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8-05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 1장 12-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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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8-05
2018′경향의 강단(33)(2018년 8월 5일 / 주일 대예배)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 1장 12-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8월 5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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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 1장 12-18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약은 독이고, 독은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과 독은 근본적으로 무슨 상극의 물질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비상(砒霜)은 1그램보다 훨씬 적은 양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맹독으로서 예로부터 사약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극미량으로 조제하여 해열작용이나 관절염 치료 등에 사용해 왔으며 최근 미국 식약청(FDA)에서도 비상을 골수암의 치료제로 승인했다고 합니다.
  니코틴 역시 흡연가들의 건강을 해치고 폐암의 주원인이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소량을 사용할 때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력 회복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하며, 튜렛증후군이라고 하는 소아 유전성 신경장애를 치료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이런 사례는 끝없이 들 수 있는데, 마취제나 강심제를 비롯하여 주름제거에 사용되는 보톡스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많은 약들이 다 독성물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약과 독은 원래 하나이며, 오직 그것을 섭취하는 ‘용량의 차이’에 따라서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 먹으면 약이 되지만 잘못 먹으면 독이 되는’ 양면적인 현상은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오늘 본문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4절을 통해 신자가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2절 이하의 말씀은 그 시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잘 통과해 내는 것은 성도의 성화생활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정말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마치 ‘약과 독’처럼 성도가 받게 되는 ‘시험’에는 과연 어떤 ‘영적 양면성’이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시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견디어내기만 하면 상을 얻게 해 주는 약이 됩니다.

  즉 ‘시험의 약’을 잘 먹는 경우인데, 12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앞의 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테스트(test)’ 혹은 ‘시련(trial)’에 해당되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내리시는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이 닥쳐올 때 그것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는 일차적으로 “참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앞서 3절과 4절에서 “인내”라는 말로 이미 똑같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와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그처럼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 만일 인내로 제대로 대응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오히려 “복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만 보면, ‘시험’과 ‘복’이란 결코 연관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재수 없는 일이고 시험이 없어야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곧바로 복으로 직통되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그 시험이라는 약을 잘 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성령께서 단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이 복으로 이어지게 됩니까?
  그것은 오직 “시련을 견디어 내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견디다’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인정받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데, 합쳐 본다면 ‘연단을 통과함으로써 인정을 받다.’ 즉 그 테스트에 합격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란 성도의 성화 과정에서 선택사양 과목이 아니라 필수전공 과목에 해당됩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지 않고는 절대로 ‘영화(榮化)’라는 졸업장을 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테스트를 통하여 무엇을 인정받아야 합격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어지는 12절 하반절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그 테스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시험이란 신자가 주님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 내는 테스트라는 말입니다.
  평소에 그 입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도 그 심령으로 정말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험이 닥치면 그 모든 것이 정말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였는지 그 진위가 명백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22장 1절과 2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테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12절에 보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그 테스트에 대한 합격 통보가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당신을 진실로 더 경외하는지, 바로 그것을 테스트해 보시기 위하여 그런 시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 그런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게 되면 그 다음에 약속된 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이란 ‘권위의 상징인 왕관’과 ‘경기의 승리자에게 영광과 명예의 상징으로 주는 월계관’, 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물론 후자에 해당됩니다.
  ‘생명’이란 바로 그 상급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서, 물론 ‘육체적 목숨’이 아니라 ‘영생하는 삶’을 뜻합니다.

  어떤 계산된 욕심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대표적인 금기입니다.
  하지만 장차 내세에서 얻을 상급을 바라보면서 오늘 주님을 바로 따라가는 힘을 얻는 것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8장 18절에서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견디고 뛰는 운동선수처럼, 성도는 바로 이 영생의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금세의 모든 시련을 인내하며 통과해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그 약을 잘 받아먹을 만한 성도에게 당신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하기 위해 허락하시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 만화책에서 본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그 아버지가 낮에 뿐 아니라 밤에까지 공사장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 곡괭이를 내리치면서 ‘내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 하고 속으로 되뇌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부모들 모두가 그와 같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된 일과를 견디어내고 있지 않겠습니까?

