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4-15 “건축하여 성별하였느니라” 느헤미야 3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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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4-15
2018′경향의 강단(17) (2018년 4월 15일 / 설립45주년 주일대예배)
“건축하여 성별하였느니라” 느헤미야 3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교회설립 45주년 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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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하여 성별하였느니라"

느헤미야 3장 1-32절 / 석기현 담임목사
피라미드를 직접 방문해 보면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그 시대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지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개의 무게만 해도 평균 2.5톤이나 되는 돌들을 약 230만 개나 쌓아 올려서 높이 150미터에 가까운 고층 구조물을 짓는 것은 온갖 기계와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현대에도 결코 만만치 않은 난공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장비는 고사하고 철기조차 없던 청동기 시대에 그런 일을 해 내었으니 정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불릴 만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피라미드가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사실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비결은 곧 ‘팀워크’입니다.
  ‘인력’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삽으로 흙 한 움큼을 파내는 것이나 망치와 정으로 돌 표면을 조금 깎아낼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면 그런 대공사도 거뜬히 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을 중심으로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대 역사를 이루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느헤미야 6장 15절에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재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무너진 성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때에는 그저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일이었지만, 일단 온 백성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서 달려드니까 두 달도 채 못 되어 끝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 역시 이 ‘팀워크’를 통해 이루어낸 쾌거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제 ‘Y-5 희년’이 되는 교회설립 4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올해부터 ‘교회설립기념주일’마다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작정하여 ‘희년맞이 5대 목표’를 꼭 완수하고자 하는 우리 경향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영적 팀워크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실로 영광스러운 ‘경향교회 5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명심하고 발휘해야 할 팀워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개인의 형편과 처지는 다를지라도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선한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그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에는 우선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다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1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양문”이라는 것은, 그 성문 앞에서 양들이 많이 매매되었고 또 성전의 제물로 바칠 양들을 먼저 이 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서 씻은 후에 사용했기 때문에 붙게 된 이름이었습니다.
  그 ‘양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에 해당되는 성벽은 북쪽 성벽의 요충지인데, 이 부분을 “대제사장”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맡아서 건축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렇지만, 이 3장에서 각 팀별로 할당된 구역이 등장하고 그것을 ‘누가 중수하였다’라고 한 것은, 그 사람 혼자서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구역을 맡은 사람들 중에서 팀장의 이름만 대표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여튼 이 공사 현장에 동원된 인력 중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거룩한 직분자이니 성벽공사 같은 막노동에 직접 나선다는 것은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찌하든지 예루살렘 성벽을 하루라도 빨리 재건해야 할 상황에서 ‘나는 화이트칼라입네.’ 하면서 팔짱을 끼고 뒷전으로 물러나 구경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개척교회나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지을 때 목사부터 앞장서서 교인들과 함께 블록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은 자세를 이 제사장들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제사장을 필두로 하여 8절에 보면 “금장색” 즉 금세공 기술자와 “향품 장사” 즉 화장품을 파는 세일즈맨도 이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흙을 파고 돌덩어리를 져다 나르는 일과는 아무 관계없는 본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함께 땀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에는 “9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이라는 말은 “후르”가 아니라 “후르의 아들 르바야”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서 두 사람이 각각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로 치자면 서울 시장에 해당되는 ‘르바야’라는 사람도 그 성벽재건 공사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말입니다.

