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2-04 “그리스도의 몸, 지체의 각 부분” 고린도전서 12장 1-3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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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2-04
2018′경향의 강단(6) (2018년 2월 4일 / 주일 대예배)
“그리스도의 몸, 지체의 각 부분” 고린도전서 12장 1-31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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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지체의 각 부분"

고린도전서 12장 1-31절 / 석기현 담임목사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계에서 흔히 듣는 구호입니다.
  많은 교단들이 어지러이 설립되어 있는 현실 가운데 이런 구호를 들으면 늘 백번지당한 말 같고 정말 참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최고의 표어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다 따라가야 한다는 의미로 정의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들은 각양각색이며 어느 교회나 각각 장점과 단점들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냥 어떤 초대교회 하나를 모델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라, 초대교회들 전체가 공유하고 있던 교회 본연의 자세를 찾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지극히 제한된 의미로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오순절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운동을 오늘날의 교회에서 똑같이 회복시켜야 한다고 외치면서 ‘방언과 신유’의 은사야말로 그런 성령운동의 대표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본문 앞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1장까지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갖가지 문제가 많은 교회였는데 은사 문제에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 안에 잘못 인식되어 있던 은사 문제를 지적하면서 정말 성령충만한 교회와 성도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모든 교인들이 한 몸 같은 교회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령충만입니다.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 무언가 “신령한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려 하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것을 모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마땅히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고 믿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령한 것을 알기 전에 우리의 판단과 의지란 그저 ‘말 못하는 우상에게 질질 끌려 다니던’ 비참한 상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중생을 받은 신자는 이제부터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해할 줄 알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고차원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논하기 시작한 ‘신령한 것’의 제일 첫째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뭔가 영적으로 깊은 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사도 바울이 과연 어떤 종류의 성령충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아니한다.’라는 사실과 ‘누구든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야말로 ‘신령한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상태’인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성령충만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우상종교와 불신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의 머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오로지 썩어질 것과 사탄의 유혹에 매여 살던 우리의 사고 구조가 이제는 예수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증거할 줄 아는 ‘신령한 심령’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역사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이적이요 기사요 표적입니까?
  실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고는, 실로 성령이 우리의 심령과 입술을 주장하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이것보다 더 강력한, 더 중요한 성령충만이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4절 이하 13절에 이어서 기록하기를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들에 보면, “은사”“직분”이나 “사역”은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고... 주는 같으며...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은 마치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시는 것과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한 성령”, “같은 성령”이란 말씀도 수차례 반복됩니다.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신자가 보유하고 발휘하게 되는 은사의 종류는 실로 가지각색이지만 그 모든 은사들의 출처는 오직 ‘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처럼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어디까지나 교회에 유익하도록 사용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처럼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 중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곧 그 많은 “몸의 지체”들 즉 ‘각 신자’들이 결국 “한 몸”이 되는 것 즉 ‘한 교회’를 이루는 일입니다.
  교인들이 제각기 다양한 은사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 모두가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아주 중요한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똑같이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회에서는 각양각색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이 한 가지 공통적인 성령의 은사 때문에 교회라는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하다는 것이 무슨 귀신을 불러 대화한다는 따위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충만하게 받은 상태란 것이 무슨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지껄이는 따위의 저급한 모습으로 나타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두고 서로 자기가 더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는 교인들만 모인 교회가 ‘한 몸’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다들 자기가 받은 개인적인 체험만 내세우면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내면적으로는 갈기갈기 찢어진 ‘난장판 교회’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전 국민을 절로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라는 절대적 공통분모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선이나 대선 때에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사람들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를 맞이하게 되면 다들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크게 외치면서 문자 그대로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는 다들 성격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사회적 지위나 재력도 각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한 교회를 중심으로 정말 ‘한 몸’같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는 신앙고백이 똑같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똑같은 예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한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받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내가 더 영적이다.’라든지 ‘내가 남보다 더 성령충만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신령한 것, 가장 성령충만한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진짜 신자만 할 수 있는 “참되고 온전한 말”(행 26:25)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시다.’라고 정신 똑바로 차린 말 한마디를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바로 이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 성령충만한 신자가 발휘하는 최고의 신령한 은사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중심의 생활’로써 ‘다양한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서로 돌보면서 교통하는 것’이 진정한 성령충만입니다.

