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6-03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고린도후서 5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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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6-03
2018′경향의 강단(24) (2018년 6월 3일 / 주일 대예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고린도후서 5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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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고린도후서 5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영화의 예고편에서 본 장면인데, 주인공이 톰 크루즈였습니다.
  그 톰 크루즈가 어찌어찌 하다가 경찰관에게 체포를 당했는데, 아주 기세등등하게 자기를 취조하는 경찰관 앞에서 너무나 태연자약했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경찰관의 말을 막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확하게 90초 후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거야. 첫 번째, 저 전화벨이 울리고, 두 번째, 당신네들이 내가 차고 있는 이 수갑을 대신 차고 감옥에 가게 될 거야.” - 정확한 대사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그것 참 대단한 예언이군.” 하면서 경찰관들이 비웃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말 모든 일이 톰 크루즈가 말했던 그대로 진행되었는데, 사실인즉 톰 크루즈는 지방경찰보다 훨씬 더 높은 상부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사람이 무언가 ‘든든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그 행동도 당당해지기 마련인데,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6절의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라는 행동이 바로 7절의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라는 원인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곧 ‘천당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앞의 4장 17절에서 그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그리고 이어지는 18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천당’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의 말씀을 통해 천당은 ‘실존하는 장소’임을 확인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해 두고 계시는 집’, ‘인생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곳’, ‘악인은 단 한 명도 들어올 수 없고 오직 완전히 성화된 의인만 모여 사는 공동체’에 자기도 분명히 들어가게 될 것을 정말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행하는 것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는 ‘천당에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한 신자가 이 세상에 살 동안 필연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신행일치’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천당에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는 성도는 인생의 어떤 환난 중에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1절부터 5절에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집을 가리켜 “장막 집” 즉 텐트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몸담고 살고 있는 거주지란 막대기 한두 개와 말뚝 몇 개만 빼내면 풀썩 “무너지는” 텐트와도 같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은 그런 ‘땅의 집’을 마치 자기 인생을 평생토록 지켜 줄 난공불락의 산성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재지변이 닥치거나 압류를 당해서 그 집을 잃게 되면 그야말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그는 자기 생전에 그런 일이 닥친다 해도, 또 언젠가 죽을 때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런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땅의 집’과는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는 놀라운 부동산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니 얼마나 잘 지어진 집이겠습니까?
  여기 ‘하늘에 있는 집’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맨션’(mansion) 혹은 ‘거주지’(dwelling place)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즉 임시 거처인 장막과는 달리 영원히 거주할 수 있도록 제대로 지어진 정식 집이며,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리는 텐트와는 상대도 안 되는 최고급 주택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천당은 하나님만 사시고 천사들만 출입하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살게 될 집인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당을 ‘내 집’으로, ‘내 방이 예약되어 있는 집’, 아니 아예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는 집’이라고, 우리는 천당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2절 이하 5절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의 집에서 사는 것을 두고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탄식하다’라는 말은 ‘괴로워서 끙끙거리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자라고 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나 인생의 괴로움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이라고 재차 언급하고 있듯이, 신자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인생고의 중압감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그처럼 근본적으로는 똑같이 괴로운 인생을 통과하면서도 불신자와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덧입기’라는 말을 직역하면 ‘옷을 입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의 집을 잃게 될 때 천당의 집을 마치 새 옷을 갈아입듯이 덧입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천당은 혹시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 때를 위해서 마련해 놓은 대비책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장막은 그저 빌려 쓰는 셋집, 여행자가 잠시 쉬었다가 지나가는 여관 같은 임시 거처에 불과한 것이며, 그 하늘에 있는 집이야말로 정말 좋은 집, 자기의 진짜 본가라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 새 집에 입주하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가 “이렇게 입음” 즉 ‘천당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참 기가 막히게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당을 확신하는 신자만이 이 세상 장막 집이 벗겨지게 될 때, 즉 자기 집을 위시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을 보호하고 안락하게 해 주던 모든 것들을 벗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아무 입을 것도, 아무 거할 곳도 없는 벌거숭이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와 반대로 천당소망 없이 죽는 사람은, 죽는 바로 그 순간부터 ‘벗은 자’나 다름없게 됩니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하던 것이라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단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자기 머리를 덮어 줄 지붕은커녕 몸에 걸칠 실오라기 하나 없는, 완전히 ‘벌거벗겨진’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덧입고자” 하는 자, 즉 천당 신앙으로 이미 든든히 차려입은 신자는 뭐 육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때로는 좀 후패해지고 좀 벗겨지고 좀 무너지게 되더라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자에게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삼킨 바 되다’라는 말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당함’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에서는 비록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난이나 핍박을 당할지라도 그것들이 ‘영생’에 의하여 삼켜버리는 대역전승이 천당을 믿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천당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보증되었다고 다 확실한 것이 아니라 정말 신용도(credit)가 높은 사람, 정말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증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성취해 주신 천당을 이제 성령께서 보증해 주시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이란 단순히 거주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을 꾸려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기반이 됩니다.