  17절에 보면 “레위 사람” 즉 성전 업무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그 일에 동참했으며, 26절에는 “느디님 사람”도 그 공사에 협력했다고 했는데 이 ‘느디님 사람’이란 성전의 잡일을 맡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의 사무직원과 관리직원 모두가 힘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29절에 나오는 “동문지기” 즉 성문의 파수꾼들과 32절에 나오는 “상인들” 즉 비즈니스맨들 또한 공사에 참여했다고 했으니, 공무원이든지 개인 사업가든지 할 것 없이 이 일에 같이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로 각양각색의 본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이 중차대하기 짝이 없는 일을 위해서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기꺼이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 공사에는 비단 신분이나 직업뿐 아니라 ‘성별’까지 초월한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12절에 보면 “12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마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차려 준다든지 하는 등 공사의 뒷바라지 일들을 했겠지만, 여기 언급된 ‘살룸의 딸들’은 남자 못지않게 체력이 좋았는지 혹은 특별한 기술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공사 그 자체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남녀 구별 없이 모두가 각자의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실로 교회야말로 남녀의 능력 차별을 없애는 일에도 항상 선도적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여전도사, 여집사, 권사, 권찰, 구역장 등을 통해 여자 고유의 직분을 세웠으며, 여전도회를 통해 오직 여자만 할 수 있고 또한 가장 잘 할 수 있는 봉사로써 교회에 기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재건에는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는 전국적인 협동까지 나타났습니다.
  비단 예루살렘 거민들만 이 공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2절과 5절과 7절에 보면 “여리고 사람들”, “드고아 사람들”, “기브온 사람들” 그리고 “미스바 사람들” 즉 문자 그대로 전국방방곡곡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찾아와서 이 공사를 위해 돕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날도 비록 자기 교회 일은 아닐지라도 지방의 개척교회를 후원하는 것이나 총회적인 행사를 위해 교단 산하의 전국 교회들이 다 함께 힘을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여전히 ‘지역감정’이라는 깊은 골로 나누어져 있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기독신자만이라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마음과 힘을 하나같이 모음으로써 이 고질적인 망국병을 고치는 일에 선도적인 역할을 꼭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에 이처럼 신분, 직업, 성별, 출신지역까지 다 초월하는 거국적, 전 민족적인 협력이 이루어졌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은 유다 백성 각자의 생존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시기하고 방해하려는 주변 이방민족들의 위협과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에 먼저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되어야만 일단 ‘국가 안보’가 확보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은 당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대표적인 문명을 잇는 무역로의 한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의 이점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다시 한 번 ‘경제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고, 그것은 곧 모든 유다 백성들의 복리와 직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벽재건은 ‘국가의 공적인 사업’이면서도 또한 각 백성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경향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희년맞이 5대 목표’를 실천하는 일은 물론 ‘교회적인 사업’이지만 그와 동시에 경향교회 성도 각자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라는 시편 122편 6절과 7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교회’가 먼저 ‘평안하고 형통해야’ 그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성도’에게도 절로 그 ‘평안과 형통’이 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작정하면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사실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퇴자금으로 적금을 붓고 있는 것만 잠시 보류해도 ‘열두바구니 십이조헌금’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경향교회가 문을 닫게 된다면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서 ‘영적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겠습니까?
  여러분이 자녀결혼을 위해 모으고 있는 것을 5년 동안만 중단해도 ‘열두바구니 월정헌금’은 충분히 드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경향교회의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디서 진정 ‘형통’한 새 가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처럼 ‘경향의 희년맞이’는 ‘교회의 큰 과업’인 동시에 여러분 각자의 ‘가정사’이며 ‘개인사’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무엇보다도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희년맞이 비전헌금’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경향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고 있는지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얼마의 수입을 올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성별이나 출신지역 따위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교인’이 다 이 ‘경향교회의 중수’를 위한 대 사업에 자신의 이름을 함께 남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오늘 작정하는 ‘희년맞이 비전헌금’에 모두가 빠짐없이 동참하는 팀워크를 발휘함으로써 실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경향 희년’을 향하여 일사불란하게 일로매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개인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각 성도가 자기에게 맡겨진 몫을 반드시 완수해야 합니다.

  모든 백성이 다 성벽재건 공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개인에 따라 ‘능력’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느헤미야는 이 점에 있어서도 아주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우선 27절에 기록하기를 “27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5절 상반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5a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5절에서 이미 ‘드고아 사람들’은 성벽의 어느 한 부분을 재건했는데, 27절에서 또 “한 부분”을 더 “중수”한 것입니다.
