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8-01-07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자” 잠언 1장 20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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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8-01-07
2018′경향의 강단(2)(2018년 1월 7일 / 신년주일 대예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자” 잠언 1장 20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1월 7일(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307)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자"

잠언 1장 20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알래스카는 캐나다를 사이에 두고 미국의 본토와 떨어져 있는 북극 지방의 주로서 대한민국 영토의 15배나 되는 광대한 땅인데, 원래는 구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67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월리엄 슈어드가 러시아와 협상하여 그 땅을 720만 달러, 지금의 한화로 약 2조 원 가량을 지불하고 매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여론은 얼음밖에 없는 땅을 왜 사느냐고 반대가 빗발치면서 알래스카를 두고 “슈어드의 아이스박스”, “북극곰 정원”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당시의 한 역사가는 그 결정을 두고 ‘국가의 부담만 더 가중시키고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얼어붙은 황무지를 사들였다.’고 비난하면서, “금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 그 조약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저지른 악행’이라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래스카 매입은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벌어졌을 때 국가안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전진기지가 된 것은 제쳐놓고라도, 그 땅에 묻혀 있던 석유, 석탄, 금, 철 등의 지하자원만 해도 구입비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로 ‘금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이라고 했던 비난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알래스카에는 문자 그대로 ‘감추어진 보화’가 넘쳐났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도 그처럼 ‘감추어진 보배’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이 성경을 두고 자기 인생에 아무 실제적인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흘려버리지만, 참된 기독신자들은 이 성경 속에서 그야말로 ‘금보다 더 귀한 보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성경이 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꼭 사야 하는 ‘귀중한 진주’요 ‘밭에 감추어진 보배’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신년주일에 저는 왜 성경 말씀이 올해에도 변함없이 이 경향교회와 경향의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배가 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 말씀은 불신세상의 잡음을 뚫고 우리 귀에까지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1장 20절부터 23절에 기록하기를 “20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22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20절은 “지혜”를 의인화시키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외치는 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르며”, “소리를 높이며”, “소리를 지르며”, “소리를 발하여”라고 반복되는 말씀이 그런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혜의 여인’은 왜 그리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 지혜가 선포되고 있는 장소가 온갖 잡음들로 아주 시끄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20절과 21절을 다시 보시면 그 지혜는 “길거리”“광장”에서 소리를 높인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공공장소입니다.
  “성문 어귀와 성문”은 요즘으로 치자면 시장이나 대도시 한복판 같은 곳이며, 이런 곳은 “시끄러운 길목”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말소리부터 시작해서 우마차의 통행, 호객 행위, 싸움, 정치적 토론 등등 온갖 소음이 연이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즉 그런 장소들은 웬만한 소리로 말해서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럽고 떠들썩한 잡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혜’는 그런 세상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묻혀 버리지 않기 위해서 더욱 ‘소리를 높이며 크게 외침’으로써 저 “어리석은 자들”“거만한 자들”“미련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리가 꼭 들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 지혜가 외치는 소리의 내용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완전타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다 잘못된 길로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서 그 길에서 돌아서야만 합니다.
  23절 하반절에서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 것은, 그런 말씀의 계시는 곧 ‘성령 강림’과 함께 주어지고 있으며, 오직 ‘성령 충만’한 사람만 그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달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슨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밝히 드러난 계시’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범인(凡人)은 알아 볼 수 없는 ‘비밀코드’로 된 책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기만 하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간단하고도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는 ‘뚜렷한 소리’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뜻을 알게 해 주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귀에 들리고 있다는 자체가 그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이 소중한 계시를 방해하는 ‘잡음’들이 아주 많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했던 구약 시대 때부터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종교들은 적대적이고도 이단적인 소리로써 이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막으려 했습니다.
  중세의 천년을 지나오는 동안에는 천주교가 아예 이 성경책을 평신도들의 손에서 빼앗아 버리는 원천봉쇄 작전을 펼쳤습니다.
  소위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하나님 소리보다 사람의 소리를 더 지혜롭게 여기는 인본주의의 방해전파가 아주 강력하게 사람들의 심령을 교란시켜 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물질을 최고로 높이는 공산주의의 무신론적 유물론은 바로 이 순간에도 오직 성경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지하교회의 성도들을 무섭게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의 계시,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신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결코 막히거나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 온갖 매스미디어가 폭주하는 현대사회의 ‘길거리’와 찬란한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성문과 광장’ 곳곳에서 그 시끄러운 헛소리들과 잡다한 사상들을 뚫고서 택자의 귀에까지 들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 ‘계시 선포’입니까?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전달된 말씀이 어디서 막히고 있습니까?
