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2-11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아모스 2장 9-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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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2-11
2018′경향의 강단(7) (2018년 2월 11일 / 주일 대예배)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아모스 2장 9-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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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아모스 2장 9-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옛말에 ‘삼희성(三喜聲)’ 즉 ‘듣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세 가지 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갓난아기의 우는 소리, 아낙네의 다듬이 방망이 소리, 글방 도령이 책 읽는 소리’인데, 이 세 가지 소리가 담 넘어 들리는 집은 유복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건강한 아이가 계속 태어나고, 주부가 집안일을 성실하게 하고, 자녀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집이라면 반드시 잘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삼희성’ 중에서 ‘다듬이 방망이 소리’는 요즘같이 집집마다 세탁기를 돌리는 시대에 와서는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겠지만, 나머지 두 소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공한 가문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건강한 후손들이 출생해야 하고 또한 그 후손에 대한 교육이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가 그들의 “아들 중에서 선지자”가 나오느냐 아니냐, 그들의 “청년 중에서 나실인”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실인’이란 ‘성별된 자’라는 뜻으로서, 민수기 6장에서 명하고 있는 대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며 부정한 것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는 세 가지 서약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나실인’으로 서약을 하고서 자신을 성별하는 것이 중요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런 ‘나실인’이 곧 ‘민족의 대를 이어갈 갓난아기’에 해당되었고, 그런 ‘선지자’가 바로 ‘선민의 정통성을 지켜 줄 글방 도령’이었던 것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저는 왜 우리 경향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나실인’과 ‘선지자’가 꼭 일어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건한 후손’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9절과 10절에 기록하기를 “9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10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신” 후에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게 하셨던 시절을 되새겨 주시는 내용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아낙 자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군해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 중에서도 특히 ‘신장이 장대한 족속’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들을 가리켜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다”라고 묘사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열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보고할 때 자기네들은 그들 앞에서 마치 메뚜기처럼 보였다고 말했던 그 민족이 바로 이 ‘아모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강력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아모리인들을 간단히, 그리고 철저히 “진멸”해 주셨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차지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이 이제는 해방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자기네의 국토로 얻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꿈같은 일이었겠습니까?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바로 일제 36년의 강점기를 벗어나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 대한민국으로서의 주권과 국토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야 원래 우리 땅이던 것을 되찾았을 뿐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여태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할 것이 전혀 없다가 그 강력한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차지하고 있던 땅을 빼앗아 자기네 국토로 삼게 되었으니, 실로 그들 민족 역사상 최대의 복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뒤를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해 주십니다.
  바로 11절에서 “11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은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자기 민족이 받은 크나큰 복인 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처 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훨씬 더 큰 복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영토의 복은 다른 민족들도 다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이스라엘만 받았던 복, 이스라엘만 특별히 누릴 수 있었던 진짜 복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만 ‘선지자’와 ‘나실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그 어떤 강대국, 아무리 넓은 영토와 수많은 백성을 가진 제국이라 할지라도 이런 하나님의 선지자, 이런 경건한 나실인은 단 한 명도 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 중에서만 장래에 선지자가 될 인물이 태어났고, 이스라엘 백성의 차세대에서만 일찍부터 나실인으로 서원하면서 자신을 성별하는 청소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나안 땅 정복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내가 너희의 아들과 청년들 중에서 이런 경건한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는 복을 베풀어 주지 않았느냐?’라고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과연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한 국가의 전성기 때에는 그 나라에 목사가 많았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졌으며, 경건한 후손들이 대를 이어갔습니다.
  유럽의 황금기 때가 그랬고,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누릴 때가 그랬고, 지금 미국이 ‘세계의 요셉 창고’와 같은 부와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가 역시 그러했습니다.