  청년들에게 군대생활이란 매일이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저도 야전에 나가 추운 밤에 보초를 서면서도 나의 이 작은 희생 덕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내 가족들이 지금 평안히 잠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법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면 시련이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내 자식이나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우리에게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로 있다면 그 어떤 시험도 그야말로 ‘넉넉히 이기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처럼 시험을 견디어낸 성도에게는 최고로 아름답고 멋있는 영광과 명예의 면류관이 따라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신적으로도 모든 것이 잘 되는 성도 역시 남들 앞에 덕이 되고 본이 됩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 사랑을 더 뜨겁게 달구어 가는 성도가 발하는 아름다움은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금세에서의 명예뿐 아니라 내세에서 영생의 면류관까지 받게 되니 그 복이란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정말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체크해 보시려고 때때로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을 잘 견디기만 하면 사실 우리 또한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재삼 확인할 수 있으니 실로 일석이조입니다.
  오직 시험이라는 약을 잘 받아먹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의 상을 반드시 누릴 수 있도록,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인내함으로써, 그 주님께서 주시는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시험은 원망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죄에 빠지고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의 약’을 잘못 먹는 경우인데, 13절 이하 18절에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13절부터의 “시험”이란 단어는 바로 ‘미혹’ 혹은 ‘유혹’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12절의 시험은 ‘trial’(시련)이라고 번역한 반면 13절 이하에 나오는 시험은 ‘tempted’(미혹 당함)라고 번역함으로써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 나타나는 면모는 똑같은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받는 자세에 따라서 한쪽은 ‘테스트’가 되지만 다른 한쪽은 ‘죄에 빠지는 미혹’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미혹을 당하게 되는 최악의 경우가 곧 자신에게 닥친 시험을 두고 그 모든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곧 ‘내가 이렇게 시험에 빠진 것은 다 하나님 때문이다.’라는 원망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배웠다는 교인들이 하기 쉬운 말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달려 있는 것이라면, 내가 죄를 지어도 그것은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 탓이 아니냐?’라는 억지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악한 교인들이 있는 까닭에 성령께서는 강한 어조로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하나님 때문에 시험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아예 단단히 못 박아 경고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험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야말로 약을 잘못 먹어도 엄청나게 잘못 먹은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그런 생각일랑 머릿속에 떠올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말씀이 그 세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죄와 아무 상관도 없으시기 때문인데, 바로 13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천명하는 사실입니다.
  여기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라는 말은 ‘받으실 수가 없고’(cannot be tempted)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가 그 어떤 악으로부터도 절대로 영향을 받으실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니 사람을 시험하시는, 즉 죄를 짓도록 충동하시는 유혹을 친히 내리실 리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죄에 빠지는 시험을 당하게 되는 진짜 이유는 오직 사람 그 자신 속에 있기 때문인데, 14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밝혀 주는 사실입니다.
  원래 ‘욕심’(desire) 그 자체가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육체적이고 이기적이며 악의적인 욕망’을 가리키는데, 사람이 시험을 받고 그 때문에 미혹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자기 욕심에 끌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 “끌려”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강하게 끌어당기다’라는 뜻의 어근과 ‘미끼에 현혹되다’라는 뜻의 어근이 결합된 말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이 꼭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치 미끼가 달려 있는 낚시 바늘에 고기가 걸리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죄는 먼저 미끼를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고 끝내는 사람을 끌어당겨 완전히 낚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15절에 기록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죄의 성장 사이클’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욕심에 끌려 죄에 넘어가면 그 죄가 점점 자라서, 즉 그 죄에 점점 익숙해지고 능숙해지고 뻔뻔스러워지고 둔감해져서 결국은 그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시험에서부터 비롯되는 최악의 결과입니다.
