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예배 2018-01-01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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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8-01-01
2018′경향의 강단(1)(2017년 12월 31일 / 송구영신예배)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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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장 1-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언젠가 어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호주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번개가 자주 치기 때문에 산불이 쉽게 일어나는데, 설상가상으로 기후도 건조해서 한 번 불이 나면 아주 넓은 지역이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곳에 아주 많이 자라는 한 종류의 나무는 화재로 인해 나무껍질이 다 타버려도 두 주일 정도만 지나면 그 새까만 껍질을 뚫고 새 순이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생명체 속에 내재된 재생력은 아주 강인한데, 그런 현상은 ‘그루터기’에서도 흔히 나타납니다.
  싹둑 잘려서 밑둥치만 남은 나무이지만 그 옆으로 작은 잎사귀 하나가 달린 가느다란 가지가 새로 돋아나는 것입니다.
  비록 지상에 올라온 부분은 거의 다 잘려 나갔을지라도 아직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뿌리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생명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조 유다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백성들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도 그 땅에 ‘재생의 희망을 살릴 씨앗’, ‘생명의 기운을 보전할 그루터기’는 남겨 두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토록 소중한 ‘씨와 그루터기’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기독신자와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자’야말로 민족을 살리는 ‘거룩한 씨’요 망해 가는 나라를 회생시키는 ‘이 땅의 그루터기’인 것입니다.

  이제 2017년을 보내고 2018년을 맞이하는 이 송구영신의 시간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과연 어떤 신자와 교회가 우리 조국과 전 세계에 생명의 희망을 주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참된 절대주권자’로 경외하는 성도와 교회입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웃시야왕”은 역대하 26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솔로몬왕 이후에 남조 유다 왕국을 다스린 왕들 중에서는 최고의 성군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은 정말 모처럼 만나게 되었던 그런 유능하고 훌륭한 왕이 죽게 됨으로써 유다 백성들이 실의와 슬픔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 “웃시야왕이 죽던 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높이 들린 보좌’는 바로 세상의 그 어떤 왕도 앉을 수 없는 가장 높은 보좌이므로 거기에 앉으신 하나님은 두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은 이어지는 묘사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스랍”이란 ‘특별한 천사’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섰다”고 한 대로 그들의 직분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자세로 섬기고 있음을 가리키며,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아다니고 있었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즉시 수행하기 위하여 완전무결한 준비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고 한 것은 그 스랍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온 정성과 힘을 다 쏟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스랍들에 관한 이런 일련의 묘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로부터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주권자 되심을 극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을 반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와 같은 ‘3회 반복’의 표현은 ‘최상급’을 뜻하는 것으로서, 곧 ‘최고로 지극히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사람의 본성과 극단적인 차이가 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신 거룩성’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훌륭한 군주라 해도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이 세상 역사에서 수많은 통치자들이 등극했다가 물러나는 와중에서 오직 각 나라와 민족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홀로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원한 절대주권자를 뵙고 있었습니다.

  조국과 세계에 생명의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부터 온 인류에 대해서까지 유일무이한 통치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여전히 ‘웃시야왕’만 높이고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한 씨’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절대주권자로 모시면서 두려워할 줄 모르고, 세상 권력자들의 뒤만 따라다니며 아부하는 어용교회는 절대로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와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세계의 최고 통치자이시며 지극히 높임을 받으셔야 마땅한 ‘왕 중의 왕’인 줄로 알고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그 어느 성군이나 훌륭한 대통령도 결코 베풀어 줄 수 없는 최상의 선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국의 안보와 민족의 생존을 지켜 주시도록 그 하나님만을 금세와 내세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절대주권자로 경외하는 ‘신전인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장망성 백성과 달리 먼저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을 소유한 성도와 교회입니다.