  한 교회만 두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경향교회가 강서성전을 얻게 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놀라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마치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한 것같이 전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IMF 시절에, 우리보다 먼저 성전건축을 시작했던 다른 더 큰 교회들도 다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수백 억 대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로 기적적으로 당시의 경복학원을 우리 손에 붙여 주셨고 이 ‘경향학원의 터’ 위에 강서성전을 끝내 완공하고 헌당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이제는 바로 그 곁에 있는 ‘교육관’과 ‘선교관’까지, 정말 우리가 ‘받아서 쌓기 바쁠 정도로 넘치는’ 복을 연이어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경향교회는 이런 ‘땅을 차지하게 된’ 것보다 훨씬 더 큰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 경향의 아들 중에서 ‘선지자’가 생기고, 우리 경향의 청년들 중에서 ‘나실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출산으로 인해 교회마다 주일학교를 운영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시대이지만, 우리는 그런 현실을 변명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일찍이 원로목사님께서 ‘교회의 미래는 주일학교에 있다.’고 하시면서 ‘현대사회일수록 부모를 통해서 자녀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먼저 전도하면 부모도 따라서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다.’는 실로 기가 막히는 전도 전략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 강서시대가 시작되던 때부터 ‘어린이 선교원’과 ‘새소식반’을 ‘전도의 못자리판’을 만들어 놓고 ‘닫힌 아파트 문의 열쇠’를 바로 어린이들을 통해서 찾아내는 가운데 오늘까지 이처럼 부흥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주일학교 학생이 모두 다 ‘중생 받는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교회를 떠나는 수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들이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떤 계기를 통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신앙을 회복시키게 해 주실 수 있는 소중한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주일학교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우리 경향교회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천하보다 귀한 보배’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경향교회는 다른 교회처럼 ‘학생회’가 아니라 ‘SFC’ 즉 ‘학생신앙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중고대학생들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모임이 무슨 ‘학생 친목회’나 ‘학생 봉사회’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개혁주의신앙’을 철두철미하게 배우고 익히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교회의 학생들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 교육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통하여 ‘종교개혁자’와 ‘순교자’의 후예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른 신앙생활을 지키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이처럼 교회중심으로 자라나고 있는 이 SFC 운동원들은 그야말로 경향교회의 ‘호랑이 새끼’들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청년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청년들은 주일의 예배 참석을 비롯하여 온갖 봉사활동에 핵심멤버가 되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 바쁜 생활 중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금요밤 기도회에까지 참석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지만 그 교회를 젊은 남녀들의 사교장소 쯤으로 여기는 이 시대의 적지 않은 청년들과는 달리 우리 경향의 청년들은 이처럼 ‘신전인격자’의 신앙과 ‘신행일치’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두는 가운데 실로 든든한 ‘교회의 동량’들로 성숙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 경향교회에 이런 믿음직한 청년들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진정으로 복을 받고 그 축복을 증폭시킬 수 있는 길은 이런 ‘경건한 후손’이 끊이지 않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우리 경향의 주일학교와 SFC와 청년회를 통해 이처럼 ‘성별된 나실인’들을 더욱 많이 양육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차세대 전도자’를 계속 배출해 내는 것이 곧 교회의 미래에 대한 최고의 보장입니다.

  본문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12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이스라엘 백성의 치명적인 잘못을 단도직입적으로 책망하셨습니다.

  “나실 사람” 즉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나실인의 서약을 도중에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예언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역시 선지자의 생명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네들의 나실인과 선지자들을 그렇게 타락시키고 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나실인과 선지자야말로 자기 민족의 미래가 걸린 핵심적 존재인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으면 되었다고만 생각하고, 자기 아들들을 나실인으로 서원시키고 선지자로 키우는 것을 등한시했습니다.
  아니 그나마 나실인으로 서약한 사람이나 이미 선지자가 된 사람들조차 방해하고 낙심시켰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나실인에게까지 포도주를 함께 마시도록 압박을 주는가 하면,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를 위협하면서 함구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풍토에서 어느 청년이 스스로 나실인 서약을 하겠으며 어느 집 아들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지자가 되겠다고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자기네 나라에서 선지자들이 다 없어져 버려도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방관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이스라엘의 차세대에서 그처럼 ‘예언하는 선지자’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곧바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놓이면서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 16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기록하기를 “13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14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15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16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을 주변 강대국들을 동원하여 마치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의 바퀴가 “흙을” 짓누르듯이 압박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자 이스라엘에서 내로라하며 살던 자들까지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리 달음박질하는” 달리기 선수 같은 사람은 물론이요 “말 타는 자”까지도 그 심판으로부터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강한 자”“용사”“활을 가진 자”를 비롯하여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 즉 ‘최정예 용사’까지도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때 그것을 막아낼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비참한 망국의 결과는 바로 앞의 12절에 나온 대로 그들이 ‘나실인을 타락시키고’ ‘선지자의 예언을 막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적국의 강력한 군대 때문에 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청년들의 경건의 능력이 약해질 때부터 이미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신세대에서 더 이상 선지자가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미래에 치명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청년 세대에 ‘나실인’이 사라져 가는 것은 보통 염려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청년들조차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 나라의 다음 세대가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청년들조차 직장 회식 자리에서 술을 자연스럽게 마시면 그러지 않아도 악성적인 술 문화에 찌든 이 사회에 도대체 누가 좀 맑은 정신으로 바른 정치를 하고 깨끗한 상거래를 하겠습니까? 교회의 청년회 안에서 교제하는 남녀 사이에서조차 혼전관계를 예사로 여긴다면, 초기 개척시대에는 철저한 청교도 신앙으로 가정과 사회를 지켰던 미국이 지금은 무슨 프리섹스의 천국처럼 되어 버리고 있는 역사가 우리나라에서도 고스란히 답습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젊은이들조차 그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몸을 다 바쳐 충성할 줄 모르고 그저 무슨 극장 구경이나 가듯이 일주일에 한번 주일예배 한 시간만 겨우 다녀간다면, 한때 개혁주의 교회 운동으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유럽의 교회들이 지금은 그저 관광명소로 전락해 버린 저 비참한 현실이 바로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도 수 십 년 안에, 아니 십 년도 채 못가서 그대로 벌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음 세대의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자기 자식은 절대로 목사를 시키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는 아버지 목사들이 있습니다.
  자기처럼 고생시키기 싫다는 일념 때문입니다.
  장로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목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는 아들도 있습니다.
