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1-28 “이 봉사의 직무로 증거를 삼아” 고린도후서 9장 1-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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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1-28
2018′경향의 강단(5) (2018년 1월 28일 / 주일 대예배)
“이 봉사의 직무로 증거를 삼아” 고린도후서 9장 1-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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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봉사의 직무로 증거를 삼아"

고린도후서 9장 1-15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어느 한인교회의 목사님께서 “오늘 주일의 설교는 절대로 헌금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일 년에 꼭 한 번은 헌금 설교를 하지만 오늘 설교는 아닙니다.”라고 강조하시면서 설교를 시작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날 설교의 본문에 헌금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교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미리 그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냥 준비해 온 대로만 설교를 하셨어도 교인들은 그 설교의 주제가 ‘헌금’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연히 깨닫게 되었을 텐데, 굳이 그렇게 변명 비슷한 사족을 설교 전에 미리 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염려하셨던 대로 ‘헌금’이란 신앙생활의 요소들 가운데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에게조차 잘못 인식되어 있거나 때로는 쉽게 시험거리까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강단에서도 제일 꺼리는 설교주제가 되고, 교회 안에서도 가능하면 피차 언급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금기사항’(taboo)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헌금을 두고 그렇게 ‘쉬쉬’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신자의 헌금생활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정도가 아니라 곳곳에서 가르치며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는 것을 목사가 ‘언급을 회피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결코 참된 ‘대언자’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교인이 ‘듣기 싫어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미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일 밤예배 후에 ‘예결산 공동의회’로 모여 2017년을 풍성하게 결산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또한 2018년에 더 힘써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충성할 것을 서원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결의된 새해의 경상비 예산도 넉넉히 채울 수 있도록 성도가 어떤 자세로 이 ‘헌금 봉사의 직무’를 감당해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헌금은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시행해야 할 ‘자랑스러운 직무’입니다.

  1절부터 5절에 “1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성도를 위해 연보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를 위시하여 “마게도냐”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특별구제헌금을 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던 까닭에 물질적으로는 이방 지역의 초대교회들보다 오히려 훨씬 약한 형편이었습니다.

  ‘아가야’란 로마의 행정적 속주의 이름으로서 고린도시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말은 일 년 전에 헌금이 완전히 모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때부터 이 헌금 준비를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 헌금의 성격이 매주일에 드린 정기헌금과는 달리 따로 작정하고 드린 일종의 ‘특별서원헌금’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를 마게도냐 지역의 교인들 앞에서 “자랑”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을 “분발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교회에서 그 특별구제헌금을 시작한 것이 헬라 지방의 다른 교회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 교회들에 속한 많은 성도들도 함께 참여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이란 말은 사도 바울이 디도와 몇 사람을 먼저 고린도교회에 보낸 것을 말합니다.
  그 목적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바울이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정해 놓고 일 년 전부터 시작한 헌금이 원래 정해 놓았던 기간 내에 시행되지 못하면 다른 마게도냐의 성도들 앞에서 자랑은커녕 오히려 “부끄러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성도들이 작정했던 헌금을 약속대로 바치도록 권면하는 것이 바울로서는 그들의 헌금이 “참 연보답게” 되도록 만드는 사도로서의 당연한 의무요 책임이었지 결코 “억지”로 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헌금을 다른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우리의 자랑”이라고 공공연히 선언할 정도로 정말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여기서의 ‘자랑’이란 결코 어떤 사람을 내세우거나 높이기 위한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성도들도 영적 자극을 받고 선한 일에 함께 참여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분발시키는’ 아주 선한 자랑이었습니다.

  재벌이나 유명인사들이 무슨 자선사업을 위해 거액의 기부금을 내면 언론을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집니다.
  하지만 그런 보도가 무슨 한 개인을 높이기 위한 속 보이는 자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미담을 들음으로써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저런 좋은 일도 하는구나.’ 하고 같이 흐뭇해하기도 하며, 또한 다른 부자들이 자극을 받아 그들도 기부금을 내게 되기도 합니다.

  신자가 교회 앞에서 헌금생활을 공적으로 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성도들이 헌금 드린 제목들을 위하여 예배 중에 함께 기도하기도 하며, 다른 교회나 성도들이 보내 준 헌금 내용을 공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을 높이기 위한 자랑이 아니라 여러 성도들이 함께 격려와 힘을 얻게 되는 선한 자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답고 선한 일을 쉬쉬하고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공개적 헌금’을 비판하는 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는 성경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인데, 그것은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엉터리 인용입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 보면 그 “오른손이 하는 일”이라는 말씀 바로 앞에 “너는 구제할 때에”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4절에도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제’이지 ‘헌금’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도대체 헌금이 무슨 ‘검은 돈’입니까?
  헌금이 무슨 뇌물이나 부정한 비자금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을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헌금생활이 어딘가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든지, 아니면 헌금 그 자체를 무슨 이상하고 비정상적이고 나쁜 돈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참 연보’는 조금도 쑥스러울 것도, 거북할 것도, 숨길 필요도 없이 항상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야 할 ‘선한 자랑거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작정한 연보를 늘 약속대로 준비하여 바침으로써 다른 교우들까지 분발시키는 이 선한 직무를 자랑스럽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헌금은 본인에게 은혜와 복이 넘치게 되는 ‘즐거운 직무’입니다.