  집이 있어야 가정을 꾸밀 수 있고, 집이 있어야 밖에 나가서 일도 할 수 있고, 일단 자기 집부터 있어야 휴가 때에 다른 곳으로 여행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집이 태풍에 날아가거나 지진에 무너지거나 혹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팔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기 인생 전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니 누구나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그런 불신자들과 오십보백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천당을 믿지 않는, 이름만 교인 노릇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목적이 그저 이 세상에서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옷을 걸치고 좋은 차를 굴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갑자기 어떤 환난이 닥쳐와서 그런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그 인생도 그냥 끝장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천당 신앙 없이 기독교인 노릇을 한다는 것은 실상은 이미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교인이요 내세에 가서 ‘몸에 아무 걸칠 것이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있는 무너지지 아니할 집’을 이미 소유한 신자는 전혀 다릅니다.
  그 집은 그 어떤 천재지변도, 그 어떤 철거령도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우리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내가 거할 곳’을 준비해 두고 계시는 것을 확신하는 신자는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 인생을 사는 동안 좀 어렵고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해도 끄떡없습니다.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이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텐트가 무너졌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해외여행을 갔다가 자기가 숙박하던 호텔이 태풍에 의해 파손되었다고 해서 절망에 빠지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신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한 성을 예비해 두셨음’을 확실히 믿는 가운데, 아직 조금 더 남아 있는 ‘이 땅의 장막 생활’을 통해 크고 작은 인생의 환난을 당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반드시 칠전팔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천당에 가서 ‘예수님’을 만날 것을 믿는 성도는 자기 생애의 최고와 전부를 바쳐 충성하게 됩니다.

  6절 이하 10절에 “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라고 번역된 말은 ‘우리는 확신한다.’는 뜻과 ‘우리는 용기를 가진다.’는 뜻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천당을 확실히 믿고 있는 까닭에 매사에 자신만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독신자는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예수님과 잠시 동안만 이별하고 사는 순간인 것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조금만 계산을 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살 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사는 시간은 길어야 ‘칠팔십년’이지만 같이 동거하게 될 시간은 ‘영원’이니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지금까지는 한 번도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뵌 적이 없지만, 신자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바”“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신자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즉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천당에서 예수님과 동거하게 될 날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금세의 인생이 내 생명의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과 잠시 헤어져 있는 순간일 뿐이며,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 아니라 바로 그 주님을 만나게 되는 서곡이며 영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천당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가 이 세상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바로 그것이 이어지는 9절과 10절의 내용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당장 천당에 가고 싶어도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직 “몸으로 있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때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각 사람의 행한 공로를 따라 그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천당영생의 신앙을 지키고 산 신자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무슨 결격사유가 발견되어서 천당입성이 갑자기 취소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확실한 천당신앙을 가진 신자라면 장차 ‘주인’ 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될 자리에서 부끄러움 없는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오늘 하루의 삶을 똑바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결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현재의 생활을 더욱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동기부여가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당을 진짜로 믿는 신자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당을 그저 ‘낙원’으로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그 주인께서 맡기셨던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남긴 것’을 계수하게 될 날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구 심방을 할 때, 저와 교구 성도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대접하게 되는 성도들마다 얼마나 정성껏 준비를 하시는지 정말 송구스러울 지경입니다.
  집안청소는 두말할 것 없고 음식 준비 때문에 전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어떤 분은 몇 주일 전부터 벽지 도배까지 새로 해놓고 기다리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귀한 손님이나 반가운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로 태평스럽게 앉아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른 일들이 바빠도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쪼개고 돈을 마련해서 정성껏 준비를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될 기쁨에 설레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 대충하자.’ 하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있겠습니까?
  천당에 가서 그 그립던 주님과 드디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뵙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자가 ‘무엇이 바쁘고 무엇이 힘들어서 교회에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어떻게 그분 앞에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차피 천당 갈 사람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지.’라는 따위의 생각은 진심으로 천당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의 머릿속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주인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는 종은 그저 부지런히 장사하면서 그 주인을 기다릴 뿐입니다.
