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8-12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사무엘하 1장 1-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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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8-12 경향의 강단(33)
2018′경향의 강단(33) (2018년 8월 12일 / 주일 대예배)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사무엘하 1장 1-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8월 12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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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사무엘하 1장 1-27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개그맨 박명수를 나름대로 천재적인 연예인으로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소위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격언이나 속담을 시니컬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어록인데, 유명한 것으로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졸립다.”, “티끌 모아 봤자 티끌이다.”, “나까지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처음에 들었을 때 정말 한참 동안 웃었던 것은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는 말이었습니다.
  원래는 잘 아시다시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이지만, 이제는 그처럼 자기편에서 먼저 ‘고운 말’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오직 손해를 자초할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박명수 본인이 직접 언급했듯이 30년 전이라면 이런 식의 개그가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기본적 예의’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알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랬던 과거와는 달리 점점 더 ‘개인 중심’으로 흐르는 현대사회에 와서는 그와 같은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질 뿐 아니라 아예 ‘자기애’와 ‘이기심’마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는 말도 그냥 우스개가 아니라 나름대로 ‘현실적 진리’가 있는 말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이런 조류를 거슬러 여전히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소수의 무리인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그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무엘하 첫 장 첫 절은 “사울이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의 시대를 끝내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실 즈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블레셋 군과의 전투 중에 죽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나온” 한 사람이 그 소식을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13절)이라고 밝혔는데, ‘이스라엘에 귀화한 아말렉인’으로서 이스라엘 군인이 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죽은 병사들의 주머니를 뒤지던 좀도둑일 가망성이 더 농후합니다.

  그 아말렉 사람이 사울 왕의 최후 장면을 두고서, 죽어가던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자기를 완전히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그의 곁에 서서 (사울 왕을) 죽였다”는 진술이 그런 의구심을 증폭시켜 줍니다.
  이것은 앞서 사무엘상 31장 4절에 기록된 사실, 즉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져” 자살을 한 것과 전혀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그 아말렉 사람이 사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다윗으로부터 칭찬과 포상 받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런 거짓말을 꾸몄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는 그가 “(사울 왕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분명해집니다.
  그 말은 ‘이 왕관을 다윗 당신이 쓰시고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십시오.’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울 왕의 죽음을 알게 되었던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 시간 저는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자세를 통해 우리 기독신자들이 늘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두 대상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교회 안에서 ‘개인적 감정’을 내세우지 말고 오직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11절부터 16절에 “11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13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아말렉 사람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그리고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다윗”“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옷을 잡아 찢고” “슬퍼하여 울며 금식”을 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사울 왕은 다윗에게 개인적으로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 그 순간부터 사울은 다윗의 목숨을 노리며 악착같이 쫓아다녔으며, 이 시점에 다윗이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블레셋 지경인 ‘시글락’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 다윗을 모시고 따르는 그의 부하들에게도 그런 원한관계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그들 모두는 당연히 뛸 듯이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의외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네 원수의 죽음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조국의 왕이 패배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사울에게 쫓겨 적국의 땅, 블레셋의 한 성읍에 피신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자기네들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라고 했듯이, 적어도 이스라엘의 핏줄이 흐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는 공감대가 그와 같은 애통과 슬픔과 금식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소식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왔던 아말렉 사람으로서는 천만뜻밖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은 ‘외국인’ 즉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자로서는 도저히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사울의 왕관까지 들고 와서 다윗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줄 때에 이런 반응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울의 죽음은 그 아말렉 사람의 생각에는 다윗이 더없이 기뻐할 일인 줄 알았지만, 다윗은 조금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 왕이 죽었습니다.
 ’라고 전해 주는 순간 다윗과 그의 모든 부하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다윗을 헹가래치고 기뻐 날뛰는 가운데 자기에게는 당연히 최고의 포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에 가득 차 있던 그 아말렉 사람에게는 오히려 즉결 사형언도가 내려졌습니다.
  그 죄목을 두고 다윗은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덧붙여 확인하기를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했다고, 즉 아말렉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그 엄청난 범죄행위에 대하여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증거를 제공했다고 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직분’ 그 자체를 얼마나 존중했는지는 이미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 기록된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씩이나 찾아왔지만, 다윗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함부로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이다.’라는 이유로 자기 부하들까지 사울 왕을 결코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상 31장에서도, 중상을 당한 사울이 “무기를 든 자” 즉 자신의 개인 병기를 들고 있던 병사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도 역시 자기 손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이는 것을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했다”(4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극단적인 존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한 마음자세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에게는 사울을 미워해도 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개인적 원한을 따라 사울 왕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에게 저지른 죄는 어디까지나 ‘여호와께서 친히 징벌하실 일’(삼상 26:10) 즉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며, 자신은 그를 오직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던 것입니다.