  6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헌금을 가리켜 “심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농사지을 때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철칙이 헌금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 “많이 심는” 것이 어떤 상대적 액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뒤이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고 한 대로, 문제는 헌금 액수가 아니라 그 헌금을 작정하여 바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라는 말씀이 곧 그 ‘마음의 많고 적음’을 가리킵니다.
  즉 “많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헌금 액수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헌금에 들어간 ‘정성의 정도’와 그 헌금을 바치는 ‘즐거움의 정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재정부원은 모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항목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했으니, 누가 얼마만큼 즐거이 내는지는 틀림없이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부자가 낸 많은 헌금’을 제쳐놓으시고 그 대신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의 헌금’을 크게 칭찬하신 것이 그와 똑같은 맥락입니다.
  얼마나 ‘많은 정성’으로 헌금을 작정하며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함께 헌금을 드리고 있는지야말로 헌금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이며, 이것은 헌금을 드리는 본인이 양심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판단하시고 계시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많은 정성과 많은 즐거움으로 심는 자’에게 돌아오는 ‘많이 거둘 것’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 은혜란 구체적으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한” 자가 되며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본인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실 뿐 아니라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구제를 비롯하여 더 크고 많은 선한 일까지 넉넉히 해 낼 수 있는 재물의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 절이 이 사실을 다시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심고자 하는 자에게 ‘심을 씨’를 주신다는 말은 헌금을 바치고자 하는 성도에게 그 헌금을 실행할 수 있는 힘까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라는 말은 그렇게 바친 헌금이 크게 쓰이도록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헌금 드린 본인에게는 “먹을 양식” 즉 헌금을 드리고 나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쓸 것이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 주실 뿐 아니라,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더 큰 복을 갑절로 내려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헌금생활에 따라오는 영육 간의 큰 은혜와 넘치는 복은 결코 목사가 꾸며낸 ‘공수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공언하신 사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틀림없는 약속을 두고서 ‘교인들의 돈을 짜내기 위한 목사의 얄팍한 수법’이라고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목사에게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그 얼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이겠습니까?

  정말이지 헌금은 즐겁게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헌금을 ‘인색하게’ 하거나 ‘억지로’ 하는 교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믿지도 못할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체험하는 성도에게는 틀림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세상의 사회사업 중에도 모를 때는 그저 어려운 줄만 알고 피했었지만 일단 한번 해 보면 ‘아하, 이게 이런 기쁨 때문에 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 맛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불우이웃을 찾아가서 위문품을 나누어 주거나 오지에 가서 무료치료를 해 주는 등의 봉사가 처음에는 귀찮고 거리낌이 들어도 일단 한 번 해 보면 그야말로 가슴 뭉클한 보람을 느끼게 되면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취미생활처럼 되는 것입니다.

  헌금 역시 모를 때에는 그저 힘들게만 보이고 하기 싫게만 여겨지지만 일단 체험해 보면 정말 ‘쉽고도 즐거운 일’인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을 바친다는 자체가 즐거워지는 것’ - 헌금에 인색한 교인들은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원래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즐겁게 드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즉 더 풍성하게 헌금을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더해 주시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도록 넉넉히 채워 주시는 복을 반드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헌금생활에도 역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있습니다.
  인색함과 억지로 하는 자는 그것이 늘 시험거리가 되고 갈수록 더 어려워지게 될 수밖에 없지만, 오직 정성과 즐거움으로 바치면 훨씬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헌금은 하나님께 진실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증거의 직무’입니다.

  11절 이하 15절에 “11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라는 말은 바로 앞 절에서 언급되었던 사실, 즉 헌금생활을 통하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는” 은혜 생활의 부요함을 뜻합니다.
  그런 성도는 계속해서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즉 점점 더 풍성하게 헌금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영육 간의 부요와 풍성함이 넘치는 헌금생활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많은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는 궁극적 유종지미를 거두게 됩니다.

  여기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한다”라는 말은, “그들” 즉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우리” 즉 지금 헌금을 모아서 보내는 이쪽 헬라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어지는 절에서 또다시 설명되었습니다.
  “이 봉사의 직무”
즉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것이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즉 그 교회 성도들을 돕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넘치도록 드리게 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즉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은 궁극적으로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많은 감사를 드리게 만든다는 뜻인 것입니다.

