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7-01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출애굽기 23장 14-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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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7-01 맥추감사 주일예배
2018′경향의 강단(28) (2018년 7월 1일 / 맥추감사 주일예배)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출애굽기 23장 14-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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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출애굽기 23장 14-17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어릴 때 가끔 온 가족이 함께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댁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손수 차를 운전하시고 어머니께서는 조수석에 앉으시고 저희 네 명의 형제자매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큰집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어머니에게 할머니께 드릴 용돈을 얼마나 가져왔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당황하시면서 아무 대답을 못하셨는데, 당시 자주 그랬듯이 집안에 돈이 궁해서 할머니께 드릴 약소한 선물 한 가지만 겨우 준비하고 ‘현금 용돈’은 전혀 마련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시게 된 아버지께서 “어머니한테 가면서 돈을 준비 안하면 우짜노?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준비해야지!”라고 벌컥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 '다른 사람한테 돈 빌리면 절대로 안 된다.’고 나한테 말한 사람이 누군데요?”라고 응수하셨는데, 사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아버지께서 평소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시작된 ‘부부싸움’ 때문에 큰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의 분위기는 영 말이 아니었고, 안 그래도 좁은 뒷좌석에 네 명이나 끼어 앉아 있던 저희들 또한 내내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날 우리 형제자매들이 확실히 배운 한 가지는 ‘할머니를 뵈러 갈 때에는 반드시 드릴 용돈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른을 찾아갈 때 그처럼 ‘선물’이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도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하시면서 덧붙여 명하신 사실도 그것이었습니다.
  그 ‘세 번’이란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맥추절이 다른 두 절기와 어떤 의미로 연관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비단 감사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성도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아야 마땅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감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드려야’ 구원 받은 성도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기록하기를 “14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15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매년 필수적으로 지켜야 했던 3대 절기 중에 첫째는 “무교병의 절기” 곧 ‘무교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인 ‘유월절’과 이어지는 절기였습니다.
  “아빕월의 정한 때”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력 1월에 해당되는 아빕월의 14일인데, 바로 이 유월절부터 시작하여 계속 7일 동안의 기간을 무교절로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무교병”이라는 것은 발효시키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떡인데,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발효시킨 반죽으로 만든 ‘유교병’보다는 맛이 좋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게 되었던 날 밤에 모든 것을 급히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그처럼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덜 걸리는 일종의 ‘비상식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이후로도 무교절 기간 중 내내 그 떡을 먹음으로써 그 유월절에 베푸셨던 큰 구원,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그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적어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뜨겁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명실 공히 최대의 절기였습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던 상태에서 해방을 받은 날일 뿐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한 족장의 가족’이나 ‘다른 나라에 얹혀서 사는 이방인’이나 ‘얽매여 사는 종 된 민족’이 아니라 ‘정식 독립국가’로 출범하게 된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고 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명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누리고 있는 그 큰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늘 기억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런 절기를 지키러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아무 제물도 없이 ‘빈손으로’ 얼굴만 내민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교절은 비록 무슨 ‘감사절’이라는 이름은 없었지만, 그 내용 자체를 볼 때에는 사실상 최고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절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맥추절 앞에는 무교절이 있었습니다.
  즉 맥추절을 두고 진정 감사드릴 줄 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무교절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 최대의 구원을 감사드릴 줄 알아야 마땅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교절을 통하여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게 된 이스라엘 사람은 맥추절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에서 감사절을 두 차례나 제정해 주셨던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당신의 구원을 받은 택자요 선민이라면 그 남은 생은 일 년 내내 매일 감사로 충만해야 마땅하며, 그래서 한 해에 적어도 두 번씩은 특별감사절로 지킴으로써 평소에도 그 감사를 생활화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감사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은 기능을 발휘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무슨 선물이나 음식등을 부교역자들을 통해서 제게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선물 보내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저는 잘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가서 답례를 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바로 큰 교회의 목사와 교인 사이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받든지 간에 ‘감사 카드’를 써서 부교역자를 통해 전달해 드립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나 마찬가지이며 또한 최소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저 마음만 전달되면 되지.’라고 말들은 하지만, 아무래도 선물을 보낸 쪽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잘 전달되었는지, 그리고 받는 쪽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받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만약 제가 그런 식으로라도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으면 그 교인과의 관계는 바로 그처럼 한쪽에서만 사랑하고 정성을 쏟으면서 그것이 제대로 이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thank you 카드’라도 받게 되면, 그것은 그저 ‘일방적인 관계’로 끝나지 않고 그래도 무언가가 오가는,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연결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선물 더 많이 보내달라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런 선물을 더 자주 받게 되고 제가 더 많은 감사카드를 보내게 되면 될수록, 그 교인의 이름이 제게도 기억되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들은 일단 구원이라는 가장 큰 특별은혜부터 시작해서 온갖 일반은혜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 그 관계는 바로 거기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며, 오직 진정한 감사로 반응할 때 비로소 ‘서로 오가는 관계’로 더욱 친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그런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주 드리면 드릴수록 그 관계는 남들보다 하나님과 훨씬 더 가까운, 아주 특별한, 실로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에 교회로 나오면서도 ‘어이구, 맥추감사주일이 또 왔나? 추수감사절만 있으면 되지 왜 이런 감사절까지 지켜야 하나?’라는 마음으로 나온 사람이 혹 있습니까?