  바로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의 마음 문에서 그 소리가 그만 막히고 맙니다.
  계시의 시발점은 하나님이며 그 종착점은 사람의 마음인데, 바로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돌아보지 않는’ 자, 그 교훈과 책망을 ‘멸시하며 받지 않는’ 사람의 악한 마음이 그 마지막 단계에서 그토록 귀중한 계시의 전달을 그만 끊어버리는 것은 실로 “거만을 기뻐하는” 교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경향교회를 통해서는 여전히 이 ‘성경의 계시’가 매주일 선포되고 있다는 자체가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 경향 성도들이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를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온갖 불신앙적인 잡음들을 뚫고서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야말로 모든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임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 말씀은 죄를 떠나고 심판을 면할 기회를 제공하는 ‘은혜로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1장 24절부터 33절에 “24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31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32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33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그처럼 은혜롭게 계시된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지혜)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끝까지 자기 귀를 막는 고집불통의 인생들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내가 손을 폈으나”라는 표현은 어찌하든지 죄인을 불러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비로운 초청이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교훈의 말씀을 “멸시하며” 즉 무시하며, 그 “책망을 받지 아니하며” 즉 그처럼 자신의 죄를 일깨워 회개시키려는 선한 의도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결국 “재앙”“두려움”“광풍”“폭풍”같이 이르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때가 닥치게 되면 상황은 그 이전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 전까지는 ‘손까지 펼치면서’까지 지혜의 말씀으로 불러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무리 간절히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실 것이고 설사 “부지런히 찾아도” 절대로 “만나” 주지 않으십니다.
  즉 그 “지식을 미워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자들이 끝내 하나님의 저주를 당해 멸망하는 자리에 가게 되면, 그때서야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면서 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 말씀에 대하여 ‘뒷북을 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26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바로 “내가 비웃으리라”고 하시는 대로, 그런 자들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반응은 이전처럼 ‘손을 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조소’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참 그 얼마나 싸늘한 냉소이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도 얼굴을 확 바꾸시고, 그처럼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당신의 계시를 받지 않고 그저 “자기 꾀”에만 배불러 있던 자들, 당신의 책망을 “업신여기는” 교만과 “미련한 자의 안일”에만 빠져 살던 자들은 반드시 “죽이며” “멸망시키고”야 맙니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 즉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은혜의 시기에 그 말씀을 받아들인 자만이 그런 영원한 저주에 빠지지 아니하고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한” 생을 영원토록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란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정한 때’ 즉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그 ‘제때’에 제대로 찾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도 쉰 두 번의 주일마다 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겠지만, 바로 오늘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주일이 될 사람이 이 자리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구 담당 교역자들이 매주일 여러분에게 전화를 걸거나 심방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권면하겠지만, 그런 초청을 올해 말까지 계속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3월이 되면 ‘제네바신대원 평생교육원’이 개강을 하겠지만, 어쩌면 이번 학기가 여러분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금년에도 상반기와 하반기에 걸쳐 두 차례 ‘태신자 갖기 운동’을 하겠지만, 여러분의 불신 가족이나 이웃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는 상반기 한 차례로 끝나고 말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처럼 ‘은혜 받을 만한 때’가 계속되고 있을 때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때에 ‘말씀의 교훈’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자의 퇴보’만 악화될 뿐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업신여기면서 회개를 미루는 자는 그 ‘미련한 안일’로써 ‘자기를 스스로 멸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바로 이 시간을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처럼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서’ 나 같은 죄인을 간절히 불러 주시는 음성을 꼭 들어야만 합니다.
  ‘성경 말씀’은 진정 고마운 복음인 동시에 또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음을 늘 명심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웃으실’ 그 날이 아직까지는 연기되고 있을 동안에 이 ‘교훈과 책망’을 통해 늘 자신부터 회개하고 또한 부지런히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경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드는 ‘인생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2장 1절 이하 5절에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앞의 1장 후반부와는 달리, 지혜의 초청을 잘 받아들이는 신자가 소유하게 되는 최고의 보배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과 계명을 “받으며” “간직한다”는 말은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기본자세가 되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 2절에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마음을 명철에 둔다”고 한 것은, 말씀을 배우는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마음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3절에서 지식과 명철을 “불러 구하며” “얻으려고 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주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지혜의 초청을 전심으로 받는 성도는 그 단계에서도 끝나지 않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4절에 있는 대로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게” 됩니다.