  죄에 빠지는 미혹의 원인은 오로지 사람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시험에 대한 책임전가를 하나님께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 셋째 이유는,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오직 선을 행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6절에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악함을 가리려는 행위가 될 뿐이니 결코 그런 자기합리화에 스스로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와 아무 상관이 있을 수 없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독하는 중범죄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17절에 이어지는 대로 하나님은 오직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사’란 좋은 것을 내려 주시는 행위를 가리키며, ‘선물’이란 좋은 것 바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빛들의 창조주가 되시는 까닭에 결코 그 어떤 어두운 일에 관여될 수 없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말은 해, 달, 별들은 ‘회전’, 즉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그 위치나 밝기나 모양까지도 변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그 선하심에 아무 “변함도 없으신” 실로 신실하신 분이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온갖 선하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어떤 나쁘고 악한 시험을 주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18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우리를 “첫 열매”“그 피조물 중에” 최고의 존재, 문자 그대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시려는 지극히 선한 의도를 따라 창조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선하신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써 우리를 “낳으셨던” 즉 중생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심을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발휘하셨으며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삼아 주시려 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 ‘사람 자신의 악한 본성’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선한 역사’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라는 따위의 말이나 생각은 감히 꺼내지도, 떠올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벽하게 거룩하신 성품과 우리 자신의 본색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나 자신만 솔직히 살펴보아도, 그 근본이 얼마나 악한지는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일인데, 어떻게 내게 벌어지는 악한 일, 나쁜 일이 하나님 쪽에 원인이 있다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순진한 갓난아이 하나를 앞에 두고 어른이 그 아이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과 똑같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철면피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유혹에 잘 끌리는 본성, 그 시험에 빠져 죄를 낳는 생산력, 그 대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기까지 그 모든 원인과 책임은 오직 사람, 미혹 받는 시험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자연발생 시키는 능력을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 자신 쪽에만 전적으로 있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는 일들이란 전부가 다 선한 일, 좋은 일들뿐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일용할 양식이나 행복한 가정이나 매일 누리는 학창생활이나 자유롭게 영위하고 있는 교회생활 등, 일단 세기 시작하면 열 손가락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이 생길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조차 제대로 드릴 줄 모르는 인생들이, 오히려 궂은 일만 생기면 모든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참 얼마나 낯 두껍기 짝이 없는 배은망덕이겠습니까?

  열 가지를 잘해 주어도 단 하나도 기억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면서, 한 가지 자기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지금까지 자기에게 잘해 주기만 한 사람에게 오히려 뒤집어씌우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의 나쁜 일이라는 것은 바로 본인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도 꼭 그처럼 행하는 못된 교인들이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스스로 미혹을 당해서’ 벌어진 일인 줄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걸핏하면 “아이구,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못 살겠습니다.” 라고 함부로 원망을 내뱉는 것은,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 하는 사람의 못된 근성을 하나님 앞에서까지 감히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꼴입니다.
  시험이라는 약을 먹게 될 때 그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독하는 독이 되지 않도록, 항상 좋은 일에는 잊지 않고 즉시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나쁜 일이 벌어지면 그 모든 원인과 책임이 자기 속에 있는 줄을 깨달으며 겸손히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똑같은 약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약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이 약의 성질입니다.
  아무리 보약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것조차 몸에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몸이 아주 약해서 처음으로 보약이라는 것을 먹어 보았는데, 정말 제대로 잘 먹은 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적어도 입맛 하나는 결코 떨어지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만해도 충분한 보약이 된 셈입니다.
  반면에 중국의 진시황은 51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불로장생약이라고 먹은 게 오히려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시험이라는 약’이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같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것을 잘 받아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심한 부작용만 일으키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시험이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테스트’로 받아 합격하면 아주 좋은 약이 되지만, 그 똑같은 시험을 ‘사탄의 미혹’으로 당할 때에는 치명적인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이 ‘시험이라는 약’을 정말 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자기 생각에 본인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것만 하나님께 달라고 떼를 쓰면서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시는 일이 당장 보기에는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전적으로 믿고 무조건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후자의 신앙생활은 사실 부자관계와 비교해 보아도 그렇게 생각처럼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항상 부모에게 자기 욕심대로 해달라고 졸라대고 칭얼대다가 부모가 그대로 해 주지 않으면 당장 그 부모를 욕하는 자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후레자식이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그건 안 돼.”라고 말하면 그저 “예, 알겠어요.”라고, 왜 허락해 주지 않으시는지 이유는 잘 몰라도 일단 공손함과 순종심을 보여 주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정말 남의 집 아이라면 ‘잘 키운 자식’이란 칭찬 한마디라도 꼭 해 주고 싶고, 자기 아이라면 ‘다 자란 자식’이라는 만족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자란 영적 적자(嫡子)’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라고 하셨던 대로 ‘유기(遺棄)된 영적 서자(庶子)’가 될 것인지를 판가름하게 되는 시금석입니다.
  우리에게 약으로 주어지는 인생의 시험을 당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의심치 않는 가운데 그것을 인내로 통과함으로써,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 시험에 합격한 성도에게만 주어질 영광의 면류관을 꼭 받아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