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2-3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4장 4-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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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2-31 연종주일
2017′경향의 강단(56)(2017년 12월 31일 / 주일대예배)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4장 4-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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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4장 4-1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과목의 특성상 매 강의시간마다 학생들은 제가 전 시간에 내어준 과제물이나 설교원고를 준비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그 숙제를 하지 않고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제가 출석을 부를 때부터 그 학생에게서 뭔가 긴장감 혹은 불안감 등을 느끼게 됩니다.
  평소와는 달리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든지, 출석 호명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표가 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생은 일단 숙제는 다 해야 교수를 떳떳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에도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제대로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오직 극도의 두려움에 떨면서 만나게 되지만, 반면에 후자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이 그 하나님을 뵙게 되는 순간 최고의 기쁨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하나님 만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이 준비에 있어서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실패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거울과 교훈’이 됩니다.
  이제 주님 재림의 날이 한 해 더 가까워진 오늘 연종주일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성도가 각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마지막 날을 과연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세계의 종교계에 ‘인본주의적 범신론’이 주류를 이루어가는 중에도 ‘여호와 유일신앙’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본문 4절과 5절에 “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그런 식으로 죄에 죄를 더하기만 하면서 살면 어떻게 되나 한번 두고 보아라.’는 조소적 경고입니다.
  ‘벧엘’은 ‘길갈’과 마찬가지로 북조 이스라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아주 유서 깊은 도시로서, 곧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던 중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유명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벧엘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야곱에게 재확인해 주셨고 야곱은 거기에다 돌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요단강 건너편에서 제일 먼저 발을 내디뎠던 장소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거기에다 ‘열두 돌의 기념탑’을 쌓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공략하기 이전에 바로 거기서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켰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모스가 기록될 당시 그 두 성읍들은 그처럼 뜻깊은 역사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반대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왕이 북조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남조 유다의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로 여기에다 금송아지 우상과 그 제단을 만들어 놓고 자기네 나라의 종교 중심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도 각종 제사들은 부지런히 드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라고 핀잔조로 하시는 말씀이 그런 헛된 종교 생활을 가리킵니다.
  “희생”은 원래 이스라엘 성년 남자가 ‘일 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와 드리게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아침마다” 부지런히 벧엘의 금송아지 제단에 드려 보라고 조소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란 신명기 14장 28절에 기록되어 있는 특별 십일조를 가리키는 것인데, 매 삼년에 한 번씩 드렸으며 레위인의 생활비로 쓰였던 일반 십일조와는 달리 백성을 위한 구제 사업에 쓰였습니다.
  그처럼 삼년에 한 번씩 드리던 십일조를 “삼일마다” 한 번씩 드려 보라고 하나님께서는 또 비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수은제”란 ‘감사제’를 가리키는데 “낙헌제”와 같이 둘 다 ‘화목제’의 일종이었습니다.
  “누룩 넣은 것” 즉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빵은 ‘소제’에는 쓰지 못하지만 ‘화목제’에는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목제들을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이 그런 제사들을 크게 자랑하면서 부지런히 바쳐 보아라.’고 또 한 번 비웃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처럼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조 유다 백성들보다도 더 열심히, 더 자주 제사를 드리려 해도 하나님께서는 코웃음만 치시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 제사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에게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에게 예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는 헛수고였으며, 아니 열심히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며... 죄를 더하는” 행위가 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상숭배를 두고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즉 ‘그런 제사는 순전히 너희들 스스로 좋을 대로, 제멋대로 하는 짓이다.’라고 정곡을 찌르셨던 것입니다.
  금송아지 숭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따르는 종교가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스스로 좋다고 판단되는 대로 만들고 행했던 종교였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왕은 북조 이스라엘의 국교를 금송아지 숭배로 바꾸면서도 제사장 제도나 예배 형식은 남조 유다의 것과 똑같이 모방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나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나 둘 다 똑같은 종교’라고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그처럼 여로보암은 우상 종교를 가지고 자기 나라 백성의 정치적 단결을 꾀하는 데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금송아지 숭배는 결코 참된 신앙 행위가 아니라 오직 ‘범죄’일 따름이었습니다.