  광부는 극히 적은 양의 귀금속,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작은 보석을 캐내기 위해 땅을 파고 많은 양의 암석과 흙덩이를 잘게 부수면서 샅샅이 뒤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처럼 성도는 말씀의 보배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쁨과 소망 때문에 그야말로 전력을 다 동원해서 성경말씀 배우기에 진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진실하고도 열정적으로, 그리고 전심전력을 다 동원하여 지혜를 추구하고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성도가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최종산물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곧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처럼 지혜를 얻으려고 그토록 애쓰고 노력했으면 그 결과로는 당연히 지혜가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5절의 말씀은 ‘그 누구보다도 똑똑한 사람이 된다.’라든지 ‘세상에서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현자가 된다.’라든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학위를 얻게 된다.’라는 따위의 말이 나와야 문맥이 맞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지혜’가 아니라 ‘여호와 경외하는 신앙과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교제하는 관계’를 얻게 된다고, 좀 엉뚱해 보이는 대답을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의문은 바로 잠언 1장 7절의 저 유명한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면 단박 풀리게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이것이 곧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의 근본이며 최고 차원이며 참된 정의인 까닭에, 그 지혜를 구하며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자연히 여호와 경외라는 바로 그 최고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게 됨을 뜻하는 것이며, 그런 영적 교제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외의 신앙’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는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최고의 보배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이 그저 성경지식만 더 늘어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욱 경외하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참 신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공과 준비를 열심히 할 때 그저 분반공부 시간에 자기 반 학생들에게 가르칠 재료만 많아져서는 안 됩니다.
  교사인 자신부터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심령이 더욱 새로워지고, 그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자기가 맡고 있는 귀중한 영혼 한 명 한 명을 계수할 날이 올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더욱 뜨거운 눈물로써 기도하며 바른 ‘신앙의 롤모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구역장들이 수요예배 후에 구역성경공부 준비를 할 때 남보다 교리에 대해서 좀 더 박식해지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자기가 먼저 배운 성경 말씀 때문에 우선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을 더 많이 두려워하게 되어야 하며,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앞에서 자기가 맡았던 구역원 가운데 빠지게 될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심방하고 권면하는 ‘생명의 청지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만이 이처럼 피조물이요 죄인에 불과했던 사람으로 하여금 사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전인격자’로 만들어 줍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으며, 오직 ‘멸망하는 짐승’이요 ‘마귀의 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고의 귀중한 지혜’를 알려 주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그 인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며 그 삶이 ‘신행일치의 열매’로 가득 차게 되는 이 가장 귀한 보배를 꼭 체험하고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018년 새해에도 불신세상의 미련하고도 악한 잡음들을 잠재우는 하나님의 크고도 뚜렷한 자기 계시가 바로 이 경향교회의 강단을 통해 크게 선포될 것입니다.
  아직 잠시 동안의 평화시대가 지속되는 한 이 복음의 교훈을 마음껏 배우고 그 책망을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이었던 자가 중생을 받고 끝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로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가까이 사귀고 더 바르게 경외함으로써, 세상의 그 어떤 현자나 학자와는 필적도 안 될 최고로 깊고 높은 지식을 소유한 진짜 지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원지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가장 반가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부모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방송이 유원지의 온갖 놀이기계 소리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뚫고 자신의 귀에 들리게 되는 일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처럼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 주시는 실로 고맙기 짝이 없는 계시입니다.
  죄수에게 있어서 제일 기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대통령의 특사가 내려서 오늘 당장 형무소에서 나갈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와 똑같이 아직은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기회가 있음을 알려 주는 최고의 복음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학수고대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좋은 양부모가 자기를 입양해서 양아들, 양딸로 데려가 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바로 그처럼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고 있던 자의 심령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교제하며 끝내 그 분의 양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인생 최고의 보배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잠언 기자는 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를 ‘은을 구하는 것같이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구약 66권의 성경이야말로 우리 경향교회가 확실히 보유하고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이 아니겠습니까?
  이 성경책을 각자 자신의 손에 들고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히고 있는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를 이미 소유한 행복자가 아니겠습니까?
  새해에도 ‘시끄러운 길목’의 잡음을 뚫고 우리의 귀에까지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오직 ‘은혜 받을 만한 기회’ 동안만 주어지고 있는 ‘구원의 복음’, 원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신전인격자’로 돌아오게 해 주는 이 ‘지혜의 말씀’을 늘 ‘은을 구하는’ 것처럼 찾고 ‘감추어진 보배’처럼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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