  ‘외국인’ 즉 세상의 불신자들이 목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말렉 사람’ 즉 우상종교인들이 목사를 멸시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명색이 기독신자라는 사람이 ‘발에 차이는 것이 목사’라는 식으로 목사를 가볍게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목사도 모자라는 것이 정말 많고 온갖 잘못들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사의 언행이 교인의 눈에 거슬리는 때도 자주 생길 수밖에 없고 때로는 교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주의 사자들을 대할 때 꼭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자세를 흩뜨려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목사가 실수를 하고 실족까지 하더라도 어쨌든 그 목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세우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런 ‘하나님의 사자’에 대하여 미운 감정이나 정죄하려는 마음이 들면,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려는 아비새에게 했던 말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그 사람에게는) 죄가 없겠느냐”(삼상 26:9)라는 경고를 자신의 귀에 스스로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단에 속한 목사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고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그런 ‘사탄의 일꾼’들은 한시라도 빨리 교회에서 쫓아내든지, 아니면 교인 자신이 그런 교회를 떠나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확실히 믿고 천당의 영생을 틀림없이 믿는 목사라면, 다른 인간적인 연약들이 좀 있다 해도, 아니 많이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안수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종으로 존중할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목사가 개인적으로 부족하고 불충한 것이나 실수하고 범죄까지 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다 알아서 처리하시고 벌을 내리실 ‘하나님의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교인 스스로 점수를 매기고 판단하면서 속으로 ‘너는 목사 같지도 않다.’라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대신 앉으려 하는 엄청난 월권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울같이 악한 왕조차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로 인정하며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모셨던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처럼, 비록 못나게 보이고 섭섭한 일까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사자’의 영적 권위를 끝까지 존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세상 앞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왕국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17절 이하 27절에 기록하기를 “17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 아말렉 사람을 처형한 후 다윗은 곧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픈 노래” 즉 조가를 지었습니다.
  “활 노래”란 그 애가의 제목인데, 아마도 요나단이 활에 능숙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야살의 책”이란 ‘의인의 책’이라는 뜻으로서 일종의 ‘전쟁사화집’ 같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애가의 첫머리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가리켜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라고 애통했습니다.
  자신의 절친이었던 요나단 왕자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원수였던 사울 왕까지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곧 그 두 사람 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다윗은 요나단과 사울의 죽음을 두고 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당한 국가적 치욕이라고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가드”“아스글론”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에서도 정치, 종교의 중심지에 해당되는데,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소식을 그 블레셋 도성에 “알리지 말며” “전파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소식은 블레셋 온 나라에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상황이지만, 반어법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할” 소식이며 큰 “개가”를 부르며 자축할 일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그 사실에 통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죽은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를 대신 갚아 주신 것이라고 통쾌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다윗에게는 오로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기고만장해서 기뻐하고 있을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습니다.
  사울은 죽는 순간까지도 “할례 받지 않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삼상 31:4)고 자신의 몸이 더렵혀지고 개인적인 치욕을 당할 것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못난 사울의 죽음을 두고서도 오로지 조국 이스라엘의 영광이 가리어지게 된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길보아 산”이 앞으로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에 쓸 곡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밭”이 될 것이라고 다윗이 저주한 이유도,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같이 된” 것 즉 사울 왕의 죽음으로 인해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하나님의 성호에 먹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용사”로서 남긴 업적을 추앙했습니다.
  그들의 생전에 “사울의 칼”“사자”와 같이 날카롭게 적군을 찢었고, “요나단의 활”“독수리”같이 적군을 저격했다고 칭송했습니다.
  그런 용맹스러운 전공 덕분에 “이스라엘의 딸들”“붉은 옷”“금 노리개” 같은 전리품을 소유하면서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가서는 특히 요나단을 조상하면서,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다윗이 요나단과 나눈 우정은 남녀 간의 애정보다 더 진할 정도로 돈독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애가의 제일 마지막에서 다윗은 다시 한 번 사울을 요나단과 나란히 이스라엘을 이끈 “두 용사”로 지칭하면서 이스라엘의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라고 애통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한 것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의도의 정치적 쇼가 아니었던 것은 너무나 뚜렷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정말 사랑했던 친구 요나단을 애도하면서 덤으로 사울을 마지못해 갖다 붙인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 악한 사울왕의 죽음조차도 그토록 슬퍼했던 이유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 해도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진정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그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소중히 여겼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 조국 이스라엘에 치욕을 안겨다 준 사울 왕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통했던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지도자나 우방국이 사소하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잡아먹을 듯이 비난을 퍼부어대면서, 오히려 적장은 칭찬하고 적국에 대해서 이로운 짓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 나라의 정치인들 중에 그런 매국적인 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목사들 가운데서도 그런 종교적 좌익분자들이 수두룩합니다.
