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3-04 “교만한 자, 마음이 든든한 자” 아모스 6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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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3-04
2018′경향의 강단(10) (2018년 3월 4일 / 주일 대예배)
“교만한 자, 마음이 든든한 자” 아모스 6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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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자, 마음이 든든한 자"

아모스 6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잠언 18장 12절 상반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선봉’이란 ‘필연적으로 어떤 결과를 야기하게 되는 원인’이라는 의미의 비유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이 일어나면 그 인생 전체가 ‘멸망’으로 급전직하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잘나가다가 그 ‘교만’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멸망’을 당하고 만 대표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바로 본문 1절에서 “1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책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
라는 말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별명이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남조 유다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라는 말은 북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수도인 ‘사마리아성’이 자기네의 안전을 든든하게 보장해 줄 것을 믿고 자만에 빠져 있던 것을 가리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나란히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2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그 ‘교만’과 ‘자만심’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갈레”
는 바벨론 제국에 속한 도시였으며, “하맛”은 수리아 지방의 대표적인 대도시였고, “가드” “블레셋 사람”들이 세운 5대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상의 세 도시들은 비록 당대에는 명성을 떨쳤지만 아모스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이미 다 멸망당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갈레’는 앗수르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하맛’은 북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에 의하여, 그리고 ‘가드’는 남조 유다의 웃시야왕에 의해 정복을 당했습니다.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 이방민족의 유명한 성읍들보다 훨씬 더 좋은 ‘가나안 복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줄은 몰랐던 까닭에 선민이라 하면서도 실상 ‘아무 나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책망입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흉한 날이 멀다” 즉 무조건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듣기 좋은 예언만 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온갖 영적 나태와 육신적 방탕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아 상”
은 아주 비싼 수입품인 상아로 장식된 침상인데, 그들은 아침 늦게 그 화려한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날 밤새도록 “어린 양”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흥청망청 잔치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처럼 악기를 제조하며”
라는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악기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이들은 순전히 자신의 쾌락과 잔치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했음을 대조시킨 것입니다.
  게다가 잔도 아닌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나드향 같이 지극히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른”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극도의 향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육신적 타락은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영적 방심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 얼마나 무섭게 닥쳐올지에 대해서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
이 그 모양 그 꼴이었으니 결국 “이스라엘 집” 즉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그들을 따르게” 되었고, 그런 ‘국가적 교만’은 필연적으로 ‘국가적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들의 실패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가 끝내 패망에 빠지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기독신자가 꼭 명심하고 지켜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생에 역경이 닥쳐올 때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오직 겸손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7절부터 11절에 “7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9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10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더 있느냐 하면 대답하기를 없다 하리니 그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11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아모스 선지자는 그처럼 교만에 빠진 북조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곧 내리실 심판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라고 한 것은 장차 앗수르 제국이 북조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성을 함락시키고 난 후에 일반 백성들보다 먼저 정치 지도자들부터 붙잡아 갈 것을 가리킵니다.
  그날이 오면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 즉 향락으로 날을 지새우던 자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그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타격을 받아 큰 집은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지리라”
는 11절의 말씀은 그런 패망이 ‘큰 집’ 즉 비단 지도자들뿐 아니라 ‘작은 집’ 즉 일반 백성에게도 공히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의 머리인 권력자나 부자’뿐 아니라 ‘그들을 따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던 서민이나 빈자’ 역시 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비참한 망국의 비극을 겪게 될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영광’이라고 한 것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던 영적 특권을 가리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는 그 영광까지도 ‘싫어한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들을 가증스럽게 여기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에는 자연히 저주와 멸망만이 남게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구체적인 결과가 9절 이하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고 하신 것은 앞서 언급한 앗수르의 침략에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은 다 죽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한 번의 전쟁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기근이나 질병 등이 계속 따라옴으로써 그야말로 저주의 끝장을 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북조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성이 나중에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3년 동안 포위를 당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실현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은 그처럼 하나님의 저주가 연속적으로 내리게 됨으로써 나타나게 될 현상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라고 했는데, 우선 이스라엘 사회는 시체를 주로 매장했지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죽는 사람이 많으므로 일일이 매장할 수가 없는 까닭에 화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간다”
고 했는데, 여기서 ‘뼈’란 사실은 ‘시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처럼 ‘시체’란 단어 대신에 ‘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흔히 나타납니다.
