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4-29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에베소서 3장 1-2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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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4-29
2018′경향의 강단(19) (2018년 4월 29일 / 주일 대예배)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3장 1-21절 / 석기현 담임목사
4월 29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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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3장 1-21절 / 석기현 담임목사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간디가 그런 말을 할 때 그가 믿는다는 하나님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 만든 우상 신이나 혹은 범신론적인 의미에서의 신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이 말은 일부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교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비판한 명언인 양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교회’를 나누어 놓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만 교회는 순전히 사람의 산물이며, 교회의 제도는 목사들이 교권을 세우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한 개인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섬기는 데 있어서 오히려 방해되는 요소들만 가득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뒤틀린 선입관이요 너무나 삐딱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과 동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역사인 구속사를 논할 때 교회는 그야말로 다른 것으로써 대체할 길이 없는 유일무이하고도 필요불가결한 존재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곳곳에서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해 주는데,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기 위해 꼭 깨달아야 할 바른 ‘교회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교회로 말미암아’라는 말과 ‘교회 안에서’라는 말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과 그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하시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지상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꼭 지키고 발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의 주된 기능은 ‘구도(求道)’가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절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1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발신되어서 우리 각 개인 신자에게 수신되기까지의 전달 과정에 대하여 아주 요긴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에베소서를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즉 로마에서 연금된 상태에서 썼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도직’을 가리킵니다.
  그 사도직은 바울이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록”해서 보내었던 ‘바울 서신’들이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뒷받침해 줍니다.

  바로 5절에서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출발된 말씀 계시가 사람 쪽으로 전달되는 과정에 있어서 제일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계시는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오직 성령의 감화감동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구약과 역시 똑같은 성령의 감화감동 받은 사도들을 통해 기록된 신약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해 주신 유일무이한 방법임을 반론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이어지는 대로 오직 이 신구약에 기록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함께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함께 (영생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사도의 직분을 받아 “이 복음을 위하여”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바로 그 복음 속에 있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에베소서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문맥에 이어서 약간 특이한 말씀이 따라옵니다.
  10절부터 13절의 말씀에 “10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사도 직분’과 그에 따른 ‘복음 선포’ 사명을 말하고 있던 바울이 여기서는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이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원로목사님께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교회운동의 핵심이 바로 ‘케리그마 운동’ 즉 ‘설교를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은 그냥 은혜 받았다는 사람이 아무나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이 거룩한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공적으로 권위 있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을 이 ‘교회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엄중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본문은 아주 의외의 말씀으로 덧붙여 강조하고 있는데, 10절을 다시 보시면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란 ‘천사와 영물’들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이런 표현은 성경에서 주로 천사들을 가리킬 때 자주 쓰이고 있으며, 선한 천사뿐 아니라 악한 천사까지 포함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보면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택자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구원 “계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천사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전해 주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 주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교회의 강단에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을 선포할 때 천사들조차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지혜와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로 말미암아’ 선포되는 ‘복음’은 그 얼마나 중요하고도 권위 있는 것이겠습니까? ‘계시론’이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당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알 수 있게 해 주는가?’를 다루는, 즉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에 관한 신학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최고 정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이며, 성경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구약과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기록한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는 ‘성문화된 계시’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며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계시해 주시는 진리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된 기능은 바로 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즉 ‘예수 구원의 무한한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 즉 ‘구속사의 오묘한 경륜’을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로 ‘은과 금은 없어도’ 오직 ‘앉은뱅이를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오직 ‘복음’만을 최고의 자산으로 보유하면서 ‘전도와 선교’를 통해 그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거룩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간처럼 무슨 ‘도를 닦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강단을 통해 ‘복음’이 선포될 때 ‘그 진리’를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신앙고백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성을 수련하는’ 명상의 장소가 아닙니다.
  오직 설교 말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길’로 믿고 따르면서 ‘그 생명’ 안에 약속된 영생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구원의 방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은 천사들조차 듣고 싶어 하는 실로 ‘기쁜 소식’임을 깨닫고, 바로 이 말씀을 통해 먼저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나누는 ‘상속자’가 되고 또한 이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신비한 구속사의 진리’를 땅끝까지 함께 전파하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위한 서비스 제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4절 이하 19절에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른 복음을 에베소교회가 보유하게 될 때 그 결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적 은혜와 내적 성장입니다.
  그것은 우선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과 전지전능하심’을 알게 된 성도의 “속사람”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전에는 ‘연약하고 타락한 본성’으로만 가득 차 있던 ‘속사람’이 이제는 ‘절대주권자의 영광의 풍성함’에 힘입어서 모든 마귀의 시험과 방해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신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중생의 체험’을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는” 즉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의 내재’를 통해 ‘그리스도와 매사에 동행하는’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참된 신자들이 함께 모일 때에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성도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그처럼 “모든 성도와 함께” ‘교회중심으로 성화의 진보’를 계속하는 가운데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됩니다.
  즉 ‘사람의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을 정도로 높고도 깊은 예수님의 사랑’을 날이 갈수록 더 뜨겁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전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각 성도에게도 “충만하게” 되는 ‘성화의 완성’ 곧 ‘영화(榮化)’의 자리까지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도가 교회를 중심으로 ‘중생’과 ‘성화’의 은혜를 누리는 가운데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두고 20절과 21절에 기록하기를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선 성삼위 하나님이 다 언급됩니다.
