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5-09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창세기 48장 15-16절, 49장 28-33절, 50장 24-25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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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5-09
2018′경향의 강단(21)(2018년 5월 13일 / 어버이주일 대예배)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창세기 48장 15-16절, 49장 28-33절, 50장 24-25절/ 석기현 담임목사
5월 13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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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창세기 48장 15-16절, 49장 28-33절, 50장 24-25절/ 석기현 담임목사
시편 17편 14절에 보면, 불신자의 인생에 대해 정말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살면서 “자녀로 만족하는” 즐거움이나 누리다가 결국 죽을 때에는 오직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 다윗의 말입니다.
  불신자 부모들이 세상을 떠날 때 자기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남은 산업” 즉 자기가 벌은 돈 중에서 자기가 먹기 위하여, 그리고 자녀 양육하는 데에 사용하기 위해 쓰고 ‘남은 재산’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유산을 한 푼이라도 더 물려받겠다고 부모 사후에 친형제자매들이 법정 소송까지 하면서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싸우는 일이 그야말로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우리 기독신자 부모들은 진짜 소중하고 또한 평생토록 간직할 수 있는 영적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길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복을 자자손손 대대로 누리게 해 주는 아주 놀라운 유산인 것입니다.
  저 유명한 ‘축복의 선조’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과 그의 후손을 통해 계속 이어진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그 복스러운 신앙의 명문 가문이 대대로 소유했던 영적 유산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의 기독신자 가정에서도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계속 전해져야 할 복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 부모는 자녀와 ‘참된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는 복’을 공유해야 합니다.

  창세기 48장 15절과 16절에 기록하기를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셉 덕분에 애굽에 와서 여생을 잘 보내던 야곱이 이제 나이가 늙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자기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2절에 보면, 요셉과 요셉의 아들들, 즉 자기의 손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축복해 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다시 보면,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라고 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하반절에는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라고 했습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축복을 받으면서 얻었던 새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 손자들을 축복하려는 시점에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았던 것입니다.

  그 야곱이 손자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해 주는 장면이 바로 본문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범상치 않습니다.
  그는 우선 자기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그 요셉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축복했습니다.

  그 축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손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 주시고 세상에서 “번식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게’ 해 달라는 말은 비록 요셉의 두 아들이 애굽 여자와 결혼한 사이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정통 이스라엘 자손에게 약속된 언약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게 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번식되게’ 해 달라는 것은 그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었던 하나님을 똑같이 믿음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민족과 땅에 대한 복을 그대로 받아 누리면서 번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이라는 것은, 당사자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는 꽤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벌써 20살 전후의 나이로 성장해 있던 청년들이었는데, 그 때까지 아버지 요셉, 즉 애굽의 총리대신의 아들로서 아무 부족한 것 없이 자라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던 교육은 최고 수준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누리던 의식주를 비롯한 문화생활도 최상의 것으로만 제공되었을 것이며, 더구나 그들의 미래 역시 애굽 사회에서 탄탄대로의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무슨 새로운 복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청년들이었고, 그저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것만 계속 유지되어도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손자들에게 지금 야곱은 ‘너희들은 내가 믿던 하나님, 너희들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믿던 하나님을 똑같이 믿고, 그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 받게 될 복을 꼭 받아라.’고 모든 정성과 힘을 다 쏟아서 마지막으로 축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 축복은 보통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는 복’은 애굽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문명이나 교육이나 물질로도 그들에게 줄 수 없었던 복이며, 그들의 아버지가 일국의 총리대신의 권한이나 능력으로서도 줄 수 없었던 엄청나게 귀중한 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 부모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복을 자녀와 공유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려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하려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쏟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이 진정 부모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똑같이 경외하고 우리의 순교자 선조들이 지켰던 순결하고 뜨거운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는 이 복을 절대로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과연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 민족이 신앙의 선진국으로서 마지막 시대에 세계 선교의 선두주자가 되는 이 엄청난 ‘선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내 아들, 내 딸이 꼭 ‘가든지 보내든지’ 크게 쓰임 받는 ‘별’이 되게 해 달라고 과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자들과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이 바른 신앙을 그대로 내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갖 세대 차이,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신앙만큼은 똑같이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열조들이 섬겼던 하나님,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길러 주시고 지켜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을 똑같이 믿고 섬기는 이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내 자녀에게도 반드시 물려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 