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7-08 “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리라” 출애굽기 33장 1-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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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7-08 경향의 강단(29)
2018′경향의 강단(29)(2018년 7월 8일 / 주일 대예배)
“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리라” 출애굽기 33장 1-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7월 8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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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친히 너희와 함께 가리라"

출애굽기 33장 1-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외국으로 관광여행을 가게 될 때 특히 처음 가보는 곳이거나 그 나라의 언어를 전혀 모를 때에 가장 간단하고도 안전한 방법은 여행사의 패키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행 패키지’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바로 현지의 ‘관광 가이드’입니다.
  통상 도착지의 공항에서 그런 가이드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여행객들은 그 순간부터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그 뒤만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면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미리 계획되어 있던 관광코스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즐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가이드가 여행객에게 “지금 내가 그 여행사 본사를 상대로 파업을 하는 중이라서 당신을 안내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서 알아서 구경하십시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잔뜩 기대를 가지고 왔던 여행객에게는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길을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가운데 혼자서 찾아갈 방도가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처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는데, 그로 인하여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기로 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든지, 또한 ‘하나님의 사자를 이스라엘 백성 앞서 보내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 주시겠다는 등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3절)라는 충격적인 변경사항이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으신다면 가나안 정복은 고사하고 당장 내일부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조차 막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기록된 “준엄한 말씀”이란 ‘불행한 소식’(evil news)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과 기쁨이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참담한 소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곧 각자의 “장신구를 떼어내고”(6절) 회개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동행해 주실 것을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저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도대체 어떤 방법을 통하여 매일 같이 걸으며 그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첫걸음입니다.

  7절부터 11절에 “7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단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회막”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회막은 성막을 만들기 이전의 ‘임시 성막’과 같은 것이었는데, 모세는 이 회막을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함으로써 ‘구별된 거룩한 처소’가 되게 했습니다.
  모세가 바로 이 시점에 그런 회막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교통하며 사는 자세를 새로이 익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회막’(tent of meeting)이란 이름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게 되는 장소’라는 의미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7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다 그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자 할 때면 스스로 자기 처소를 떠나 하나님의 정하신 예배장소로 나아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8절에 보면 특히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모든 “백성이 다 일어나”“자기 장막 문” 즉 자기 집 문 앞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회막으로 나아오고자 할 때 항상 경건한 예의를 갖추고 주의를 집중하는 자세를 지켜야 할 것을 일깨워 줍니다.
  10절에서는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설” 때에 즉 하나님께서 친히 그 회막에 강림하심이 나타날 때 모든 백성들은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했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될 때 성도는 당연히 그 앞에 머리 숙여 최고의 경외를 올릴 수밖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회막으로 나아가며 회막을 바라보며 회막을 향하여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바로 모든 생활을 오로지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할 성도의 자세를 단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중심이 된 회막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곧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 ‘대면’이란 말은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맞대고 이야기했다는 뜻은 아니고, 그만큼 가까운 관계에서 긴한 말씀을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까?
  또 사람이 자기 친구를 만나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회막을 통하여 모세와 그처럼 깊은 ‘말씀의 교제’를 나누셨으며, 백성들은 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교통하시는 것’ - 바로 이것이 회막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계속 누리기 위해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의 생활 강령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궁극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중심’의 삶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발이 걸어올 수 있는 교회에 나아오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를 바라보며 성도가 그 마음과 뜻과 힘을 함께 모을 수 있는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생활이야말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이 곧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곧 ‘성경 중심’이 되고, 그렇게 ‘성경 중심’으로 살아야 진짜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만약 행선지가 틀린 비행기나 배에 오르게 되면 아무리 그 안에 잘 타고 있어도 엉뚱한 데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상교회들 중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하지 않고 그저 현대인들의 ‘가려워하는 귀만 시원하게 살짝 긁어주는 카운슬링식의 설교’만 있는 교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는 ‘구원의 방주’에 타지 못하고 그 대신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이나 안내해 준다는 ‘유람선 교회’에 타고 있다가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그대로 ‘지옥 직행’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몸담게 되었다는 사실은 보통 큰 은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의 예배에 출석할 수 있다는 자체가 곧 여러분의 ‘평생 가이드’로서 동행해 주시려는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이 있는 교회 중심의 생활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천당까지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과 평생 동행할 수 있는 축복의 시작인 것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판단을 내리는 것’이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12절부터 17절의 말씀에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라고 한 것은 본문 1절부터 3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혼자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로서는 참으로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행할 일을, 내일 갈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지 않으시면 모세는 당장 “나와 함께 보낼 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즉 먼 장래 가나안 땅 정복은 고사하고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조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실로 간절한 마음으로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해 주시는 것만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며, 또한 이스라엘을 여전히 “주의 백성” 즉 선민으로 “여겨” 주신다면 꼭 그렇게 해 주셔야 한다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만약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아예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끝까지 동행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면 지금 아예 출발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해 주셔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천하 만민 중에서 구별”됨을 얻은 표식을 온 세상 앞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약속에 대하여 재차 다짐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끈질긴 모세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라고 당신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미 당신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또한 “이름으로도” 아실 정도로 가까운 모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도리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어도 자기 앞날을 자기가 알아서 찾아나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아도 그저 자기 눈에 멀리 ‘가나안 땅’만 보이면 무조건 그곳만 바라보며 혼자 돌진하려 합니다.
