신 자녀들이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사야 8장 16-18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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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반 헌신예배(주일밤 예배)
설교:나와 내게 주신 자녀들이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사야 8장 16-18절] 석기현 담임목사
찬양:대학부S.F.C. 찬양대
※ 찬양 연습 – 오후 5:00, 제1세미나실(지하 1층)
※ 경향어린이새소식반 가족 초청
뮤지컬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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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게 주신 자녀들이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사야 8장 16-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가끔 대형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해당되는 군관경의 기관들이 총력을 동원해서 협동구조작업에 나섭니다.
  특히 그런 사고가 바다에서 발생했을 때 펼치는 구조작업을 ‘search and rescue operation’ 즉 ‘수색 및 구조작업’이라고 부르는데,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거나 배가 침몰했을 때에는 사상자들이나 생존자들이 사고현장에 모여 있지 않고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류의 움직임이나 바람의 방향 등까지 고려해서 일정한 지역을 정해 놓고 항공기와 선박들을 동원해서 샅샅이 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수색 및 구조작업’이 그냥 ‘수색 작업’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발생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면 혹 그 희생자를 발견한다 해도 그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성은 제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구조기관에서 ‘수색 및 구조작업’을 중단하고 ‘수색 작업’으로 전환할 때에는 실종자의 생존에 대한 모든 희망이 현실적으로 다 사라진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희생자의 가족들입니다.
  아무리 구조기관에서는 더 이상 아무 가망성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더라도 자기의 배우자나 부모 혹은 자녀를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고현장을 지키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비록 ‘백만분의 일’도 안 될 확률이라 할지라도, 혹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적의 가망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역시 유다 백성의 구원을 두고 바로 그런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선지자였습니다.
  본문은 남조 유다가 온갖 죄악으로 인해 멸망의 나락으로 급전직하 하고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임박해 있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 사실을 목이 터져라 경고해 주었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사야 선지자조차 이제는 더 이상 무슨 말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16절의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는 말은, ‘봉함해서 나의 다른 제자들에게 맡기라’는 말이든지, 아니면 ‘나중에 때가 될 때 이 율법을 전파할 미래의 제자들을 위해서 지금 이 율법을 봉함해 두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내리시는 명령이지만, 문맥적으로 보면 이사야 선지자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그 무슨 말을 해도 끝내 통하지 않을 때,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에 가서는 아예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닫아 버립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무슨 노여운 일이 생겼을 때 벽쪽으로 돌아앉아서 자식에게 등을 돌리며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라든지, 요즈음 부부싸움을 하다가 지치면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며칠 동안 냉전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그런 예입니다.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그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 ‘이제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율법을 봉함할 때가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을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제는 더 이상 말씀을 선포해 보았자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 전혀 없고, 또한 이사야 선지자 역시 그렇게 계속 선포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는 완전탈진에 빠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이사야의 상태를 잘 반영해 줍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야곱 집’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스스로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 즉 심판의 날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자기도 별수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벌하시게 될 미래를 이제 더 이상 막을 길이 없고, 그저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곁에서 관망할 수밖에 없는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수색 및 구조작업’이 완전히 종료되었다는 선언이 유다 백성에게 내려진 것과 다름없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정말 놀라운 자세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어지는 18절에서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절을 좀 더 알기 쉬운 순서로 다시 번역하면,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은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어 주시는 징조와 예표로서 이스라엘 중에 살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해 이미 얼굴을 가리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사야 자신은 자기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마지막까지 보여 주시는 ‘행위 전도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싸매어지고 봉함되어 버린 시점이지만, 이제부터는 자기와 자기 자녀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서라도 계속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증인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눈물겨운 모습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에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때에도 완전포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계시며,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유다 백성 중에 구원 받을 사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 보이는 상황인 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지금까지 자기가 증거해 왔던 말씀을 이제부터는 자기 생활 속에서 자신이 먼저 믿고 체험하는 모습을 백성들 앞에 보여 주면서 계속 기다리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혹 단 한 명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와서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이사야 선지자는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전도의 효과가 점점 더 약해지는 시대입니다.
  옛날 다들 못 살 때에는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만으로도 전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활이 훨씬 더 풍족해진 현대에 와서는 ‘구원’ 같은 것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안이한 마음이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파트 문을 굳게 닫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생활만 마음껏 즐기려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전도지 한 장 건네주기도 정말 어렵습니다.
  실로 과연 이런 상황에서 계속 옛날식으로 전도를 해야 할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해야 합니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결코 아니라는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말세인 것이 틀림없고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지는 것도 분명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것도 확실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예수님 재림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는 아직 ‘남은 자’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바로 그런 전도자의 자세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 현대사회 앞에서 끝까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 주시는 징조와 예표’로서 살아야 합니다.
  ‘나’부터 전도대상자를 태신자 카드에 작정해야 하며, ‘내게 주신 자녀들’부터 새소식반에 보내어 다른 불신 어린이들을 전도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이 막힐 때, 그 말이 효과가 없을 때에, 이제는 몸으로 외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예수 천당’이라는 복음의 말씀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처럼 보일지라도, 그럴수록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말’보다도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 그들을 감동시키는 ‘performing evangelist’ 즉 ‘행위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불신 남편과 불신 시부모 앞에서, 더 이상 입으로 전도가 되지 않는 불신 직장 동료와 불신 직장 상사에게,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자세와 태도와 생활로써 오히려 말로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전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된 개혁주의 신자만이 나타내고 지킬 수 있는 ‘진정한 전도자’의 자세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복음에 대한 거부감과 전도자에 대한 박대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실로 ‘증거의 말씀을 싸매고 율법을 봉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패역한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나’와 ‘내게 주신 자녀’들만이라도 끝까지 ‘여호와께서 이 불신 세상 앞에 보내시는 징조와 예표’로 쓰임 받는 모든 경향의 성도들과 새소식반 봉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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