  즉 북조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최악의 배교 행위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아무 종교나 믿는다고 다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믿기만 하면 아무 신도 믿지 않는 무종교나 무신론자보다는 그래도 좀 더 낫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명색은 신을 섬긴다고 해도 실상 그런 종교 행위는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는 오히려 적대행위이며 최악의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범신론’의 근간에 있는 것이 곧 ‘인본주의’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성을 사람이 자기 기분에 맞도록 정의해 버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이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바꾸어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과 역사를 사람이 자기 소원 성취와 일치하도록 판단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사람이 자기 편리에 따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실상은 무슨 신이든지 간에 오로지 ‘사람의 종’으로 써먹으려 하는 종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본주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계의 전 세계적인 추세는 바로 이런 ‘인본주의적 범신론’을 중심으로 소위 ‘종교일치 운동’이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선두에 있는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 및 여기에 동조하는 기타 우상종교 숭배자들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어도 신은 궁극적으로 다 같다.’라는 말로써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제멋대로 수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명백히 명령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해서 ‘다른 종교의 신을 믿어도 결국에는 똑같은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억지는 오직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을 다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4, 5)라고 엄히 경고하시는데, ‘기독교를 전파할 때 각 나라 고유의 전통 종교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라는 원리가 도대체 어떻게 말이나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소위 ‘열린 전도’란 것은 실상은 오직 미신적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모든 민족들을 다 ‘기쁘게’ 해 주려는 얄팍한 계산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범신론적 종교를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야만 금세에서부터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참된 신자를 미혹하는 ‘인본주의적 금송아지 혼합종교’를 조심하면서 끝까지 ‘여호와 유일신앙’만 굳게 붙잡음으로써 이 참 신이신 하나님 앞에 직접 서게 될 날을 예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외식적 기독교인’들이 나날이 팽배하는 가운데서도 ‘회개하는 양심’을 고이 간직해야 합니다.

  6절 이하 11절에 기록하기를 “6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북조 이스라엘에게 이미 내리신 징벌들을 열거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깨끗하게 하며”란 ‘이가 씹을 음식이 없어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기근’으로써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추수하기 석 달 전”의 비란 소위 ‘이른 비’(겨울비)가 내리는 기간인데, 이때 가물게 되면 농작물이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라고 한 대로 그런 가뭄의 징벌은 이스라엘 땅 전체에 내리지는 않았고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기근의 징벌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마지막 심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틀거리며” 아직 물이 있는 “어떤 성읍”들을 찾아다니면서도, 그 경고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이란 ‘열풍’을 가리키며, “깜부기재앙”은 이삭이 까맣게 말라 죽는 소위 ‘흑수병’을 가리킵니다.
  “팥중이”란 큰 메뚜기 떼인데, 이것이 몰려오면 한 지역의 농작물 전체를 깡그리 먹어 치우는 큰 재앙이 됩니다.
  즉 부분적인 기근의 경고를 내려도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깨닫지 못하자, 이제는 그 징벌의 정도와 범위가 점점 더 세어졌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온 것이 “전염병”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옛날 출애굽 시절에 “애굽에서 한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똑같이 내리셨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아가면서, 북조 이스라엘은 아람의 침략을 당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재인 “청년들”이 죽임을 당하고 국방력의 대표적 자산인 “말들”이 노략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3:7).
  또한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뜨림” 같이 파괴를 당하도록 하셨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북조 이스라엘의 웃시야왕 시대에 지진(암 1:1)으로 일어났던 재앙이었습니다.
  완전히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와는 달리 그래도 북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처럼 마지막 순간에 건져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의 강도가 점점 더 세어져서 거의 극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타서 재가 되지는 않도록 지금까지 그들을 보존시켜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적어도 과거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런 일들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보고 빨리 회개하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이구나!’라고 알아차려야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재앙들은 과거 애굽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것들과 똑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절에서 11절까지 하나님께서 매 문단마다 “내가 (무엇무엇으로 징벌)하였으나 너희가 네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한탄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신앙생활이란 순전히 ‘겉모습’뿐이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이름,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린다는 형식, 입으로만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쉐마’를 외우는 외식만 남아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속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처럼 여러 방법으로 여러 차례 기회가 주어졌던 하나님의 경고를 끝까지 고집스럽게 무시하는 백성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이 당연했고, 북조 이스라엘은 끝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원래가 ‘경고’라는 것은 사람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군사 시설 지역이나 휴전선의 경계 지역 부근에 있는 “접근하면 발포한다.”라는 경고문은, 접근하는 사람을 쏘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잘못 접근해서 죽지 말라고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행동할 때에는 정말 죽게 되어도 아무 항의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똑같은 무장공비라도 경고 방송을 듣고 스스로 자수한 사람과 끝까지 도망치다가 붙잡힌 사람의 상황은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는 특사를 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영접 받을 수 있지만 후자는 사형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일찍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천당 구원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지만, 나중에 붙잡혀 심판대에 끌려 나오는 자에게는 오직 지옥의 영벌이 내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일찍 제 발로 찾아 나오는 것과 마지막 경고까지 무시하고 난 후에 붙잡혀서 억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불택자는 하나님께서 아예 상관하지도 않으십니다.