부모는 자녀가 ‘각자의 분량대로 주어지는 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49장 28절부터 33절에 “28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 49장은 야곱이 죽기 직전에 자기의 열두 아들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28절이 그 마지막 축복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축복하였더라”라고 ‘축복’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그 열두 아들들이 모두 다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유다나 요셉 같은 아들들에게 남긴 말은 그야말로 축복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지만, 다른 아들들의 경우를 보면 어떤 때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전체적으로 보면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언’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르우벤은 원래는 장자였지만 자기의 서모와 동침함으로써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는데, 야곱은 르우벤에게 바로 그 죄를 지적하는 말만 남기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경우를 보면, 이들이 누이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에 그에 대한 복수로 세겜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야곱은 지금 임종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와서도 그 일을 두고 이 두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열두 아들들에 대한 다양한 마지막 유언들이 남겨지는데, 제일 막내 베냐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7절에 보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베냐민 역시 요셉 다음으로 야곱이 사랑한 아들이었지만, 이 마지막 유언에 와서는 베냐민의 호전적인 성격을 언급할 뿐 다른 아무 축복이라 할 만한 말은 남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석자에 따라서는 이 49장에 기록된 야곱의 마지막 말을 ‘열두 아들들에 대한 축복’이라기보다는 ‘열두 아들들에 대한 예언’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내용을 볼 때에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예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28절, 그 야곱의 마지막 말을 총정리하는 결론에서는 분명히 ‘예언’이라 하지 않고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곱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남기는 말은, 그냥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축복 같이 보이지 않는 내용도 많이 있지만 보다 차원 높은 영적 의미에서 볼 때에는 역시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의 축복은 ‘무조건 잘 되어라.’ ‘무조건 부자 되고 건강하고 장수하고 아들 딸 많이 낳고 살아라.’는 식의 유치한 ‘기복(祈福)’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열두 아들들의 각자의 성격과 자질과 능력에 따라 적절한 영적 축복을 남겨 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레위 같은 아들들에게 그런 책망의 유언을 남긴 것은, 오직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남은 생애라도 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아주 귀중한 축복이었습니다.
  베냐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귀여워하던 막내아들이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는 결정적인 약점 즉 그의 호전적인 성격을 아버지의 눈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지적해 줌으로써, 베냐민 개인의 앞날 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의 미래에 대한 아주 요긴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에게 각각 남긴 말들은 다 이처럼 영적으로 깊고도 차원 높은 유언이었던 까닭에 본문 28절 하반절은 그 야곱의 축복을 두고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 ‘분량대로’라는 말이 바로 그들의 개인적인 달란트와 영적 그릇의 크기에 맞추어서 각각 적절한 축복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불신자들이 물 한 그릇 떠 놓고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듯이, 자기 자녀의 병이 낫게 해 주고 돈을 잘 벌게 해 주고 악귀가 떠나가게 해 달라는 식의 유치하고도 천편일률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역시 ‘자기 자녀의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적이지만, 그 외에 개인적으로는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이들과 서로 비교해 볼 때, 다 각각 개성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받은 달란트도 다릅니다.
  더욱이 무슨 복을 받기 전에 먼저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나 악한 행실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것은 누구보다도 그 부모가 양심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정말 야곱 같은 영지를 발휘하는 신앙의 부모라면 자기 아들딸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드릴 제목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자녀에게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경고로, 때로는 가르침으로, 때로는 인도하심으로, 때로는 도우심으로, 때로는 쌓을 곳이 부족할 정도로 넘치는 복으로 축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야곱처럼 자기 자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신자 부모는 자녀에게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복’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창세기 50장 24절 이하 26절에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창세기의 마지막 장 2절 이하에서는 야곱이 죽고 난 후에 요셉이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얼마나 성대하게 치렀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장례의 절차 중에서 야곱의 시신을 “향으로 처리하게” 했다는 것은 고대 애굽에서 유명했던 미라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미라를 만드는 데에 걸리는 기간은 그 죽은 사람의 신분 고하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는데 야곱의 경우에 40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애굽 총리대신의 아버지라는 신분이 애굽 사회에서도 그만큼 존중 받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처럼 시신을 향으로 처리하는 기간을 비롯하여 장장 70일 장으로 치러진 애도의 기간이 끝난 후에, 요셉은 자기 아버지 시신을 애굽 땅에 묻지 않고 앞서 창세기 49장 29절 이하에서 야곱이 마지막 유언으로 부탁한 대로 멀리 가나안까지 가서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곳은 바로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사서 자기 가족의 소유 매장지로 만들어 두었던 곳으로서 장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바로 그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온 가족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결국 애굽은 그들의 영주지가 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가나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야곱은 그처럼 자신의 장지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런 아버지 야곱의 뜻을 잘 이해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후에도 그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이 애굽 땅에 살고 있는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24절에서 요셉이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자기 가족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자기는 비록 죽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실 것과 그때까지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비전을 자기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이 비전을 늘 가슴에 새기도록 하기 위하여 좀 특이한 방법을 썼습니다.