  어쨌든 ‘죽은 사람의 친척’이 그 시체를 화장하기 위하여 집 밖으로 내어 가면서 “그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자” 즉 집안의 은밀한 곳에 숨어서 용케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아직 더 있느냐”라고 즉 “너 말고도 이 집에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더 있느냐?”라고 질문하게 될 것인데, 그때 그 생존자는 “없다” 즉 ‘나 혼자만 살아 있다.’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런 대답을 듣게 된 친척, 즉 그 죽은 자의 시체를 끌어내어 가던 사람이 그 살아남은 사람에게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언뜻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앞뒤의 문맥을 따라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잠잠하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우리나라말로 ‘쉬’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지금 방금 한 말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니 당장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생존자는 ‘나만 살아 있다.’라고 했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는데, 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하면서 ‘쉬’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에 흔히 ‘슬프다 주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곡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 사람은 자기 가족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을 것인데, 지금 시체를 장사하러 온 친척이 “그렇게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재수 없는 이름’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조국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당하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끝없이 죽어나가는 동안에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와 같은 불행과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자복하고 회개함으로써 그런 재앙을 그치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체가 오히려 더 많은 액운을 불러들일 것처럼 여기면서 ‘쉬,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이 집안에, 우리나라에 더 나쁜 일이 생길라.’라고 그 성호를 무슨 금기사항(taboo)처럼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참 그 얼마나 밑바닥까지 이른 불신앙이며 또한 그 얼마나 한없이 높아진 교만이겠습니까?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통해 ‘야곱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로지 ‘상아 침상에서 기지개만 켜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징벌을 내리십니다.
  더 이상 당신 앞에서 ‘향락 가운데 떠드는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따끔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벌을 받게 될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왜 나한테 이러시나?’ 하고 원망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인생이 역경으로 치닫게 될 때일수록 더더욱 자신의 죄를 돌이켜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 대신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구나. 아예 교회에 안 나가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려고 작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처럼 교만의 극에 달한 자에게는 그야말로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는’ 완전한 멸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극심한 역경에 처하게 되더라도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자.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기도해도 오히려 더 나쁜 일만 생기지 않느냐?’라고 감히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정말 회생의 길이 없는 최악의 저주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악재가 연속으로 닥쳐올 때일수록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원망하지 않도록 극히 주의하면서 오히려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인자하심에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생이 형통할 때 결코 자화자찬에 빠지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12절 이하 14절에 “12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13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1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라는 말씀은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할 방도가 없다는 비유입니다.
  말이 아무리 잘 달린다 해도 ‘바위 위’에서는 제대로 달리기가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소 역시 밭은 갈 수 있지만 ‘바위 위’에서 쟁기질을 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이것은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면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그처럼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무법천지의 사회로 전락하게 된 동기는 바로 ‘자만’이었는데, 13절에서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화자찬한 말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기 “허무한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로드발’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사무엘하 9장 4절 등에서 지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3절 하반절에 나오는 “뿔”이라는 단어도 ‘가르나임’이라는 말로서, 창세기 14장 5절에 보면 역시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책에는 이 개역개정판처럼 이 단어들을 일반명사로 취급해서 “허무한 것”과 “뿔”이라고 번역해 두었고, 또 어떤 성경번역에는 이것들을 고유명사, 즉 지명으로 보고 “너희가 로드발을 기뻐하며, ‘우리의 힘만으로 가르나임을 취했다.’라고 말한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조 이스라엘은 정치적 안정 및 경제적 부흥을 이루면서 잠시 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여로보암 2세 당시에 아람 족속과 전쟁을 하면서 이 두 성읍을 빼앗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바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드발’이라는 성읍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두고 크게 기뻐하고 ‘가르나임’이라는 성읍을 자기네 힘만으로 취한 사실을 크게 자랑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반면에 아모스 선지자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에 두고 의도적으로 이 두 단어를 일반명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자만심을 풍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쪽 해석을 취하든지 간에, 이 말씀이 북조 이스라엘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우선 ‘허무한 것’ 혹은 ‘로드발’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로드발이란 성읍 자체는 실제로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북조 이스라엘은 그 별것 아닌 성읍을 얻게 된 것을 두고 무슨 대단히 큰 성과나 이룬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니 그 ‘로드발’이란 단어를 그냥 ‘허무한 것’이라고 번역해도 그 뜻은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한 말 역시 그렇게 됩니다.