  제가 그런 교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께 대한 감사를 일 년에 딱 한 번, 어버이날에만 합니까?
  기본적인 효성만 있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생신 때에도 축하드리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사 들고 가서 인사드리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생신 차려드리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설이나 추석은 왜 이리 자주 돌아와서 부모님께 선물해 드려야 할 부담이 생기게 만들까?’라고 하는 자녀가 있습니까?
  만약 정말 그런 마음이 드는 자녀가 있다면, 그리고 그 부모가 그런 자식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선물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부모에게는 그 얼마나 섭섭한, 아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그런 불효막심한 생각은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는 그렇게 함부로 대합니까?
  이런 감사절을 맞이해도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특별감사헌금을 준비하지 않고 나오는 교인이 있으면, 이 목사의 진심은 교회의 맥추감사헌금 예산을 채우지 못하게 될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교인의 심령에 아직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고 자기 삶에 무슨 특별감사를 드려야 할 아무 특별한 은혜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진짜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마음, 천당소망을 확실히 붙들게 된 마음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임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은 것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철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내게 베풀어 주신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 언약에 대하여 진실하고도 뜨거운 감사를 드림으로써 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즉시 드려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미래에 더 큰 복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16절과 17절에 기록하기를 “16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맥추절”은 성경에서 ‘칠칠절’, ‘오순절’ 혹은 ‘초실절’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절기는 무교절의 안식일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 단 하루만 지키는 것이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즈음에 보리와 밀을 수확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함께 모여 먹고 마시는 즐거운 분위기 가운데 이 날을 지켰습니다.

  “수장절”이란 ‘초막절’ 혹은 ‘장막절’로도 불렸는데, 유대인의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시작되어 일주일 동안 계속 지킨 절기였습니다.
  이때는 익은 곡식과 더불어 과일들, 특히 포도와 올리브 등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의 수확이 끝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수확물에 대한 감사와 또한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면서 이 ‘수장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봄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과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절을 각각 따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어차피 같은 농산물 수확을 두고 감사하는 것이니까, 봄가을 한데 묶어서 한꺼번에 지키면 간단하고도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따위의 생각은 사람의 머리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는 애당초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봄에 수확물을 거두었으면 바로 그것을 두고 때를 놓치지 말고 즉시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더 크고 중요한 가을추수 때에 가서도 더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해 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같은 농산물을 두고 감사하는 것이니 한 번에 모아서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봄의 농산물을 두고 하나님께 전혀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가을추수를 하게 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바뀔 턱이 있겠습니까?
