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7-29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1-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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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7-29
2018′경향의 강단(32)(2018년 7월 29일 / 주일 대예배)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1-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7월 29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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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1-11절 /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현대사회에서 ‘위기관리’라는 용어를 흔히 쓰고 있습니다.
  인생이나 세상사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위기’는 오기 마련인데, 그것을 ‘관리’하는 자세와 능력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결국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위기를 맞이했을 때 당황하면서 우왕좌왕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대처하면 위기의 확대를 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호전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코카콜라 회사의 페이스북에 포르노 동영상이 포함된 내용이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한 학부모가 그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자 코카콜라는 그 게시물을 서둘러 삭제한 후에 그 학부모에게 사과의 뜻으로 호텔숙박권과 뮤지컬 공연 티켓을 보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호텔까지 다녀올 왕복항공권을 같이 제공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 학부모가 이 사실을 공론화시키면서 논란이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코카콜라는 소비자의 정당한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공개적인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고 오로지 사건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는 인상만 주게 되면서 더 많은 비난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델 컴퓨터 회사는 비슷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대처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한 블로거가 델 컴퓨터의 애프터서비스에 대하 불만을 품으면서 ‘ihatedell.com’(나는 델이 싫다.)라는 사이트를 만들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부응하여 전직 델 직원 한 명이 ‘델 매니저의 22가지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영업 기밀까지 폭로하는 바람에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델 컴퓨터 회사는 블로그에 ‘델의 23번째 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최고 경영자가 직접 사과를 하면서 서비스 정책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델은 그 후 2년 만에 그 트위터를 통해서만 무려 6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위기관리 능력’이 꼭 필요한데, 바로 야고보서의 서두가 그런 교훈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1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열두 지파”란 물론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지만, 확대 해석하면 신약의 선민 즉 모든 기독신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발신인인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편지의 구체적인 수신자들은 스데반 순교 이후 이방 지역으로 ‘흩어졌던 자’(디아스포라)들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이전처럼 자주 접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시련들이 그들에게 닥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처럼 ‘영적 위기’에 처해 있던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서신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기독신자가 신앙생활에서 위기를 당할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호전시키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힘든 시험’을 당할 때에는 ‘온전한 인내’를 발휘하여 더욱 성화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절부터 4절의 말씀에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테스트(test)’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처럼 이방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이방인들의 핍박과 로마 정부의 탄압을 위시한 온갖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단 그 디아스포라 성도에게만 아니라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는 성도에게는 항상 갖가지 형태의 시험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그 모든 시험들을 다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없는(trouble-free)’ 완벽한 평화만을 누리며 기독신자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신자라면 필연적으로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중요한 것은 그 대처 방법을 배우고 발휘할 줄 아는 것인데, 바로 그 요령을 두고 성경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쳐 줍니다.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순수한 기쁨(pure joy)’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은 일견 너무나도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인 말로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이나(롬 5:3) 사도 베드로(벧전 1:6)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마 5:11-12) 똑같이 하셨던 말씀으로서, 기독신자에게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실전적인 ‘시험 대처 요령’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환난과 핍박을 현실적으로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기만 무사안일하게 사는 가운데 그냥 설교를 위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예루살렘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스데반의 순교까지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큰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일까지 직접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야고보는 목자로서 성도들을 위로해 주어야 할 사명을 잊지 않고, 이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교훈을 가지고서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성도는 ‘시험’을 오히려 ‘순수한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 ‘시험’이 사탄이 주는 ‘유혹’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시련”(trial of faith)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련’이란 말은 원래 금이나 은을 불속에서 제련하여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연단은 무엇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됩니까?
  바로 “인내(perseverance)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덕목들 중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시련’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산물인 것입니다.

  그처럼 인내를 온전히 이룬 성도는 결국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으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온전하다’란 ‘성숙하다’란 뜻이고, ‘구비하다’란 ‘완성되다’라는 뜻이며,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완벽하다’는 뜻으로서 다 동의어들입니다.