  ‘9.11 사태’가 발생한 이후 언젠가 국내의 한 자유주의적 신학대학교에서 어느 미국 신학자를 초청해서 세미나를 했을 때였습니다.
  그 세미나 내용 중에 ‘9.11 사태’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거기 참석했던 신학생 중 하나가 말하기를 “9.11 사태를 미국의 식민지적 통치에 대한 약소민족의 반발로 보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석가탄신일만 되면 학교 정문에다가 ‘부처님 오신 날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달아놓는 신학교이니 거기에 다니는 신학생들도 그 모양 그 꼴인 것입니다.
  신앙의 피아식별, 우리 기독교의 적이 누구고 아군이 누구인지를 도무지 분별할 줄 모르는 장님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처럼 우상종교의 테러분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두고 ‘약소민족의 반발’이라고 두둔해 주는 것은 오히려 교회와 성도의 대적인 ‘블레셋’ 사람들만 기쁘게 만들어 주는 영적 간첩 행위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신학교의 신학생이나 그런 신학교 출신의 목사일수록, 타종교에 대해서는 화해의 손을 뻗친다 하면서 정작 교회를 향하여서는 스스로 온갖 비판의 메스를 갖다 대는 것입니다.

  적어도 ‘참된 이스라엘 선민’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이나 잘못되는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 해결하면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을 불신세상 앞에 굳이 ‘자아비판’을 해서 우리의 대적들을 기쁘게 할 필요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성도가 회개를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만 진실하게 하면 되지 어떻게 그것을 ‘마귀의 자녀들 앞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라는 말씀대로 기독신자는 세상 앞에서는 어디까지나 ‘재판장’이지 결코 ‘피고’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세상으로부터 판단 받으려 하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 줏대 없는 꼴불견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비판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그것을 무슨 ‘개혁자적 사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블레셋 민족이 기뻐할 일’을 발 벗고 나서서 대신 해 주는 배교자들입니다.
  목사의 목회나 개인사에 대해 온갖 먼지를 다 털면서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는 것은 자기편 지휘관의 등을 칼로 찌르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는 교회,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한 목사가 이 세상에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두고 마치 교회 전체가 크게 오염이나 된 것처럼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는 것은, 바로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성도에게 교회는 실로 소중한 ‘영적 조국’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바로 그런 마음자세로 지키면서 교회를 통해 세상 앞에서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도록 힘써야 마땅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불신자들과 불신사회 앞에서 스스로 교회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누워서 침 뱉는’ 자가 되지 말고, 특히 교회가 대적들에 의하여 사방으로 에워쌈을 당할 때일수록 더더욱 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귀히 여기며 이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소중히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사울 왕의 죽음을 두고 보여 주었던 자세는 ‘아말렉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블레셋 민족’으로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다윗과 그의 부하들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사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나눌 수 있었던 영적 공감대였습니다.
  그들에게 사울의 죽음은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존중 받아야 할 자의 죽음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용사된 자’ 즉 자기 조국의 영광을 대표하던 자의 죽음일 뿐이었습니다.
  그처럼 ‘개인적 감정’을 제쳐놓고 ‘개인적 판단’을 억누르고 그 대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부여해 주신 ‘권위’를 존중하고 하나님 왕국의 ‘영광’만 생각한 다윗이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는 ‘내 감정, 내 입장, 내 원한’이 항상 정당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길거리 곳곳마다 ‘결사투쟁’의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명백히 반영해 주지 않습니까?
  객관적인 사실이나 상식적인 판단이 들어설 여지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내 소리, 내 분노, 내 비판’이 항상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SNS의 온갖 악플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지금도 저토록 많이 괴롭히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최소한 우리 기독신자들만이라도 그처럼 개인주의를 합리화시키고 이기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조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서 그런 모습이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내 감정’으로 목사를 대하고 ‘내 판단’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그야말로 유아독존적인 교인이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욕먹을 일은 하는 목사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라는 직분 자체를 조금이라도 경히 여기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상교회가 부분적으로 비판을 받아 마땅한 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 때문에 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교회의 주인’이나 된 듯이 여기는 큰 착각이며,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엄청난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기독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목사의 권위’에 대한 기본적 예의, ‘교회의 영광’에 대한 당연한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뜩이나 ‘주의 사자’들은 ‘아말렉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그러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블레셋 사람’들이 완전히 넘어뜨리려고 발악하고 있는데, 그런 자중지란과 이적행위로 상황을 더 악화시켜서야 되겠습니까?
  명색이 ‘선민’이며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 오히려 배신자들과 배교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 말세에 어찌하든지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더욱 존중하고 ‘주의 몸 된 교회의 영광’을 온 세상 앞에 밝히 비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