  14절 이하 21절의 말씀에 “14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잘못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스스로 ‘나는 이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잠재의식에 사로잡힌 교인은 항상 교회의 가장자리만 겉돌면서 좀처럼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적당히, 부담 없이 교회생활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몸의 여러 지체들을 들어 비유하고 있습니다.
  발이 손보다는 좀 덜 중요하다고 스스로 “나는...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바울은 설의법적으로 질문했습니다.
  또 귀가 얼굴의 다른 지체들, 즉 눈이나 코나 입처럼 한가운데 붙어 있지 않고 가장자리에 붙어 있다고 해서 “몸에 붙지 아니한” 지체가 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물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체된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온전한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그 외에 받은 은사의 종류나 정도에는 아무 상관없이 모두가 다 교회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거리, 즉 제로의 거리를 두고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지체가 아니며, 장로라고 해서 예수님을 더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각각 받은 달란트가 다르고 직분이 다른 이유는 그저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어디에 붙어 있든지 간에, 즉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다 ‘한 몸’ 안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다 ‘한 머리’ 즉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영적 신경’으로 직결되어 있는 지체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단일체인 동시에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개인 신자의 개성이 교회라는 공동체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며, 교회로서의 일체성이 개인 신자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 한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한 치의 간격도 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되어 있기만 하면 그 어떤 교인도 결코 ‘덜 중요한’ 지체는 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각 교인은 교회를 통해 예수님께 확실히 붙어 있든지, 아니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완전히 떨어져 있든지 그 둘 중에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22절부터 26절에 기록하기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회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는 것도 잘못이지만, 다른 약한 교우를 두고서 ‘저 교인은 우리 교회에서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사람들도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라고 비유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장식할 때 아름다운 부위에 하지 아니하고 상대적으로 못 생긴 부분에 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시력이 나빠도 가급적 안경을 쓰는 대신 콘택트렌즈를 착용해서 자신의 영롱한 눈을 그대로 보이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쭈글쭈글하게 생긴 귀에는 귀걸이로 그 못생김을 감추면서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려 합니다.
  목에 목걸이를 하고 손목에 팔찌를 끼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것 역시 그것들이 다 밋밋하고 그 자체로는 그다지 아름다울 것이 없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도 그와 꼭 마찬가지로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남보다 덜 중요하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교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 귀중한 것’으로 장식해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대신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냥 그대로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몸을 고르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그처럼 약한 교인에게 ‘귀중함’라는 특별한 장식이 달리도록, 입히도록 해 주십니까?
  바로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약한 지체, 덜 중요하게 보이는 교인일수록 더 신경을 쓰고 잘 보살피며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지극히 존중해 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지체된 교인들이 꼭 실천해야 할 역할인 것입니다.

  약한 지체가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세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지체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기뻐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서로 돌아보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5절과 16절에서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서로 못난 지체는 욕하고 아름다운 지체는 시기하게 된다면 그 교회가 한 몸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못나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더욱 귀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잘 믿고 충성하여 큰 복을 받는 지체를 보고 함께 기뻐해 줄 줄 아는 지체들이 되어야만 진정 한 몸 같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이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재미를 전혀 못 느끼는, 스스로 ‘개밥의 도토리’처럼 겉도는 교인들은 목사가 보기에도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적(private) 신앙생활’, 혹은 ‘개인주의(individualistic) 기독교’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는 반드시 몸인 교회에 ‘붙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교인은 그 인격과 생활 전체가 완전히 ‘교회를 구성하는 성분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각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런 은사가 곧 ‘영력’과 직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더욱이 누가 더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하고 교인들 간에 경쟁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지체들 사이에는 ‘약한 교우’들을 위로하고 존중하며 ‘아름다운 교우’들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실로 진실하고도 뜨거운 성도의 교통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체’ 즉 신체의 각 부분은 다 ‘같은 피’가 흐르는 혈관과 ‘머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참된 성도 역시 ‘십자가 대속의 피’와 ‘성령 감동의 신경’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록 약한 성도도 있고 강한 성도도 있으며, 좀 부족한 성도도 있고 아름다운 성도도 있지만 그처럼 다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인 한 그야말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겉돌지 않고 어찌하든지 철저하게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서 각자 받은 은사는 다를지라도 진실하고 뜨거운 성도의 교통을 나누는 것 – 바로 이것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특별은사보다 더욱 요긴한 성령충만의 은사임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끝으로 27절부터 31절에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나타나듯이 신유나 방언의 은사란 것은 사도나 선지자가 받은 ‘말씀선포’의 은사에는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유의 능력을 베푼다는 것이 예배의 주된 순서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방언의 수준이 목사의 영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령하고 고귀한 은사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예루살렘교회의 오순절 때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심령의 세례를 통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십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그 오순절 때처럼 신자들로 하여금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외국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도록 역사하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대신 성경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게 하심으로써 여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이 각 나라와 민족에게 증거되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이 오순절에 있었던 외면적인 사건들을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성령께서 아주 특별하게 역사하신 특별한 사건, 단 일회로 끝난 사건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은사운동이란 것은 오순절 사건 때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은사를 받아야만 제대로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크게 오도하고 있습니다.
  즉 신유나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마치 다른 은사 받은 사람보다 더 영력이 강한 것처럼 되었고, 그 결과 자기가 받은 은사의 종류에 따라 열등의식 혹은 우월감을 가지게 되면서 교회 내에 위화감을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무슨 신유와 방언의 쇼 무대가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시며 오직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지체된 교인들이 신유와 방언의 은사를 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키고 교회를 통하여 그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에 사용되도록 기도하기를 더욱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2018년 상반기 ‘태신자 갖기 운동’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불신가족, 불신친구, 불신이웃들 앞에서 바로 이런 ‘성령충만’의 두 가지 증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자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는 진실한 신앙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 경향교회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먼저 대접하는 행복한 공동체라는 사실 – 이 개인적 성령충만과 공적 성령충만을 온 세상 앞에 자랑스럽게 증거하는 것이 곧 전도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과 ‘교회 중심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성령충만의 역사라는 사실을 각자의 심령 속에서 강하게 체험하고 우리 경향공동체 안에서 서로 뜨겁게 나누는 가운데 이 ‘성령충만’의 확실한 증거를 땅끝까지 소리 높여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2장 1-31절 / 석기현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