  5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서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절실히 자각하게 된 이유는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자기를 비교해 볼 때에 그 차이가 너무나도 극단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처럼 더러운 죄인에 불과한 사람이 그처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을 본 이사야는 곧바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두려움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의 이사야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심각한 문제,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 극단적인 차이점이 어떤 식으로든지 선결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곧 이어지는 6절 이하에서 바로 그 ‘문제 해결’이 즉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랍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불꽃이 “핀 숯”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그의 “악이 제하여졌고” 그의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선언해 주었습니다.
  즉 조금 전까지 이사야로 하여금 그처럼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의 ‘부정함’을 순식간에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사야 쪽에서 먼저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사야가 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된 순간 그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거룩하심 앞에 압도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저 ‘화로다 나여’라고 두려워했을 뿐인데,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그런 놀라운 사죄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호랑이를 실제로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호랑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그저 자기가 아는 것만 가지고 별의별 소리를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호랑이를 자기 눈앞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진정 하나님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만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신은 이러이러해야 이치에 맞고 저러저러해야 사람이 믿고 의지할 만할 것이다.’라고 온갖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게 된 사람은 그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결정적인 약점 즉 자신은 그저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함을 즉시 깨닫게 되고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도 고마운 일은 그처럼 우리의 입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두려움에 찬 탄식이 터져 나오기만 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기가 막히는 사죄 선포가 즉시 따라온다는 사실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물밖에 있는 사람이 도움의 손을 내밀든지 구명줄을 던지든지 해야지, 자기도 같이 빠져 죽어가는 처지에 있으면서 남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장망성에 남아 있는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조국과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다수의 ‘부정한 백성’이 아니라 오직 소수의 ‘의인 십인’이며, 세계 선교를 책임질 수 있는 사명인은 본인부터가 먼저 ‘죄 사함 받은 구원인’이어야 함을 깨닫는 가운데,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실로 ‘죄인 중의 괴수’에 불과함을 겸손히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은혜를 늘 뜨겁게 간직하는 ‘구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도 끝까지 ‘전도의 사명에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와 교회입니다.

  8절 이하 13절 상반절에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a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사야에게 당신의 존귀한 영광을 보여 주고 또한 그의 죄를 정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그를 소명하셨습니다.
  그러니 방금 그처럼 지극히 높으신 절대주권자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아 감사 감격하고 있던 이사야는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처럼 전도자의 사명을 받들어 나아가려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9절과 10절에 기록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만드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사야를 통해 선포될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할 때에 백성들이 나타낼 일반적인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미리 일러 주시면서, 나중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될 때 이사야로 하여금 그 백성들의 불순종을 책망할 말까지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이사야 선지자가 아무리 열심히 전도해도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함으로써 자기네의 영혼과 육신이 살게 되는 일이 마치 무슨 큰 재앙이나 될 것처럼 여기면서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예고를 듣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어이가 없어서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즉 ‘하나님, 그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되겠습니까?
 ’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서는 더욱 기가 막히게도, 유다의 “성읍” “토지” “황폐”하게 되어 “주민”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사람들” “멀리 옮겨” 버리셔서 그 땅이 완전히 “황폐한 곳”이 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현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나중에 실제로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먼 이국 땅으로 잡혀 가면서 그야말로 “십분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 역시 완전히 “황폐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와 교회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전도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항상 냉소적이며 적대적입니다.
  즉 그런 거부반응은 무슨 ‘이상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소명을 받은 전도자는 그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만이 내 가족을, 내 이웃을, 내 민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전도만이 전 세계에 아직 산재해 있는 ‘십사만사천인의 남은 자’들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이 나라에 불안만 가중되고 온 세상이 요동을 치더라도 아직 ‘잠시 동안의 평화’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장시켜 주시는 ‘전도의 기회’인 줄로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해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의 재림이 더 가까워진 것만은 분명함을 명심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을 조국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해 충성을 다해 선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함께 완성해 가는 ‘사명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3절 하반절에 “13b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사명을 수행할 때에 끝까지 잊지 않고 굳게 붙잡아야 할 소망이었습니다.
  비록 현실은 그의 조국 유다가 성군을 잃고 실로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거룩한 씨’는 결코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것이었습니다.
  비록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성읍과 주민이 황폐해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의 사명을 꿋꿋이 수행해 나가면 선민의 역사가 계속 이어질 ‘그루터기’는 보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설마’ 하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피부에 와 닿는’ 위기 상태입니다.
  세계적으로도 불안과 긴장은 갈수록 고조되고, 중동의 화약고는 항상 폭발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새해에 어떤 소망을 찾기란 일견 아주 어려워 보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신실한 기독신자와 참된 교회만이 조국과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부터가 ‘거룩한 씨’로 뿌려져야 이 민족에게 소생의 길이 열려 있으며, 우리 경향교회부터가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어야만 땅끝까지 ‘예수 생명의 기운’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군왕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께 모든 미래를 의지하고, 장망성의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서 나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아무리 현실은 실망스러워도 아직 연장되고 있는 평화시대에 오직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비록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조국과 열방과 민족과 섬들에 끝까지 생명의 희망을 주는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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