  저 앞에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내 인생에 이루고 싶은 어떤 욕망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기만 하면, 어찌하든지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한시바삐 달려가서 내 인생의 행복을 붙잡고야 말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앞뒤를 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는 목표라는 것은 아예 추구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자기 혼자의 욕심만 가지고 대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이미 그 인생 방향이 청소년 때부터 완전히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여호와이레’를 소망하지 아니하고 그저 ‘몇 억’ 하고 목표액만 정해놓고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사는 사람은 결코 ‘만민 중에서 구별된 은총 받은 백성’의 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지 않는 앞날이란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 해도 아예 출발할 필요조차 없는, 노력할 가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것인 줄로 알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두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직접 차를 몰고 출입해야 하는 미국생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데, 그런 경우에 남녀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에게 길을 가르쳐줄 때에는 약도를 그려주는 것이 제일 간단하고 확실하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그림보다는 ‘몇 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어디서 우회전을 하고 어떻게 생긴 건물이 보이면 거기서 좌회전을 해서’ 하는 식으로 말로 설명해주는 것을 더 잘 이해하고 선호합니다.
  하지만 남녀 누구에게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약도’를 그려주고 거기에다 ‘설명’도 덧붙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는 ‘지도’라고 한다면, ‘기도’는 그 지도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신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신앙생활의 원칙을 가르쳐 주지만, 각 사람에게 그 처한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개인적’으로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드리면, 성령께서는 그 기도하는 성도가 그 읽은 말씀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그야말로 ‘일대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을 배운다 할지라도 만약 기도를 하지 않으면, 손에 약도는 들고 있어도 읽을 줄 모르는 ‘눈뜬장님’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실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인생이지만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 응답을 받음으로써 매사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이 자상하신 동행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18절 이하 23절에 기록하기를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께 참으로 당돌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회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 받은 그가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청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사람 생각에는 하나님의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동행해 주심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같은 요청을 들으시고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죄인 된 사람이 완벽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직접 대한다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마치 땅 속에서만 살던 벌레가 햇빛에 노출되면 곧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당신께서 완전히 “지나” 가실 때까지 그를 당신의 “손으로” “덮어” 두심으로써 그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오직 당신의 “등”만 보도록 하셨는데, 물론 하나님에게는 ‘육체’가 없으므로 이것은 아마 뒤에 남겨진 ‘영광의 잔상’ 같은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하는 것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즉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 벌어지는 어떤 선한 역사를 체험하고 그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그 이름이 선포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인 줄로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몸소 뵈옵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것”이란 어떤 ‘가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윤리적인 속성’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볼 수 없는 대신에 영적으로 그의 사랑, 자비, 선하심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세 역시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순간순간 사사건건 선하게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잠시 하나님의 “등”과 같은 ‘영광의 잔상’을 목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해 주시는 명백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8절에서 다윗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고백한 것도 그와 똑같은 맥락입니다.
  실로 신앙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사람보다도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매사에 주님의 선하신 섭리를 체험하고 그때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떠올리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그전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여겼을 일, 그전에는 오로지 재수가 좋았다고만 판단했을 일들이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내 눈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는 선한 것’인 줄 깨닫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실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곁에 모시며 동행하는 삶을 마음껏 즐기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큰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에는 물길이나 암초의 위치 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장조차 배를 몰기가 위험합니다.
  그럴 때에는 입항하기 전에 도선사(導船士)가 탑승하여서 선장 대신에 키를 직접 조정하면서 그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인도합니다.
  선장이 그저 해도만을 보면서, 혹은 무선으로 안내만 받으면서 배를 모는 것보다는 아예 도선사가 몸소 동승해서 직접 인도해 주는 것이 백번 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동행을 그렇게 체험해야 합니다.
  그저 설교 듣는 것만으로 끝나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도’만 보고 끝나는 것과 매일반입니다.
  또 말씀을 받고 기도생활까지 했다 하더라도 만약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자세한 개인적인 ‘안내’까지 받고도 정작 배를 항구에 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는 그처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받은 그 귀한 언약을 스스로의 삶을 통하여 ‘맛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 지난 주일에 받은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게 되었구나!’라고, ‘지금 벌어진 이 일이 바로 내가 드렸던 기도의 구체적인 응답이구나!’라고, 말씀과 기도에 대하여 ‘체험적인 재미’를 반드시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그저 지도만 그려주거나 전화로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아예 우리 곁에 동승하셔서 그 방향타를 친히 붙잡아주고 계시는, 실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도선사’(pilot)이신 것을 날마다 실제로 느끼고 맛봄으로써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가나안 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야말로 전 인생의 최고 목표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으면 그리로 가는 광야행군이란 아무 기쁨이나 소망 없이 그저 피곤과 고생만 가득 찬 길이 될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 혼자 마음대로 걸어가려 하는 오늘의 인생길이나 내일의 목적지는 오로지 제 발로 걸어가는 멸망의 지름길이 될 뿐임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 좋은 곳에 놀러갈 때에도, 사실은 그 ‘좋은 곳’보다는 그 곳으로 지금 함께 가고 있는 ‘좋은 동행자’ 때문에 그 여행이 정말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잡고 같이 가게 되면 바로 그 때문에 그 마음은 콩닥콩닥 뛰면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멀리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록 몸은 피곤할지라도 운전대를 붙잡고 있는 믿음직한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내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하나님의 동행이 없는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교회를 통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다른 것들은 다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상 모든 것을 자기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하며 살 수밖에 없는 외롭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세하게 가르쳐주시는 기도의 응답이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항상 시행착오만 반복하는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여호와이레’의 온기를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란 설사 평생을 오락과 휴가만을 즐기며 산다 하더라도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고 사는,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이 재미를 모르면 결코 진짜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날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오늘 하루와 내 미래의 앞길에 대하여 인도하심을 받고, 인생의 적시적지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서 그 성호에 영광을 돌림으로써, 실로 육안으로 친히 뵙는 것 이상으로 더 가까이 하나님과 평생토록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