  그 아버지 장로가 평소에 집에서 걸핏하면 목사 흉을 보고 깔보는 것을 익히 보면서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자기 자녀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이 무슨 집안의 망조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처럼 자기 아들이 선지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집에 화를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교회에서 몇 년이 지나도 신학생 지원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교회가 실상은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신학교들이 문들 닫고 이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아무도 목사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비극이며 가장 두려운 망국의 징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사라지는 나라는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경향교회가 ‘별들의 학교’를 통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선지자’로 키우기 위해 어릴 때부터 ‘영적 영재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정말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 ‘별들의 학교’ 역시 원로목사님께서 ‘앞으로 점점 더 신학교 입학생들이 줄어들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판단과 함께 시작된 운동입니다.
  선교사를 후원하는 교회들은 많이 있고, 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장래의 목사, 선교사, 신학교수, 전도사, 목사 사모’가 될 ‘별님’들을 일찍부터 서원을 시키고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교회는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 경향교회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로 이 ‘별들의 학교’와 ‘별들의 학교 후원회’ 덕분에 우리 교단의 고려신학교에 매년 입학생들이 계속 이어졌을 뿐 아니라 그 지원자들의 자질이 갈수록 더 높아져 왔습니다.
  거기에다 그야말로 금상첨화처럼 하나님께서 더해 주신 제네바신학대학원대학교의 미래 역시 이 ‘별들의 운동’ 덕분에 더욱 밝게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실로 경향의 ‘청년’들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나실인’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곧 이 경향교회의 존속이 달려 있습니다.
  이 경향의 ‘아들’들 중에서 별님으로 서원을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목사’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 경향교회로서는 문자 그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인 것입니다.
  장래의 전도자들을 발굴하고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최고 엘리트로 키워나가는 이것이야말로 곧 경향교회의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장임을 깨닫고, 자신의 자녀들을 ‘별님’이 되도록 격려하고 ‘별들의 학교 후원회’와 ‘제네바신대원 후원회’와 ‘경향선교회’를 통해 이 소중한 ‘선지자’들을 더욱 힘을 다해 후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싱가포르는 작고 역사도 극히 짧은 나라이지만 기적적인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불리게 된 나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의 가장 큰 고민은 청년들의 출산율이 너무 낮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계속 발전되고 사회조직은 점점 더 전문화되면서 복잡해지는데,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지금 싱가포르는 국제적으로 유학생들을 좋은 조건으로 많이 유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싱가포르에 영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마가 과거 역사상 최강 제국이 되고 미국이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공통적인 이유 역시 둘 다 ‘시민권’을 이용하여 다른 민족의 유수한 인재들을 자기 나라에 영입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차세대를 이어갈 인재가 없으면 아무리 크고 강한 나라라도 순식간에 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인 것입니다.

  지적 인재도 그러할진대 영적인 인재가 없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청년 세대가 경건의 능력을 잃으면 그 사회의 도덕, 양심, 상식으로부터 시작해서 경제성장, 국력신장, 이 모든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경향교회는 정말 큰 복을 받았습니다.
  강서성전을 지었고 교육관과 선교관을 구입했을 뿐 아니라, 경향선교회와 제네바신대원과 별들의 학교와 경향학원과 경향복지재단 등등 아주 잘 짜인 ‘영적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들을 채울 신앙의 차세대, 이 모든 하드웨어들을 활용하고 돌려나갈 소프트웨어 인재들이 계속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한순간에 풀썩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에는 ‘선지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나실인’도 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그대로 선포하는 선지자가 있으면 바로 그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사는 나실인이 곁에 함께 서서 완벽한 콤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교회는 부흥하고 그 나라는 복에 복을 더하여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교회에 있어서는 ‘나실인’이야말로 ‘대를 이을 갓난아기’이며 ‘선지자’가 곧 ‘가문을 일으킬 글방 도령’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경향의 1세대에는 실로 훌륭한 ‘선지자’가 세워졌고 정말 신실한 ‘나실인’들이 나왔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당신의 목회사역의 최전성기를 온통 바치셨고, 초대 장로님들 역시 겨우 30세 전후의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생애 최고와 전부를 다 바쳐 다 충성스럽게 섬겨 왔습니다.
  이 경향교회가 남달리 큰 복이 넘치는 영적 초장이 되고, ‘세계를 받은 교회’의 비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는 산성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향의 2세대 역시 이 영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경향의 아들’들이 더 많이 ‘별님’으로 서원을 하고 ‘제네바신학대학원’을 거쳐서 목사와 선교사와 신학교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경향의 청년’들이 ‘경향교회 3대 후원회’의 회원과 임원이 되어야 하며 경향학원과 우성학원과 총회유지재단의 이사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향의 후손들이 ‘경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고 ‘신실한 전도자’가 되는 것이 곧 우리 경향교회가 누릴 더 큰 복과 영광스러운 미래와 직결되어 있음을 명심하면서, 우리의 청년들을 꼭 ‘성별된 나실인’으로 키우고 더 많은 우리의 아들들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도록 마음을 다해 격려하며 힘을 다해 후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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