  물론 놀 시간은 없으며 한눈 팔 여유조차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주인 밑으로 ‘전업’할 생각이란 꿈에서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주인에게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고 싶은 마음만 간절한 까닭에 일심으로 그 받은 ‘달란트’를 갑절로 불리는 일에만 전력투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당을 기다리는 신자라고 해서 현실감각을 잊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천당을 진짜로 믿는 신자야말로 정말 현실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천당 입장에는 먼저 그 천성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순서가 선행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천당에 가게 될 것을 믿고 있는 신자는 반드시 오늘 하루까지도 어찌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신행일치의 삶을 필연적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천당에 들어가게 될 성도라면 이 점에 있어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정도의 수준으로는 전혀 상대도 될 수 없는, 진짜 고차원적이며 현실적인 삶이 바로 항상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사는 기독신자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천당을 무슨 호의호식하게 될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몸으로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보여드릴 즐거움 때문에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이 지상교회에서 목사를 모시면서 여러분이 준비한 음식과 깨끗이 청소한 집을 보여드릴 때의 즐거움과 어디 비교나 될 수 있겠습니까?
  경향의 성도들이 이웃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해 ‘생애 최고의 것’을 바치고 ‘희년맞이 비전헌금’으로써 ‘생애 전부의 것’까지 바친 그 삶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고 보여드릴 때의 감격이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직은 잠시 동안 더 남아 있는 우리의 생명은 이처럼 천당에서 우리 예수님을 반갑게, 그리고 떳떳하게 만나 뵙기 위하여 더 잘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인 줄로 깨닫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하더라도 끝까지 신실하게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집에는 아무나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낯선 사람은 물론이고 설혹 친척이나 친구라 하더라도 평생 같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오직 자기 가족만 살 수 있는 곳이 집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당은 결코 착한 사람이 죽으면 다 가게 되는 곳이 아니며, 아무 종교나 믿어도 결국에는 같이 도달하게 되는 장소도 절대로 아닙니다.
  천당은 오로지 ‘진짜 예수쟁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 ‘하늘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믿는 사람’ 외에는 단 한 명도 입주가 허용되지 않는 집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천당을 믿지 않는 교인은 결코 참된 기독신자가 아닙니다.
  그런 교인들은 천당을 믿는 신자와 ‘약간 다른 정도’가 아니라 실상 ‘정반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천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곳인 까닭에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통해 ‘천국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게 될 자’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들이 ‘겉으로는 신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자가 아닌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이유도 아예 ‘불신자’로 살았던 자들과는 달리 그래도 교회 출석도 했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에 ‘참된 신앙’이 없었고 그 삶에 ‘신행일치의 충성’이 없었던 까닭에 천당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너무나 원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확실히 믿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헌신과 희생과 충성으로써 예비한’ 신자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 호텔에는 분명히 예약을 해놓고 찾아왔는데도 차질이 생겨서 빈방이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기지만, 우리가 천성문에 서게 될 때에는 ‘당신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지옥으로 내려가십시오.’라는 말을 듣게 될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천당의 집은 바로 성령께서 친히 보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천당신앙이 분명한 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자살 따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천당을 소망하는 신자의 들뜬 기분을 깨뜨릴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성도의 충성을 말릴 길이 없습니다.
  고된 일과 중에서도 저녁에 집에 가서 아내와 자녀를 만날 생각에 다시 힘을 내는 가장처럼, 단체 기합을 받으면서도 몇 주일 지나면 제대하게 될 기쁨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말년 군인’처럼, 언젠가 이 ‘땅의 장막’을 벗어버리게 되는 날 ‘하늘나라의 새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고 기다리는 기독신자는 오늘 무슨 일을 당해도 그저 소망과 보람에 가득 넘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는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그저 ‘눈에 보이는’ 금세의 성공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불안과 그것들을 놓치게 되는 고통 때문에 하루도 얼굴 펴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그저 ‘이 땅의 장막’에서 어떻게 하든지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데에만 머물러 있으면, 머지않아 완전히 ‘벌거벗게 될’ 지극히 수치스러운 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도 일단 천당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세상의 환난과 핍박 중에도 넉넉히 승리하는 힘을 얻게 되고, 주님 만나게 될 그 순간을 목적으로 삼고 달려가야 남은 인생을 사는 맛도 제대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달파도, 이제 곧 ‘나그네 인생’을 끝내고 진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살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어찌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준비되어 있는 이 ‘하늘의 집’을 믿음으로써 바라보며 어떤 환난을 당해도 낙심치 말고 어떤 어려움 중에도 끝까지 충성함으로써, “우리 모두 수고 끝나 세상 장막 벗고서 모든 근심 걱정 사라진 후에 주를 뵙고 성도 함께 면류관을 쓰는” 저 영광의 ‘새 예루살렘’에 다 함께 입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