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3-11 “외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며” 이사야 42장 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More videos
261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주일낮예배 2018-03-11
2018′경향의 강단(11)(2018년 3월 11일 / 주일 대예배)
“외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며” 이사야 42장 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261)

"외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며"

이사야 42장 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요즘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SNS에서의 인지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팔로워’의 숫자가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고, 무슨 사건이 발생하여 자기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1위로 오르게 되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심지어 ‘무플보다는 악플이 더 낫다.’라는 말까지 흔히 합니다.
  자기에 관한 인터넷 기사에 아무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것은 곧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반면에 비록 ‘악플’이라 할지라도 댓글이 많이 달려 있으면 그만큼 ‘관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을 오히려 지극히 꺼려한 인물이 한 분 계셨는데,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시면서 특히 어떤 큰 이적을 베풀어 주신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참으로 신기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되어’ 유명해지기를 결코 원치 아니하셨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알려지기만을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전 지구상에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이름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란 그 당사자께서는 ‘결코 나를 그런 식으로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기 원하신 당신의 진짜 모습, 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해 주신 참 이름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제 주님 부활의 절기를 한 달 앞둔 오늘 주일에 저는 기독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나타내지 말도록’ 경계해야 할 오도된 인식과, 반면에 온 세상이 앙망하도록 반드시 ‘나타내어야 할’ 예수님의 진짜 명성이 무엇인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 예언된 말씀을 가지고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으려 하는 유명인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1절과 2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외치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시끄럽게 소리치지 아니하며’라는 뜻이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특히 ‘고함을 지르면서 말싸움을 하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오실 메시아는 당신의 대적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결코 스스로 흥분하거나 그들과 맞서 싸움을 걸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유명인사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온 동네에 나팔을 붑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일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자기가 저지른 불법 때문에 당연히 검찰에 소환을 받고 처벌을 받는 일인데도 ‘정치적인 탄압’ 운운하면서 플래카드를 내걸고 연좌농성을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렇게 여론몰이를 하여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격앙시킴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에 3년 내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 이르기까지 유대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중상모략과 박해를 당하셨지만 끝까지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면서’ 그들을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런 경우에 자기를 열렬히 추종하는 무리에게 ‘보시오. 이 바리새인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소.’라고 선동하여 사건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그 대적들이 오히려 대중의 미움을 받도록 유도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고 가르치셨던 말씀과 일치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이단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책망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싸움’이었을 뿐이며, 공생애 기간은 물론이요 마지막 수난 주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그들과 ‘사회적, 정치적 다툼’을 일으키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높이려는 ‘유명인사’가 아니시라면 과연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1절 하반절에서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 ‘정의’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냥 이전의 개역한글처럼 ‘공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사회정의 구현’ 따위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마태복음 12장 18절에서 이 부분을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공의’는 곧 ‘선과 악을 판단’하여 ‘죄를 징벌’하고 ‘의를 포상’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사역을 위하여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택하셨다고 했는데, 이 ‘종’이란 물론 ‘비하된 신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주인의 일을 맡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메시아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 세상에 완벽하게 성취해 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종’을 택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즉 독생자를 직접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그 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이 성부 하나님께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도 집안의 어떤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함부로 맡길 수 없고 가능하면 믿을 수 있는 가족끼리 힘을 합쳐서 해결하듯이, 지금 ‘성부’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기뻐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친히 택하시고 또한 “나의 영” 곧 성령 하나님까지 함께 보내셔서 그 당신의 ‘정의’를 “이방에” 즉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에 “베풀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유명인사들은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유지하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설혹 자기 생각에는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라도 소위 ‘안티팬’(anti-fan)들이 생길 것이 뻔한 일들 즉 다수의 대중이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로 피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도 그런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기 원하셨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슈퍼스타’(superstar)가 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병이나 고쳐 주시는 신유의 초능력자로 자신을 홍보하셨더라면 누가 그런 예수님을 싫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나 ‘영벌 지옥’ 같은 듣기 부담스러운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시고 그저 ‘산상보훈’처럼 누가 들어도 훌륭한 교훈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씀만 남기셨더라면, 아마 오늘날 소위 ‘4대 성인(聖人)’ 대신 오직 예수님만 ‘사상 최고의 성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정반대로 오히려 대중이 싫어하고 꺼려할 인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온 세상에 알리시고 또한 집행하실 ‘심판주’로 왔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일성은 ‘내게로 오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고쳐 준다.’