  20절의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란 성도의 ‘기도’와 ‘계획’을 축복해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21절은 바로 그 성부 하나님께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무궁토록 돌려질 것을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화육강세하셔서 십자가 대속을 통해 죄인 구원의 사역을 완성해 놓으신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자세히 보면 바로 그런 ‘그리스도 예수’와 ‘교회’가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의 구조로 보나 의미로 보나, 이것은 너무나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말은 곧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교회를 높여주고 있는 말씀입니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와 아예 나란히 놓았으니, 이 얼마나 교회를 격상시켜 주고 있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참된 신자는 교회를 이처럼 성경이 선포하며 보증해 주고 있는 바로 그 위치에 두고 귀중히 여기며 높이 볼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자께서 성부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똑같이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데에만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다른 ‘대학생 기독신자’와 열띤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인이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신자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대학생은, 물론 경향교회 대학부는 아니었는데, ‘교회가 교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은 곧 ‘교회는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 영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그처럼 정반대의 ‘교회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신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절대주권자’로 믿는 개혁주의 기독신자와 ‘실존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저 ‘모든 신은 궁극적으로 다 같다.’라는 범신론에 빠진 종교인은 교회에 대한 자세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알고 있는 신자와, 교회출석을 그저 ‘인생의 액세서리’ 중의 하나로 여기는 교인은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극단적인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현대 교회 안에 그처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처럼 ‘다고 다고 하는 비만증 거머리 교인’들만 모인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어림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만 더하게 될 뿐입니다.
  오로지 ‘중생’의 은혜에 감격하고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는 참된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만이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화평과 질서를 나타내면서’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가운데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신자들만이 ‘철두철미하게 교회중심으로 뿌리가 깊이 박히고 터가 더욱 굳어지는’ 가운데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존재 목적을 제대로 찾고 그것만을 위하여 쓰임 받을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의 위치 곧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제사장’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사람을 섬기려는 교회는 사람과 같은 수준, 아니 사람보다 더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면서, 각자 ‘그리스도의 지체’로 봉사 충성하는 가운데 이 교회 전체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예수님의 몸’으로 더욱 굳건히 세워감으로써 진정 온 세상과 만민 앞에서 함께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며 그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 전에 우리나라의 기독교 서점에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이 몇 주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저는 우연히 그 책을 접하는 순간 ‘속이 뒤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책을 사지는 않고 그저 첫 페이지에 나오는 소제목들만 대충 훑어보았는데, 짐작했던 대로 교회에 대한 온갖 비판들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 교회라도 부분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라는 단체가 본질적으로 참된 신앙에 방해물이 된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목사가 교권을 행사하려고’ 세운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즉시 ‘내가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교회’라고도 아니고 ‘내 교회’라고 아주 강력한 1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시면서 ‘교회 설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 것’이라고, ‘내 몸’이라고, ‘내 신부’라고 세우신 것이 교회인데, 어떻게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따위의 망언을 그것도 명색이 ‘장로’라는 사람이 감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정말 교회를 아끼는 마음으로 ‘건전한 비평’을 한 책이라면 제목도 당연히 ‘교회가 살아야 예수가 산다.’라고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된 신자는 오늘날 현대 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는 그와 같은 잘못된 교회관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존재를 치장하기 위한 무슨 ‘장식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여호와의 성호를 두신 임재의 장소’로서 교회를 성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사역을 보조하기 위한 무슨 ‘수종자’처럼 쓰시려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교회를 세계사의 중심에 굳게 서서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를 완성해 나가는 ‘주역’으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이처럼 바른 교회관을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또한 그대로 살고 있는 아주 특별한 기독신자들입니다.
  이 경향교회는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무이한 규범인 줄로 믿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말씀’만 정확하고도 강력하게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사람의 소리나 주장이 비비고 들어올 틈이 아예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경향교회는 바로 그 말씀을 따라 성화되고 그 말씀대로 충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대접을 받기만 하려는 교인이나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는 교인들은 그야말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경향의 성도들이 우리 경향교회를 그 얼마나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는지는 이번 교회설립 45주년을 맞이하여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작정하는 중에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지난 주중까지만 해도 약 1억 1천 3백만 원의 월정헌금이 작정됨으로써 목표의 93.5퍼센트를 이미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헌당헌금과 보리떡헌금 등 수 차례 ‘생애 최고의 헌금’과 ‘생애 전부의 헌금’까지 바친 성도들이지만, 이번에도 그야말로 ‘열두 바구니’에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모으는 마음으로, 문자 그대로 온 힘을 다 짜내어서 ‘십이조’와 ‘십삼조’의 헌금까지 작정한 것입니다.
  실로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한 헌금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에 지나도록 넘치게 바친 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뜨거운 감사와 큰 영광을 돌렸던 것이 바로 지금의 저의 심정입니다.

  정말이지 우리 경향인들이야말로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찬 208장)라는 찬송을 그 언제나, 그 어떤 다른 교회의 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감격스럽게 부를 수 있는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오직 ‘교회로 말미암아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며’ 오직 ‘교회 안에서 모든 영광을 거두고’ 계시는 것을 확신하면서,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해 바로 이런 특권과 사명을 함께 기쁘게 나누고 더욱 충성되이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