  아마 ‘드고아 사람’들은 남달리 유능한 일꾼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이 할당 받은 구역을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끝내버리자 또 다른 구역을 추가로 특별배당시켰던 것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신 원칙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의 현장에서 ‘드고아 사람들’이 그처럼 ‘열 고을의 권세’를 더 받는 특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또 13절에 보면 “13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구절들에 보면 그냥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 그 맡은 구역의 ‘거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맡은 부분에 대해서만 “천 규빗”이라고 그 거리의 수치를 구체적으로 기록에 남기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에게 할당된 공사 구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반면에 14절에 보면 “14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분문”(糞門)’이란 ‘쓰레기 처리장’으로 쓰인 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문은 아무래도 예루살렘 성벽의 다른 성문들보다는 가장 덜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팀장들에게는 ‘성벽의 한 부분’씩 공사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 “말기야”라는 사람에게는 그처럼 작은 문 하나만 맡겼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처럼 개인의 능력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0절, 23절, 28절, 29절, 30절에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라고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을 각각 일정한 지역으로 나누어서 책임량을 맡길 때, 가능한 한 그 사람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자신의 일터가 할당될 수 있도록 배려했음을 가리킵니다.
  직장까지 오고가는 데에만 매일 몇 시간씩 소모되는 것이 그 얼마나 비효율적이며 힘의 낭비가 큰지는 여러분이 이 복잡한 서울시에서 매일 출퇴근을 할 때 절실히 공감되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도 성벽재건 공사의 각 팀장들에게 그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구역을 분담시켜 줌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재건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책임이 분담되었으며, 그처럼 ‘능력의 차이에 따라서 맡겨진 자신의 몫’을 각자가 다 완수해 냄으로써 전체 공사는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온 유다 백성들이 다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으는 사업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네만 쏙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5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그 팀워크에 ‘2퍼센트 부족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드고아 사람’들은 성벽재건 공사에 ‘추가 할당량’을 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고 또 열심히 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드고아 사람들 중에 일부 “귀족들”은 그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미 다른 드고아 사람들이 남들보다 두 배로 일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는지, 혹은 명색이 귀족이라는 사람이 막노동을 할 수는 없다는 ‘체면’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같은 유다 민족이면서도 그 중차대한 민족적 사업을 두고 자기네만 팔짱을 끼고 방관만 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다 함께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고 있던 다른 유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실로 맥이 쏙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드고아의 귀족들’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재건 공사가 차질을 빚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본문 2절부터 32절까지 계속 반복되는 말이 “그 다음은 (누구누구가) 건축하였고”, “그 다음은 (누구누구가) 중수하였고”라는 기록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다 백성들은 아무도 낙오하지 않고 그 공사를 완수해 내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32절은 “32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는 아주 멋진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32절의 “양문”은 아까 제일 처음 1절에서 제사장들이 맡았던 “양문”과 동일합니다.
  제사장들에게 할당된 ‘양문’이 기준이 되어 각각 할당 받은 ‘그 다음’ 구역의 공사를 각자가 ‘건축’하고 ‘중수’하고 나니, 그 성벽들과 성문들이 한 바퀴를 삥 돌아서 이 ‘금장색과 상인들’의 구역까지 왔을 때에는 다시 ‘양문’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즉 이제는 예루살렘 성벽에 ‘무너진 곳’이나 ‘구멍 난 곳’이나 ‘불에 탄 곳’이 단 한 군데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부 비협조적인 무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나머지 모든 백성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기가 맡은 몫만 성실하게 다 감당해 내었을 때 결국 예루살렘 성벽은 전체가 완벽하게 재건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어떤 큰 일을 할 때에 혼자 쏙 빠지는 ‘얄미운(?) 교인’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주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몇 가지 봉사를 겹쳐서 하는데 자기는 점잖게 주일오전예배만 보고 돌아가는 교인들, 다른 교인들은 ‘생애 최고와 전부의 것’을 바치면서 죽도록 헌신하는데 꽤나 돈이 있으면서도 헌금에는 쏙 빠지는 교인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는 어디에나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일하기 싫어하고 꾀만 부리는 교인들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고 있는 다른 교인들의 사기까지 절로 저하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교회 내의 그런 ‘일부 드고아 귀족’들로 인해 낙심해서는 결코 안 되며, 또한 ‘당신같이 비협조적인 교인 때문에 교회 일이 안 된다.’라고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됩니다.