  즉 신자가 성화의 성장에서 100점을 맞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수과정이 곧 ‘시험’을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이면서 ‘인내’해 내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난 후에 아주 소중한 재산이 하나 남았는데, 그것은 앞으로의 제 인생에서 육체적인 시련만큼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고된 훈련과 근무가 저의 육신을 그처럼 연단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인생 시련에 대한 맷집을 좀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그것을 가리켜 ‘재수 없는 일’ 혹은 ‘불행’이라고만 부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아니하고 그냥 ‘시험’이라고 합니다.
  즉 그런 일들을 두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내게 주신 테스트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런 것들을 두고 무슨 ‘운수’가 나빠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부러 주시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될 때 성도는 그 시련을 오히려 기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신자로서의 인내력을 단련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아니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에서는 입학년도로 학번을 따지지만 미국 대학교에서는 졸업년도로 학번을 따집니다.
  입학만 했다고 다 된 것이 결코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점을 잘 받고 졸업까지 해야 진짜 그 학교 출신이라 불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번 신앙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의 입교인으로 등록했다고 자동적으로 다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온전하게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이 신앙생활의 성화 과정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남아 있는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온갖 ‘힘든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해 줄 호기임을 깨닫고, 그 ‘믿음의 시련’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면서 ‘인내’로써 넉넉히 통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려운 기로’에 설 때에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5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앞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시험들을 당할 때 영적으로 바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해 주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의 성도들은 이전에 미처 겪지 못한 여러 가지 시험을 많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흉상 앞에 분향할 것을 강요받거나, 제사상에서 물려낸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동석하게 되거나, 혹은 동족이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만 쫓아다니면서 모함하는 유대인들의 핍박 등 전에 겪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험을 당할 때마다 아직 “(신앙의) 지혜가 부족한” 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처 판단이 서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예루살렘교회에 있을 때라면 사도들에게 직접 물어 보면 되었겠지만, 이방에 흩어져 사는 형편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경우에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서 얻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구하라”는 말은 ‘요청하라’는 뜻입니다.
  잠언 2장 6절과 7절 상반절에 “6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a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라고 했듯이,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근원이시며 모든 지혜의 무한한 제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란 차별 없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후히”란 기도한 사람에게 넉넉하게 응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즉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도와주더라도 그 전에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했느냐?’라든지 최소한 ‘봐라, 내가 뭐라고 그랬니?’라는 한마디는 꼭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받는 우리에게 일절 부담감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까지 써 주시면서 전적으로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드릴 때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자세가 있는데 그것이 곧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될까 되지 않을까?’라고, 바다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교인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하면서도 ‘될지도 모르고 안 될지도 모른다’, ‘응답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본전 밑지는 일은 없으니 괜찮다.’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은 기도뿐 아니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 즉 신앙생활뿐 아니라 매사에 안정감이 없고 늘 불안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서 그런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하여 불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그 자녀의 소원을 매정하게 거부할지도 모르는 아버지로, 자녀의 소원을 들어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로 여기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런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쾌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자를 노여워하시고 그 기도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혜가 없어서 실수한 것은 꾸짖지 않으시지만, 기도하면서까지 그렇게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용서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함을 먼저 시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매사에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기도드려야 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고 있다면 그 얼마나 큰 교만이겠습니까?
  사실상 기도해야 할 상황과 기도를 안 해도 될 만한 상황을 스스로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자만심이 가득 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지혜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영위함에 있어서 그 외에도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드려 도움을 요청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니 채워 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기도하게 됨으로써 의심 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의심 없이 기도할 줄 알게 되니 그 신앙 자체 역시 더욱 확고히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만 가지고 어떻게 해 보겠다는 사람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조언과 지도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어린애처럼 유치한 판단, 죄인이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욕심에 따른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지만, 기도하는 성도는 주님처럼 생각하게 되고 주님의 능력이 그 손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을 때, 인생의 대사가 걸린 어려운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낮은 인생’에 처할 때에는 오히려 지금 누리고 있는 ‘영적 은혜’를 더욱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9절 이하 11절에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극소수이기는 했지만 “부한 자”도 있었습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부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기후에서 흔히 생기는 열풍 현상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한번 불기만 하면 꽃이고 풀이고 다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라 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부(富)라는 것도 경기 침체나 유가 파동 등 무슨 ‘바람’ 한번만 불면 금세 다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부자 교인이 “그 행하는 일” 즉 ‘돈 버는 일’에만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산다면 그 신앙이란 지극히 불안하고 취약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한 자’들은 오직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여 윗자리에 앉게 되고 남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낮아질’ 수 있겠으며,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어떻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한 부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에 불과함을 인정하게 되면서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절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그런 ‘부자 성도’는 자신의 ‘영적 낮음’을 오히려 세상 앞에서 자랑하며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자의 겸손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없는 사람이 없는 표를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지만, 있는 사람이 있는 표를 내지 않고 스스로를 낮출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동시에 그만큼 고상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낮은 형제”는 오히려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낮은”이란 말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함을 뜻합니다.