  13절의 말씀도 좀 더 알기 쉽게 의역하자면 ‘너희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가 이 봉사의 직무를 잘 행하는 것이야말로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고 있음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헌금생활을 충성스럽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 곧 그 신자 속에 있는 신앙이 진실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의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라는 말은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런 사랑의 헌금을 전달받으면 당연히 일어나게 될 일들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 역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그 헌금의 결과 하나님께는 많은 감사와 영광이 돌아가고, 신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 참된 신자가 드러나며, 또한 성도들과 교회들 간의 유대와 영적 교통이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사도 바울로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 즉 하나님께서 신자의 헌금생활을 통하여서 이처럼 오묘하고 풍성하게 내려 주시는 은사에 그저 뜨겁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바로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헌금생활’을 통해서도 꼭 수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알 길 없고 물론 판단할 길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일 성수’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기본 신앙은 갖춘 신자임을 알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십일조’를 바치고 있으면 그 신앙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똑똑하고 행실이 바르면 그 자체가 부모에게 영광이 되는 것처럼, 어떤 성도가 진리에 바로 서고 교회봉사에 충성을 다하면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바로 ‘헌금 봉사의 직무’야말로 그 사실, 곧 한 신자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만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성도의 헌금생활은 다른 성도까지 하나님께 더 많은 감사를 드리도록 만드는 ‘일파만파’의 효과까지 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성도들을 볼 때, 목사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얼마나 뜨거운 감사가 절로 터져 나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 때문에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어디선가 구제를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문서전도헌금을 통하여 주보를 받게 된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교비를 받은 선교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원을 받게 된 신학생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을 양(量)이 얼마나 많을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바치는 본인은 자신이 헌금하게 된 것을 두고 감사를 드리고 또한 그 헌금이 선하게 쓰이고 있는 곳에서도 많은 감사들이 드려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헌금은 하나님께 올라가는 감사와 영광을 곳곳에서 배가(倍加) 증폭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사람의 제일 되는 본분’이란 결코 입으로만 외우는 교리문답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받은 부요한 은혜 가운데 많은 감사와 함께 후한 연보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실 큰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플로리다에 소재한 어느 신학교에서 목회학 세미나를 수강하고 있을 때 한 강사 목사님의 새신자 교육 방법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처음 나오는 교인은 먼저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친 후에 어떤 서약서에 서명(signature)을 해야만 정식으로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서약서의 내용은 개인 신앙고백이라든지 기본적인 교회생활 등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나는 십일조 생활을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서약이 있고 매주일 평균 십일조 액수가 얼마나 될 것인지를 써 넣는 난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새신자 서약 양식’의 사본을 직접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처음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에게 십일조생활까지 서약을 시킨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헌금을 열심히 한다는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무슨 강요를 하거나 부담 주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미국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서는 신입교우를 다 떨어뜨리기 십상일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던 교회는 미국 교계에서는 꽤 잘 알려진 신흥 대형교회이며 계속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목사님을 ‘교회 성장학’이란 과목의 강사로 그 신학교에서 초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이지 미국 교인이든지 한국 교인이든지, 그 문화와 관습이 어떻게 다르든지 간에 상관없이, 참된 교회와 제대로 된 신자들은 헌금생활 역시 신실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헌금을 신자의 당연한 ‘봉사의 직무’로 여기면서 즐거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진짜 구원의 확신이 있고 은혜를 받은 신자라면 그 누구나 똑같이 통하는 사실임을 재삼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결코 거북해 하고 감출 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행함으로써 성도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힘을 더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헌금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할 때에는 평생 시험거리가 되지만 정성과 즐거움으로 할 줄 알게 되면 은혜가 갑절로 넘치게 되는 것을 꼭 체험해야 합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은 참된 신자로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감사를 바로 이런 신실한 헌금생활을 통해 더욱 크고 온전하게 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마땅히 바쳐야 했을 헌금에 빠뜨린 것이 있다면 나 자신에게 바로 그만큼 영적 및 물질적 손해가 있었을 것이고, 이 교회를 통하여 이룰 수 있었던 선한 일에도 그만큼 모자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그런 ‘부족함의 악순환’에서 즉시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늘 교회에 힘을 주고 다른 성도를 격려하는 ‘자랑스러운 헌금’, 새로운 은혜와 더 큰 복을 받게 해 주는 ‘정성과 즐거움의 헌금’, 자신이 진정 신행일치의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의 헌금’ - 이처럼 귀중하고 복스럽고 아름다운 헌금의 직무를 새해에는 더욱 신실하고 온전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