  또 매일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 이 가장 기본적 감사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일들을 두고 어떻게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어젯밤에도 지켜 주신 호흡과 맥박, 오늘도 먹여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전혀 감사드릴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 생일이나 결혼을 맞이하거나 승진이나 기업의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해서 갑자기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즉 ‘맥추절’의 ‘하루’ 동안 즉시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자만이 ‘수장절’의 ‘일주일’에 걸친 큰 감사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주인공인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가 낮에 수용소 밖으로 나가서 작업을 하던 중에 부러진 톱날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그 톱날 조각을 잘 갈아서 ‘구두 수선용 칼’을 만들면 수용소 안에서 꽤 짭짤한 ‘벌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것을 장갑 속에 숨겨서 들어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죄수들은 다시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철저한 신체검사를 받게 되는데, 그때 만약 간수에게 그 톱날 조각이 걸리면 슈호프는 영락없이 얼음 같은 독방에 열흘이나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슈호프는 간수의 손이 자기 장갑에 닿는 순간, 기독신자도 아니면서 무의식중에 ‘하나님! 제발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제발 중영창만은 면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 기도가 통했는지, 간수는 톱날 조각이 숨겨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슈호프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슈호프는 그야말로 날아갈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용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그 소설의 다음 문장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또 한 번 기도를 올리면서 감사를 드리지는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거니와 이제는 약간 시기를 잃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한다면 간수가 ‘통과!’라고 말해 주었을 때 ‘즉시’ 감사기도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 ‘감사의 타이밍’을 놓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제때’에, ‘그때그때’ 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용돈을 주면 곁에 있던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 애들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해야지.”라고 늘 주의를 주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자주 용돈을 주시니까 일일이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고, 감사하는 마음을 잘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가서 한 번씩만 하거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세상에 있습니까?
  또 만약에 자기 자식이 지금 부모가 주는 선물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다음에 더 많이 받을 것만 기대하고 있다면, 그런 자식에게 더 많은 유산을 남겨 주고 싶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심정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아니 감사하기는커녕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에게 이것을 해 주셔야 할 텐데, 저것을 더 많이 주셔야 할 텐데.’라는 불만만 품고 있는 교인, 매주일 감사헌금을 드리기는커녕 일 년에 겨우 두 번 있는 감사절조차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교인에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고 싶은 생각이 과연 드시겠습니까?
  정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보리추수’한다고 현대교회가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따위의 소리를 교인이 아닌 목사 중에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추수감사절 역시 교회가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도시 교회의 교인들은 자기가 직접 ‘추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울리지 않게’ 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던 시절, 즉 작년 가을에 추수한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는 3, 4월의 춘궁기가 오면 반드시 보리를 수확하고 보리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에도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보리 수확’을 하지 않아도, ‘이모작’이 뭔지를 몰라도 굶어 죽을 염려는 조금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 옛날 맥추절을 지켰던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등이 휘어지도록 농사를 지어야만 했지만 오히려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삼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봄에 허리가 아프도록 모내기 하지 않고 여름에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김매기 하지 않고 가을에 낫에 손을 베어보지 않아도, 아니 벼를 가리켜 ‘쌀나무’라고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밥상에는 그 귀한 ‘이밥’에 ‘고깃국’까지 매끼마다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맥추감사절’이나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이 오늘 같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절기’라고 생각된다면, 그 대신에 매주일을 ‘쌀밥 감사절’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지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맥추감사절은 절대로 목사가 교인을 ‘부담스럽게’ 만들려고 지어낸 절기가 아닙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하신’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교회의 헌금 수입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은 일 년에 한 주일 가지고서는 턱도 없고 일 년에 두 번 한다 해도 물론 모자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그래도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일 년 내내, 매주일, 아니 매일 감사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정해 주신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특별감사헌금을 일 년에 한 번만 내어도 될 것을 두 번 내게 하는 바람에 여러분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절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맥추절을 통하여 2018년의 상반기에 베풀어 주신 셀 수 없는 은혜에 대해 ‘즉시’ 감사드리는 가운데 하반기를 맞이함으로써, 연말의 추수감사절에는 더 크게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가 섬기는 각종 ‘영육 간의 이모작’들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뜨겁게 영위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외에도 조금만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매일 베풀어 주고 계시는 온갖 일반적인 은혜들에 대해서 ‘즉시, 그때그때’ 감사를 드려야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감사를 비단 오늘 같은 특별감사절기 때뿐 아니라 매주일, 매일, 매순간 드리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입게 되고 더 좋은 선물을 갑절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맥추감사절’은 원래는 추수감사절 한 번만 하면 충분한 것을 억지로 두 번으로 늘려놓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매주일을 감사주일로 지킨다 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두 주일만 특별감사절로 정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이것만은 꼭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적어도 예수 십자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라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던 이스라엘처럼 적어도 정사기념일과 부활절을 지킬 줄 아는 성도라면 일 년에 두 차례 정도는 감사절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 정도의 기본 감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맥추감사절에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진정 자신의 인격 속 깊이 항상 모시고 있음을 고백하고 또한 금년 하반기와 앞으로 남은 전 생애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고 더 많이 감사드리는 신앙생활로 계속 자라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