  실제적으로 초대교회에서 절대다수의 신자가 이 ‘낮은 형제’ 즉 사회에서 종이나 노예의 신분으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에 있던 자들이 그 어떤 ‘높음’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 “자기의 높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높은 지위와 영원한 기업을 누리게 된 부요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하층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왕 중 왕’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이었으니 마땅히 이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공산주의 사회는 아예 제도적, 정치적으로 계급이 결정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와 반면에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경쟁과 개인의 노력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부여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는 이런 최고 상류사회 인사, 아니 최고 로열패밀리(royal family)의 왕족이 되는 특권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 영적 특권층이 된 것을 “자랑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교만’이 아니라 ‘긍지(pride)’를 뜻합니다.
  즉 그런 부한 위치를 그냥 자각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말고 밖으로 자랑스럽게 증언하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권세’를 받고 저 ‘천국 영생의 유업’을 받은 신자라면, 당연히 이런 사실을 두고 세상 앞에서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가난하다든지 지위가 낮다든지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좋을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만큼은 이것이 오히려 큰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 낮으면 낮을수록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영적 높음이 더욱 감사하게 여겨지고, 세상에서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그런 내세의 부요함이 더욱 복스럽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사람이 있는 표를 내는 것은 교만한 자랑이 될 뿐이지만, 없는 사람이 없는 것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받은 많은 복을 자랑할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고고한 모습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에는 아무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성도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찬 301장)라고 뜨겁게 찬송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부하고 높은 생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적 은혜들, 하나님의 양자 된 지위와 영생 유업의 상속자 된 복을 자랑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는 ‘신행일치’입니다.
  즉 신앙은 생활과 완전히 일치될 때에만 그 의미와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통해 배우고 믿게 된 신앙이 이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어야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런 기회란, 그저 만사형통할 때보다는 오히려 궂은 일, 나쁜 일처럼 보이는 위기가 닥칠 때에 있는 것이라고 성령님께서 이 야고보서의 첫 장, 첫머리에서 선포해 주십니다.
  힘든 시험을 당할 때, 어려운 기로에 서게 될 때, 돈도 지위도 없는 낮은 인생에 처하게 될 때, 바로 그런 때가 ‘영적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기회라고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다 그런 위기를 통과하게 됩니다.
  죄 많은 세상을 통과하면서 신자가 시험을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련의 시기를 성도는 오직 인내로 통과함으로써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라고 더욱 성화생활에 진보를 낼 수 있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사노라면 굳이 ‘결정 장애’ 따위의 신조어를 동원할 필요 없이 누구나 다 어려운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혼자서 골머리를 썩일 필요 없이 오직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기만 하면 전능자께서 친히 다 해결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서울에서 그리 부자 동네라고는 할 수 없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 재벌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인간사회에서 가난하고 비천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이처럼 부요하고 높은 자가 된 은혜를 자랑하면서 더욱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며 열정적인 전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실로 기독신자는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 바꾸면서 살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내 인생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나쁜 일만 생긴다고 짜증내며 불평하는 것은 스스로 그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실로 어리석은 소치일 뿐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 닥칠 때에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기도’를 올리고 이미 받은 큰 은혜를 ‘자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오히려 더욱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는’ 복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