  바로 25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했던 유언과는 좀 달랐습니다.
  야곱은 자기 시체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했지만, 요셉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바로 그때 자기 해골도 같이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장사를 지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요셉이 왜 자기 시신도 아버지 야곱처럼 즉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하지 않고 그렇게 부탁했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후손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대한 미래의 비전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의 시신도 지금 즉시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장사를 지내버리면 몇 세대 지나지 못해 그 모든 것이 다 잊히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유골을 계속 애굽에 남겨 놓으면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절로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요셉이 의도했던 바는 그대로 관철되어서 나중에 무려 4백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로 이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기 후손에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게 해 주고 그 비전을 이룰 때까지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게 하는, 참으로 놀라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바로 그런 위대한 신앙의 비전 덕분에 처음에는 겨우 70여 명에 불과했던 야곱의 가족이 끝내는 2백만 명이나 되는 큰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경향의 부모들 역시 우리 후손들에게 바로 이런 원대한 비전을 남겨 주면서 그들의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희년맞이 5대 실천목표’를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조국 전도와 세계 선교를 통해 ‘30만 예배자’를 모을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 원대한 비전을 경향의 2세대들에게도 일깨워 주는 것 역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때가 오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은 온갖 사랑을 다 쏟으며 보살펴 주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서 키우고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부모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저 약간의 유산밖에 남겨 두지 못하는 불신자 부모들과는 달리 우리 신앙의 부모들은 정말 엄청난 유산을 남겨 줄 수 있습니다.
  바로 내 자녀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나아가게 하면서 그들의 미래를 온통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리니’라는 요셉의 유언이 끝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통해 성취된 것처럼, 자녀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 성취될 원대한 비전’을 바라보며 살게 함으로써 부모 시대보다 갑절의 복을 누리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표현을 흔히 씁니다.
  아주 소중한 전통이나 명예 등이 대대로 전수되어 오는 집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몸을 ‘뼈대’가 중심에서 받치고 있듯이 그런 자랑스러운 유산이 자자손손 계속 이어지는 가문은 정말 스스로도 뿌듯하고 주위에서도 절로 우러러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그처럼 ‘뼈대 있는 가문’을 세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바른 신앙의 유업’을 부모가 아들딸, 손자손녀 대에 계속 물려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아쉽지만, 옛날 어느 목사님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소천을 앞두게 된 그 목사님께서는 임종 직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다 불러놓고 종이에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는 말씀을 기록하게 한 후에 자녀들로 하여금 각자의 도장을 반은 그 종이에, 그리고 반은 목사님 자신의 가슴에 찍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느 재벌이나 권력자도 남길 수 없는, 정말 엄청난 유산을 당신의 자녀에게 남겨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역대 부자들의 랭킹에서 지금까지도 ‘Top Ten’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밴더빌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록펠러와 카네기, 포드 등을 위시한 다른 부자들은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시켰지만, 유일하게 밴더빌트만은 대학교 하나를 세운 것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자기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밴더빌트의 자손들은 3대를 채 못 지나서 완전히 망했고. 심지어 그들 중에는 스스로 ‘밴더빌트 가문의 몰락기’라는 책을 쓴 사람까지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실로 부모와 자녀가 ‘똑같은 정통 신앙’을 공유하고, 부모가 자녀를 두고 ‘본인의 분량에 따른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부모가 자녀에게 ‘교회를 통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를 남겨 두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남은 산업’만 유산으로 남기는 세상 사람들의 가문에서는 결코 전해질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영적 유산입니다.
  경향의 부모들은 자신의 소중한 아들딸에게 이 위대한 유산을 반드시 남겨 주어야 하며, 경향의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를 통해 이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경향의 가정들이 이처럼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내 자녀와 후손을 돌보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라는 ‘신앙의 유업’을 꼭 이어감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에 천 대까지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자자손손 대대로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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