  무슨 죄를 짓든지 어차피 지옥에 갈 몸이니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자기 멋대로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하시는 택자가 곁길로 갈 때에는 결코 그렇게 방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육신의 병을, 어떤 때는 가난을, 또는 가정 문제를, 혹은 국난의 재앙까지도 들어서 개인 성도나 혹은 선민 공동체 전체를 깨우쳐 회개시키기 위한 경고로 사용하십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가지고 ‘용서해 주시려는’ 선한 의도에서, 그리고 오직 그 대속의 은혜로써 ‘살려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와 자세를 갖추신 가운데 보내 주시는 실로 고마운 경고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주일예배 출석만 하면 된다.’라든지 ‘십일조만 바쳐라.’라든지 ‘등록교인 이름만 유지해라.’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엄중히 선포하십니다.
  왜냐하면 ‘겉모습’만 기독교인 행세를 하면서 그 ‘속사람의 회개’가 없는 교인은 ‘외식적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완벽했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자기 딴에는 구원을 받을 줄 알고 있다가 ‘바깥 어두운 데’에 던짐을 당하게 되면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교인들이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라는 외형적 공동체 안에는 들어와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참된 회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껍데기 기독신자’들이 바로 그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택한 백성을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매를 드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살리시기 위하여 징계까지도 망설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의 말씀이 들릴 때마다 즉시 회개하며 그 아버지의 품으로 미리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2절과 13절의 말씀에 “12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13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쪽으로 끝내 ‘돌아오지’ 않으면, 이제 하나님 편에서 무언가 하실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이제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여태껏 보여 주셨던 얼굴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시게 될 때를 두고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편에서 ‘제발 나를 찾아라,’ ‘제발 내게로 돌아오너라.’고 좋은 말로 아무리 아무리 말씀하셔도 끝까지 듣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실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법정 소송으로 가는 일들이 자주 있는데, 그런 경우에 흔히 듣게 되는 용어가 ‘소환장’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로 만나 대화로 해결하고 싶은데도 상대가 응해 주지 않을 때, 혹은 검사가 어떤 사람을 꼭 증인으로 부르고 싶은데도 응해 주지 않을 때 이것을 발부하게 됩니다.
  비슷한 것으로 ‘체포 영장’도 있습니다.
  형사가 어떤 용의자를 불러서 심문을 하려 해도 상대방이 거부하면 판사를 통해 이 체포 영장을 받아서 그 사람을 강제로 붙잡아 옵니다.
  이처럼 좋은 말로 해결하려 해도 상대방이 만나 주려 하지 않을 때에 소환장이나 체포 영장이 동원되며, 일단 이것이 발부되면 그 당사자는 좋든지 싫든지 간에 고소인이나 검사를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자진해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편에서 직접 그를 만나려고 호출하시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자도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그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고야 맙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고, 무섭게 벼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때 가서야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신” 진짜 창조주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벌써부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여” 주신, 즉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해 주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그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만든 종교를 가지고 신을 만나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야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때 가서야 “아침을 어둡게 하는” 능력의 하나님,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주권의 하나님을 제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전 인생의 순간순간과 사사건건을 통하여 얼마나 자주 부르셨는지를 기억하면서, 바로 자기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 때 미리 만나지 않았던 바보짓을 뒤늦게야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종을 앞두고 되었을 때 그는 자기 병실을 방문한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목사님, 내 죄가 용서를 받았는지, 그리고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제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것은 우리 자신의 훌륭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공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해 주셨기 때문에 당신은 편히 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평안히 소천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 준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실’ 때에 우리가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오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피할 길 없는 체포 영장을 받고 그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떨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해 주실 때에 그 ‘은혜의 부르심’에 미리 응답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오직 기쁨과 감격만 충만한 가운데 그 주님을 친히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범신론’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여호와 유일신앙’만 붙드는 가운데 호리라도 ‘외식적인 교인’으로 전락되지 말고 늘 ‘진심으로 회개하는 양심’을 지킴으로써, 우리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는’ 그날을 오히려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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