라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육신의 병보다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이 진짜 고질병에 걸려 있음을 일깨워 주시고, 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지 않으면 ‘구더기도 죽지 않는 영원한 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온 세상 사람에게 경고하시면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예수님 당신께서 장차 그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성취시킬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조차 예수님을 이런 ‘심판주’로는 알지 못하고 그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스타’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전히 병 치료나 돈벌이나 자녀교육이라는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전도한다는 것도 그저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라는 기복적인 구호로만 일관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그런 복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만 알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나타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독생자’를 친히 이 땅에까지 보내셨을 때 겨우 무슨 ‘용한 의사’가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부께서 ‘당신의 택하신 종’으로 하여금 ‘성령충만을 입게’ 하신 목적이 세상의 연예인들처럼 무슨 개인기를 보여 주고 매력을 발산시킴으로써 자기 인기를 모으려는 것 따위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사람들은 싫어하고 거부할 것이 뻔하지만, 오로지 ‘죄가 무엇이며 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하여 화육강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으로부터 ‘스타’처럼 인기를 누리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손에 빠져 지옥의 심판에 떨어지지 않도록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몸으로 비하되어 ‘종’으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명인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택하신 독생자’이시며, ‘사람의 욕구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해 주시려고 초림하셨고 또한 그 ‘하나님의 공의를 성취’하시기 위해 반드시 재림하실 ‘심판주’이심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려 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자를 끝내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3절과 4절 상반절에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a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실로 ‘엄중한 심판주’로 나타나셨던 메시아께서 여기서는 실로 ‘인자한 구세주’의 모습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런 메시아의 면모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할” 분이라고 너무나 멋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한 갈대도 한 손으로 간단히 꺾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상한 갈대’야 그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또한 등잔불은 가뜩이나 바람에 취약한 것인데 더욱이 기름이 달랑달랑해서 지금 막 ‘꺼져가는 등불’이라면 그저 사람의 가벼운 숨결에도 쉽게 꺼지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해도 얼마 못가서 저절로 꺾이고 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의 실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듣고 자기들도 그 ‘떡맛’을 한번 보고 싶어서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고 치켜세우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상한 갈대’와도 같았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 믿겠다고 했던 그들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 앞에 오히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라고 고개를 흔들었으며,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는”(요 6:66) 노골적인 거부반응까지 보였던 것입니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들까지 그랬습니다.
  그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따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 그대로 모두 다 ‘허물 많은 베드로’요 ‘의심 많은 도마’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못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할 스승께서 오히려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나 했던 천한 일을 본인이 나서서 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야말로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오직 모든 인류의 대적인 사탄을 이기시고 당신의 택자를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왕 중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그처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처럼 연약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신앙을 완전히 죽지는 않도록 하시려고 끝까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의심에 확신을 주셔서’ 끝내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이 놀랍고도 고마운 ‘택자 보전의 사역’을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인내하면서 계속해 주시는지 아십니까?
  4절에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는 때’란 바로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때를 가리킵니다.
  즉 당신의 택하신 성도를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고 구원받는 자리에 틀림없이 세우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기력이 ‘쇠하여지거나’ 결코 마음에 ‘낙담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끝까지 싸매어 주시고 고쳐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격려하고 독려해 주시는 사역에 이처럼 왕성한 원기와 한없는 열정을 ‘세상에 하나님의 진실한 정의를 완성시키는’ 그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부단히 발휘해 주고 계시는 진정한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란 것은 참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갈대요 참으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등불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주 원망하고 의심하는 것은 물론이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조금만 생기면 교역자에게 ‘교회 못 나겠다.’는 말을 내뱉으면서 큰소리칩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을 했으면 지금쯤은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서 적어도 자기 구역이나 교구에서는 좀 쓸 만한 일꾼이 되었어야 마땅할 터인데 여전히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답보 상태로 머물면서 주일예배 참석조차 불안해서 담당 전도사가 매주일 아침마다 전화를 해야 할 수준인 것입니다.