  여기서 ‘뿔’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허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강력한 세력이나 권세’를 비유한 것으로서,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과 그로 인해 이룬 성과를 두고 스스로 자랑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뿔’이라는 단어를 한 성읍 ‘가르나임’으로 보아도 똑같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속했던 성읍 하나를 정복해 놓고 그것이 순전히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었으니, 역시 자만의 죄를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 이 한 쌍의 단어들을 통해서 북조 이스라엘의 죄는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자기네들이 조금 성취해 놓은 것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자화자찬과 자기네들이 좀 어렵게 성취해 놓은 것을 두고 순전히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런 자만 때문에 자기네의 성취와 형통을 두고 하나님께 아무 영광이나 감사를 돌리지 않는 엄청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 까닭에 “한 나라” 바로 앗수르 제국을 들어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 결과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즉 아까 언급했던 여로보암 2세 때 북조 이스라엘이 최대로 확장했던 영토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완전히 앗수르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가 되거나 타 지역으로 추방되는 등 이방민족에게 “학대”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달리 많은 고생을 한 끝에 결국 자기 힘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자수성가’란 참으로 귀중하고 칭찬할만한 업적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수성가가 사실상 자랑스러운 일인 까닭에 그 자랑이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대로 ‘자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던 사람이 큰 성취를 이루게 되면 갑자기 생활도 넉넉해지고 만사에 대하여 아주 여유 있게 됩니다.
  바로 그 풍족함이 곧 방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본인만 모르는 가운데 자화자찬과 자기만족에 빠지기가 참으로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겸손하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이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한 집안을 일으켰다든지, 회사 하나를 세웠다든지, 혹은 목사의 경우 교회 하나를 세웠다든지 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들인데, 그것이 뭐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만한 일이겠습니까?
  또 무언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사실 그것을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해 내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이모저모로 다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을 기억하고 더욱 그런 은인들에게 감사하면서 그야말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더욱 겸손해야 마땅한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내가 오직 나 혼자의 힘으로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라고 자화자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랜 고생 끝에 성공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였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에 빠지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멸망을 자초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이 형통할수록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비한 자세를 견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교만’에 빠지는 순간 즉시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은 세상의 우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마당에서 놀던 두 마리의 수탉이 서로 더 세다가 자랑하다가 치열한 싸움 끝에 한 마리가 수풀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긴 수탉이 마당 한가운데서 “내가 제일 힘 센 닭이다!”라고 고개를 높이 쳐들고 외쳤는데, 하늘에서 맴돌고 있던 독수리가 그 모습을 보고 냉큼 날아와서 그 닭을 잡아채 갔습니다.
  싸움에서 진 수탉은 수풀 속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독수리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싸움에서 이긴 수탉은 그처럼 잘난 체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솝 우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속에 남달리 크고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슴은 자신의 뿔을 항상 자랑하고 다녔고 다른 사슴들은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사자가 나타나서 모든 사슴들이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그 큰 뿔을 가진 사슴은 자기 뿔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우화’이지만, 성경은 ‘교만이 멸망의 선봉’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화’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바로 다니엘 4장에 기록된 것으로서, 느부갓네살 왕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0절)라고 자만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짐승처럼 변하는 병에 걸려 7년 동안이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머리털이 독수리 털같이 자란 상태로 지내게 된 사건입니다.
  당대 최고의 제국을 건설했던 제왕조차 그 ‘교만’이라는 한 가지 죄 때문에 문자 그대로 ‘짐승’같이 낮은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까 서론에서 인용했던 잠언 18장 12절 상반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는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하반절에 보면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하반절은 상반절의 말씀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더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본문에서 보았듯이 그야말로 ‘자폭’의 나락으로 직통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이란 그냥 ‘사람 가운데서 좀 잘난 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리고 엄중히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는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겸손’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보시는 마음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존귀’하게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잠언 18장 12절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이 구절의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12절과 똑같은 문맥의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10절의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는 말씀과 11절의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견고한 성과 높은 성벽같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부자는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교만한 자’이며 ‘자신의 성취를 두고 자화자찬하며 마음 든든해’ 하지만, 그 끝은 ‘멸망’일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 달려가서 엎드리는 곳은 곧 ‘여호와의 이름’ 아래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호와의 이름’이야말로 진짜 ‘인생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견고한 망대’인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곧게 세우는 ‘교만한 자’, 조금 돈 벌어 놓았다고 절대주권자를 만홀히 여기면서 자만에 빠져 있는 ‘마음이 든든한 자’는 이미 ‘패망’으로 직통하는 길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명심하면서, 인생의 역경을 당할 때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회개하고 인생의 형통을 만나게 될 때에는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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