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5-06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장 40-52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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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5-06
2018′경향의 강단(20) (2018년 5월 6일 / 어린이주일 대예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장 40-52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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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장 40-52절/ 석기현 담임목사
‘도마복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기록한 복음서라는 것인데, 물론 정경이 아닌 위경, 즉 ‘성경 비슷하게 보이지만 성경이 아닌’ 가짜 성경 중에 하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예수님의 어록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오직 도마에게만 말씀해 주신 비밀의 계시가 있다는 등, ‘이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경’임이 재고의 여지없이 명백한 책입니다.

  그 ‘도마복음’에 보면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행적이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이 또래 친구와 함께 지붕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몰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추궁을 하자 예수님이 그 죽은 친구에게 “일어나서 말해 봐. 내가 너를 떨어지게 했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죽었던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닙니다. 주님이 저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고 저 혼자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도 목수였던 요셉이 나무를 너무 짧게 잘못 잘라 버렸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길게 늘여 주었다느니, 어린 예수님이 냇가에서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어 놀다가 손뼉을 치면서 ‘날아가라’고 했더니 그 진흙새들이 진짜 참새가 되어 날아갔다느니, 혹은 누군가가 길을 가다가 예수님과 부딪혔는데 예수님이 그에게 저주를 퍼붓자 그 사람이 즉사했다는 등, 정말 황당무계한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일화’들이 연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따위의 이야기들이 위경에 실리게 된 까닭은 사복음서 정경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탄생 이후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지만 성경은 그 기간보다는 나머지 마지막 3년의 공생애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만 집중적으로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대하여 쓸데없는 상상과 추측들이 난무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처럼 지어낸 이야기들까지 속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성장과정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그 초기 30년 동안의 과정에 대하여 성경은 단 하나의 사건만 기록해 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 유일한 기록 외에 성경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 길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는 사실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필요한 정보라면 성령께서 그것을 성경의 기록에 남겨 놓지 않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밝혀 주는 것 외의 예수님의 모든 성장과정은 그저 신비에 속한 일로 남겨 두고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 성경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하여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도 사람처럼 ‘육신적인 성장의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실 때부터 이미 다 포함된 과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슨 SF영화에서 어떤 초인간이 미래로부터 현재라는 시공계에 어느 한순간에 불쑥 등장하는 것처럼 처음 탄생하실 때부터 완전한 성인의 몸으로 오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지극히 자연스러운 ‘화육’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분만을 통해서 태어나셨고, 당연히 유아기와 유년기의 성장 과정 또한 거친 후에 성인이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성경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데, 바로 본문 40절에서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이 구절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정결예식의 날’에 성전을 다녀온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 생후 40일 째 되는 때에 있었던 일이므로, 이 40절에서 말하는 “아기”는 그야말로 ‘영아’ 시절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해 가신 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면서도 또한 완벽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자라며 강하여지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육체적 성장을 가리킵니다.
  “지혜가 충만하며”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지적 성장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말씀은 이런 모든 성장이 영적으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진행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 중에도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은 조금도 약해지거나 변화되지 않고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비록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완전한 하나님’으로서의 신성 역시 완벽하게 보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 예수님의 인성은 이처럼 정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을 그대로 거치셨습니다.