  이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할 때에도 그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교인들을 기준으로 교회의 속도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게으른 사람은 그냥 그 게으른 자리에 남겨 놓고, 끝까지 혼자 놀려고 하는 사람은 그냥 자기 혼자 놀고 있으라고 남겨 놓고, 나머지 성도들만이라도 더욱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안 하는 사람’들은 그냥 안 하게 내버려 두더라도 오직 ‘하는 사람’들만 열심히 하면 결국 하나님의 일은 넉넉히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천 규빗’을 맡을 수 있고 누가 ‘분문’ 하나만 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의 차이’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각각 그 힘대로 맡겨진 자기 몫’을 꼭 완수해 내는 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사이든지, 장로이든지, 집사이든지, 권사이든지, 서리집사인든지 혹은 아무 직분이 없는 성도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할당된 ‘그 다음의 성벽 구역’이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각자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자신의 몫’을 꼭 성실히 완수하는 팀워크를 발휘함으로써 실로 ‘양문에서 양문까지’ 완벽하게 연결된 ‘경향 희년’을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듯이 앞으로의 5년은 우리 경향교회가 실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희년을 맞이하기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고개입니다.
  ‘마지막 고개’라고 표현한 것은 이 ‘희년맞이 비전헌금’은 원로목사님과 경향교회 1세대의 장로님들과 성도들이 이미 넘어 온 ‘태산’들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90퍼센트를 성취해 놓은 분들은 그 선배들인데 이제 그저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스퍼트를 올리기만 하면 그 영광의 결승 테이프는 저와 여러분이 끊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황공스러운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마지막 한 바퀴’를 꼭 완주해 내기 위해 우리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다시 한 번 멋진 ‘영적 팀워크’를 끝까지 발휘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부분이 얼마나 ‘긴 성벽’인지, 얼마나 ‘중요한 문’인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자기가 ‘중수’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이 경향교회 전체의 성벽에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른 곳이 다 잘 지어져 있어도 단 한 군데만 허물어져 있거나 구멍이 뚫려 있다면 그 성은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마는 것은 교회에서도 꼭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담임목사가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물론 교회에 큰 구멍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심방장이나 구역장이 자기 사명을 제대로 못해도 구멍이 생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헌금을 작정해 놓은 장로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해도 물론 교회 재정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성도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열두바구니 헌금’에 불참해도 역시 교회의 한쪽 ‘성벽’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 보기도 전에 안 될 것이라고 겁부터 먹는 것은 옹졸하기 짝이 없는 패배주의자일 뿐입니다.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이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군사 피 흘리며 나가서 싸울 때 나 혼자 편히 앉아서 바라만 보는’ 비겁한 배신자나 다름없습니다.
  ‘산을 옮기는’ 큰 일은 별다른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한 사람부터 동참하는 ‘일치단결’에서부터 시작되며, 인간적인 계산만 하고 앉아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처럼만 보이는 ‘대공사’도 바로 ‘나’ 한 사람에게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기만 하면 넉넉히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번 ‘희년맞이 비전헌금’을 위해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관계없이 ‘모든 성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하고 ‘각자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을 꼭 완수함으로써 이 ‘경향의 성벽’을 ‘양문에서 양문까지’ 아름답게 ‘건축하여 성별하는’ 영광의 희년을 진정 큰 즐거움과 넘치는 감사로써 다 함께 맞이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