  만약 목사나 전도사에게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교인들의 신앙 성장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신 같은 교인은 싹이 노랗다.’라고 한참 전에 일찌감치 다 포기하면서 끝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멸망치 않도록 끝까지 보전하여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택하신 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 ‘약한 신앙’이라도 완전히 꺾이지는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이 ‘못난 신앙’이라도 완전히 꺼지지는 않도록 다시 불붙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도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조차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또 낙심될 때가 있습니까?
  이렇게 힘들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간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겠다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혹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포기해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느 영웅이나 호걸이나 가인이나 재사보다도 더 스스로를 높이고 온갖 권세와 명예를 다 쥘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마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죄인을 회복시켜 주시는 구세주’가 되어 주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백보좌 심판대에서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은 그 고마운 천당영생을 얻게 해 주실 그날까지 단 한순간도 ‘쇠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시고 이 구원의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왕’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신 이 놀라운 구세주를 진정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의 ‘상한 심령’을 온유함으로써 고쳐 주시고 ‘꺼져가는 인생’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써 회복시켜 주시는 이 구세주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그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구원에 꼭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0세기 중반에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비틀즈’라는 영국의 록뮤직 4인조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멤버 중의 한 명인 존 레논이 언젠가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높다.”라고 하면서 기독교는 쇠퇴하는 중이며 어쩌면 록뮤직보다 그 수명이 짧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 끝까지 치솟는 자기네의 인기에 대하여 한없는 자만에 빠졌던 것인데, 영국에서는 그 발언이 별다른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넘어갔었습니다.
  하지만 약 5개 월 후에 미국의 한 잡지에 그 발언이 인용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자 미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비틀즈 뮤직 거부운동’을 일으켰고, 그것이 계기가 되면서 비틀즈는 그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던 미국 순회공연이 그들의 마지막 대중공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하반절은 그런 비틀즈의 발언이 그야말로 망언이 될 것을 이미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4b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라는 말씀으로써 이런 메시아의 이름이 결국 온 세상에 끼치게 될 결과를 선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들”이란 ‘전 세계’를 가리키며, “앙망하리라”는 말은 ‘모든 소망을 걸고 열렬히 사모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선포될 “교훈” 즉 ‘복음’은 결국에 가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어떤 ‘유명인사’보다도 더욱 높임을 받게 할 것이며 역사의 그 어떤 ‘영웅이나 군주’라 할지라도, 물론 비틀즈 같은 팝스타 따위로서는 도저히 필적할 수 없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게 만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는 어떤 인기몰이를 통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를 선포하는 ‘심판주’가 되심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에만 모든 소망을 걸게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무슨 위대한 업적을 이룸으로써 사상 최고의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택자를 끝까지 보존해 주시는 겸손과 사랑’으로써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지하고 사모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의 이름을 역사의 정점에 남기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연예인들은 인기를 끌기 위해서 스스로 납치극을 조작하기도 하며 인기 회복의 가능성이 없으면 아예 자살해 버리기도 합니다.
  역사상 자기 이름을 영웅호걸가인으로 남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결코 그런 세속적인 스타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은 ‘섬들이 그 교훈을 바라는’ 즉 ‘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최고의 사모함을 받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완벽하게 공의로우신 심판주’요 ‘자비롭기 한이 없으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어떤 이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뭐 어떻습니까?”라고 누가 물어 오면 “그게 뭐 별 게 있겠습니까? 다 그저 그렇지요.”라고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그러면 교회는 왜 다니십니까?”라고 물어 오면 “신앙생활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까요.”라고 얼버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자신부터가 ‘심판주’의 이름이 그리 두렵지도 않고 ‘구세주’의 이름이 그리 고맙게 여겨지지 않는 교인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뭐가 잘 됩디까?”라고 누가 물으면 “예, 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천당 구원을 약속 받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당신도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이렇게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시는 심판주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에 교회 좀 다녀 보았는데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서 그만 두었습니다.”라고 누가 말하면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을 찾아보십시오.”라고, 우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최고의 왕 같은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체험한 신자만이 그렇게 그 이름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죄인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심판을 엄중히 경고해 주시면서도 또한 그날이 올 때까지는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도와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하고 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먼저 믿고 소망하면서 또한 온 세상을 향하여 더욱 크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