  단지 원죄의 오염을 받아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항상 발생하게 되는 나쁜 유전이나 후천적 결함은 전혀 없이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성장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결합은 사람이 더 이상 과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길이 없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고의 기적이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인 줄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52절은 예수님께서 그처럼 성장 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신 결과를 증거해 주기를 “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는 곧바로 예수님의 공생애로 이어지므로 아까 40절에서의 ‘아기’가 ‘30세’까지 “지혜와 키가 자라는” 즉 지적 및 육체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이 52절 한 절에서 다 압축 요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런 성장의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즉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성인이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 구절 사이, 즉 영아의 예수님과 이제 곧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 사이에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이 바로 본문 43절부터 51절까지에 기록된 사건으로서, 예수님께서 12살 되시던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셨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진정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아들딸로 키우기 위해 꼭 명심해야 할 교육 원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의 자녀교육 방법은 오직 ‘성경 말씀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41절부터 47절에 기록하기를 “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남자 아이들은 13세에 ‘영적 성인’이 되는 공식적인 의식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통하여 소위 ‘바 미쯔바’ 즉 ‘율법의 아들’로서 회당의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1, 2년 전부터 이를 위하여 본격적인 준비공부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시던 해의 유월절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 아마 그 일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열두 살이면 이미 성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도 부모와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행동하셨을 것인데, 그러다가 돌아오는 날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으레 “동행”하는 아는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면서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다시 하룻길을 돌아가서 “사흘 후에” 비로소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 어린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내내 성전에서 “선생들” 즉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 사이에 같이 앉아 계셨습니다.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했는데, 문답을 통한 토론은 당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교육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12세의 예수님과 공생애를 시작하셨던 30세의 예수님 사이의 18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 기간에 인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쌓았다는 따위의 기록들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근거 없는 전설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는 바로 본문에 나오는 토론의 자리에서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지성은 “열두 살 되었던” 시점에 이미 완전 성숙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지혜를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얻게 되셨겠습니까?
  추측이나 가설을 내세울 필요 없이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어릴 때부터 ‘율법 교육’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인 자녀들은 6세 때부터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에 기록된 ‘쉐마’를 비롯하여 구약의 말씀을 철저하게 교육받았으며, 10세 때에는 마태복음 15장 2절에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미쉬나(Mishnah)’를 통해 율법에 대한 자세한 해석까지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율법의 교육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되었던” 때부터 벌써 유대 사회에서 최고 지성인에 해당되었던 랍비들과 나란히 앉아서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충만한 지혜’를 보유하셨고, 어린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모든 어른들에게 ‘놀라운 대답’을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조차 구약의 율법을 배우는 가운데 ‘그 지혜가 자라며 충만해’졌다면, 오늘날 기독신자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곧 ‘성경을 가르치는 것’ 이 한 가지일 뿐입니다.
  바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에서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달리 사족의 해석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이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유아세례서약 제3조에 “그대는... 하나님의 지시하신 모든 기관에서 진력하여 이 아이를 주의 양육과 교훈에서 장성하게 하기를 서약하십니까?
 ”
라고 부모에게 질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기관’이란 바로 교회와 주일학교를 가리키며 ‘주의 양육과 교훈’은 곧 ‘성경 말씀’입니다.
  실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자녀를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잘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경 말씀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는 교육’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는”(딤후 4:3) 이 말세에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딤후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 3:15) 되도록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게” 하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의 자녀교육 목표는 곧 ‘하나님을 아는 신전인격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48절 이하 52절에 “48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흘 동안 가슴을 졸이다가 겨우 예수님을 찾게 된 그 부모들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자각하고 계셨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며, 그 공생애를 통해서도 자주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의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이나,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한 하나님 되신 관계를 가지고 계심을 명백히 그리고 누누이 천명하셨는데, 본문의 이 사건이 바로 그 첫 번째 선포 장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인식하셨는가 하는 것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되어 있던 태아 때부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렇게 마리아의 뱃속에 있구나.’라는 식으로 의식하고 계셨거나, 출생하신 순간부터 ‘내가 화육강세한 성자인데 당신네들은 그것을 모르지.’라고, 말은 못해도 속으로 할 말 다 하면서 부모를 바라보는 무슨 ‘겉늙은 영아’와 같은 아기는 아니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석가모니가 그랬다는 것처럼 태어나자마자 발딱 일어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는 식의 ‘황당한 아기’, ‘아이의 몸’에 ‘어른의 정신’이 이미 들어 있었다는 식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아기’가 결코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화육강세 전이나 후나 내내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태아, 완전한 영아, 완전한 유아 시절도 보내신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의 자세한 사실은 성경에서 밝혀 주지 않고 있으니만큼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화육강세의 신비’에 속한 일로만 믿고 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성경이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유일하게, 정말 딱 한 가지만 밝혀 주고 있는 ‘예수님의 자의식’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시점에서 이미 ‘성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즉 이것이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 그리고 우리가 유일하게 꼭 알아야만 할 진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육신의 성장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들은 다들 자신의 아들딸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사랑스러운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영아, 유아, 유년기를 거쳐 예수님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로 성장하기 위하여 꼭 통과해야 할 필수과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이 어린 심령들이 깨닫고 영접하고 부르게 되는 것,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자녀들의 전 성장 과정에 걸쳐서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이 됩니다.
  원죄로 물들어 타락해 있던 그 인격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녀들의 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되며, 반면에 아무리 세상 지식은 늘고 육체는 자라나도 이 결정적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평생을 ‘영적 미숙아’로 남게 될 뿐인 것입니다.

  제게 ‘석영은’이라는 무녀독남이 있는데, 이 영은이가 한 두세 살 정도, 이제 막 몇 마디의 서툰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영은이와 제 아내가 함께 미국을 떠나 우리나라로 와서 몇 달을 지내게 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미국에 와 계셨던 할머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시카고 국제공항의 게이트에서 이제 서로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였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안으로 들어가던 영은이가 갑자기 뒤돌아서면서 저를 향해 약간 어설픈 발음이지만 제법 애절한 목소리로 “아빠야, 가치(같이) 가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린 것이 그래도 자기 아빠라고 헤어지기가 섭섭했는지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저는 그만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눈물을 감추면서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냥 잘 가라고 손만 흔들었습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런 장면을 곁에서 보고 있던 어떤 낯선 할머니도 ‘저 어린 것이 아빠하고 헤어지는 것 때문에 슬퍼할 줄 안다.’면서 제 자식도 아닌데 비행기 안에서까지 눈물을 글썽거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영은이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언제 그런 눈물의 이별을 했느냐는 듯이 그저 싱글벙글하면서 아주 즐겁게 우리나라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참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야 물론 영은이를 그 출생 순간부터 아버지로서 사랑했지만, 제 아들 영은이가 저를 아버지로 인식하고 또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 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렇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보실 때에 가장 기뻐하실 순간은 이 아이들의 그 작은 입에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고 이 아이들의 그 순전한 인격을 통하여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는 기도가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자기의 자녀들을 두고 부모로서 가장 감격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순간은 바로 이 어린 아들딸들의 인격이 사신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그처럼 하나님을 아는 영적 성인으로 성장시킨 순간 저와 여러분은 부모로서의 가장 크고도 중요한 의무를 아주 잘, 정말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와 경향교회 주일학교가 바로 이 결정적인 교육을 시키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기관’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하는 교육이 아니라, 여러분의 어린 아들딸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알고 믿고 찬송하고 기도드릴 줄 알게 해 줌으로써 그야말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말 사랑스러운 어린이’가 되도록 최고의 영적 교육을 시키고 있는 명문학교인 것입니다.
  역시 유아세례서약 제3조에 나오는 대로 먼저 가정에서부터 부모로서 “친히 경건한 본분을 이 아이에게 보이기를 진력하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거룩한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가운데, 우리 자녀들의 진짜 ‘아버지의 집’인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는 신전인격자로 잘 키우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기독교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교훈으로 믿고 복종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자유주의 자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더 높은 문화적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은 그 모두를 포괄적으로 합해서 정의를 내립니다.
  바로 “성경을 가르쳐 (1)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 (2)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화협동적 인격자 (3)자기의 존재 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자각하며 자기의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 인격자를 양성함”을 ‘기독교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성경을 가르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를 양성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모범사례가 아니겠습니까?
  즉 신자의 자녀 교육 방법은 ‘성경 말씀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는 것’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신전인격자로 키우는 데’에 있습니다.
  실로 잠언 1장 3절의 말씀대로 ‘성경 교육’을 통해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는 것만이 이어지는 잠언 1장 7절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그 심령에 간직한 ‘신전인격자’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오로지 세상 학문만 과도하게 배우는 가운데 결국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딤후 3:13) ‘장망성의 무리’로 전락해 버리는 가운데, 자신의 자녀를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아는 언약의 자녀’로 꼭 키워내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