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2-10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마태복음 8장 28절 – 9장 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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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2-10
2017′경향의 강단(52) (2017년 12월 10일 / 주일 대예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마태복음 8장 28절 – 9장 8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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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마태복음 8장 28절 – 9장 8절 / 석기현 담임목사
노벨상 수상작가인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구소련 시절에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힌 정치범들의 하루 일과를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슈호프는 다른 대부분의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년의 형기를 살고 있었는데, 그나마 좋은 반장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용소의 생활이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그야말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가운데서 24명의 죄수들로 구성된 한 작업반을 책임지는 반장의 존재란 아주 절대적이었습니다.
  물론 반장도 같은 죄수이기는 하지만, 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른 반보다 조금이라도 더 쉬운 작업에 배치될 수도 있고, 작업량 사정(査定)에 따라 차등 배급되는 빵을 반 조각이라도 더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슈호프의 반장처럼 ‘유능한 반장’을 만나면 일단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안심해도 무방하지만, ‘무능한 반장’을 만나면 영락없이 ‘나무옷’(관)을 입게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즉 그 강제노동수용소 안에서는 반장 한 사람의 능력이 그 반(班)에 속한 죄수들 전원의 생명과 직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화육강세해 주신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점에 있어서 정말 믿음직하기 짝이 없는 ‘권능의 주님’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능력한 죄인’이며 ‘사망의 저주’ 아래 속박된 자들을 ‘살려’ 주시기 위해 당신의 전능을 동원해 주시는, 실로 고마운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오직 예수님만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놀랍고 위대한 권능이 과연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권능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비천하게 취급받는 사람의 생명까지 마귀로부터 건져내 줍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부터 34절에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이란 갈릴리의 동쪽 해변에 위치한 행정 구역으로서 주로 이방인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지역에서 “돼지 떼”를 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그 주민이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기고 전혀 먹지 않는 유대인이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그 가다라 지방의 한 동네에 이르셨을 때 “귀신들린 자 둘”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한 명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둘 중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사람만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자기네 속에 들어온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귀신들은 두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들의 행동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즉 그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귀신의 힘에 꽉 붙잡혀서 무슨 사람다운 삶이나 모습이란 전혀 없이 그저 “무덤 사이”를 돌아다니는 ‘무시무시한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자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두 사람 속에서 그토록 무적의 권력자처럼 횡포를 부리던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당장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아예 첫 대면에서부터 두 손 번쩍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이 악령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귀도 영계에서 활동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에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따지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압도당한 상태에서 ‘왜 이러십니까?’라고 그 좌절감과 공포심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떨면서 하는 말과 연결해 볼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처럼 마치 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제멋대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압도하고 주장하던 귀신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자 즉시 옴짝달싹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처럼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귀신들은 자기들을 근처에 있던 “돼지 떼”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돼지들이 집단적으로 광란에 빠지면서 순식간에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해” 버렸습니다.
  그 돼지 떼를 “치던 자” 즉 돼지 목동들은 물론 난리가 났고 당장 “시내에” 들어가서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주인을 비롯한 동네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즉 돼지 떼가 몰사하게 된 전말과 동시에 귀신들린 자들이 기적적으로 낫게 된 것까지 정확하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시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4절에 보면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한테 데모하려고 몰려나왔다는 뜻입니다.
  “떠나시기를”이라고 존댓말로 번역되어 있으니까 마치 정중히 요청한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에게 ‘우리 동네에서 당장 꺼지라.’고 압력을 가해 왔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돼지 떼’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귀신들렸다가 나은 두 사람에게 축하를 해 주었다든지 혹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비참하기 짝이 없던, 정말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꼴로 살던 인생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한순간에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왔는데도 그 동네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그 동네에 계속 계시면 자기네의 다른 돼지 떼나 재산에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만 염려했습니다.
  그처럼 인간사회로부터는 한갓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귀신들린 자’를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아낌없이 발동하셔서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건져내 주셨던 것입니다.

  실로 사람은 걸핏하면 다른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기 일쑤입니다.
  같은 반의 급우나 같은 회사의 동료 사이에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가 된다 싶으면 간단히 ‘왕따’를 시킵니다.
  소위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게 되었다는 현대사회 역시 현실적으로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여전히 천한 사람이나 무능력한 사람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 쓰레기’라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눈에는 그처럼 ‘가치 없는 사람’이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한 사람의 목숨을 재물 정도가 아니라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당신의 ‘전능’을 동원하여 실천해 주십니다.
  ‘사람이 돼지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오늘날의 ‘가다라 주민’을 꾸짖으시면서 그처럼 자기 혈육과 이웃으로부터 지극히 천히 여김을 받고 완전히 소외와 멸시를 당하고 있는 ‘잃어버린 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결코 버려두지 않고 당신 홀로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없고 사람으로 칠 가치조차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의 생명조차 결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사탄과 그 부하 마귀들의 권세는 사람에게 여전히 강력하며 파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미혹함으로써 지옥 저주 아래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마귀의 악한 행패 앞에 실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마귀의 힘 앞에는 그 얼마나 약합니까?
  마귀의 꾀는 소리에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가고 마귀가 유혹하는 시험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잘 따라가는지는 굳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들먹일 것도 없이 그저 나 자신의 모습만 솔직히 돌이켜 보아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가 이 인류의 막강한 천적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비로소 이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에 찾아오신 이후부터입니다.
  그 이전이라면 그저 정욕이 이끄는 대로, 욕심이 생기는 대로 따라서 했을 일을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면서’ 이제는 간단히 이겨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종노릇’하던 인생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못난 것, 우리의 연약한 것, 우리의 더러운 것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눈을 찌푸리며 당연히 멸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실로 온 천하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로 인정해 주십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를 그렇게 높여 주지 않았으며, 아니 우리 자신도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귀중한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들, 곧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로 인정해 주시면서 그 우리의 생명을 마귀의 권세로부터 능히 건져내 주시는 우리 예수님의 권능을 더욱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권능은 인생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해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영혼 구원부터 베풀어 줍니다.

  마태복음 9장 1절 이하 8절에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이 사건의 전모가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그 친구들이 둘러메고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집에까지 찾아왔지만 워낙 많은 인파가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서 도저히 들어갈 길이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갔는데, 당시의 집은 지붕이 평평했고 또 집 바깥벽에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붕을 덮는 재료들이 그렇게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를 뜯어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그런 아이디어를 제일 처음에 생각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점에 그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천장에서 중풍병자 한 명이 실린 침상이 내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중풍병자나 그의 친구들로부터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그들이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 무언(無言) 중에도 누구에게나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하고 있다고 자타 공인하던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으므로 예수님의 그런 선언은 “신성을 모독하는” 죄에 직통으로 해당된다고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즉 ‘왜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나를 정죄하느냐?’라고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정말 ‘어느 것이 쉬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습니다.
  서기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장 실제로 ‘기적’을 일으켜야만 하는 병 고침의 선언보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가 필요 없이 그저 ‘립 서비스’만 하면 되는 죄 사함의 선언이 더 쉽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중풍병자로서는 자기한테 그저 ‘일어나 걸어가라.’고 치유를 선언해 주는 말이 훨씬 듣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병을 고치는 것’이나 ‘죄를 사해 주는 것’이나 둘 다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선언을 먼저 해 주신 이유는 곧 이어서 밝히시는 대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the Son of man)라고 칭하신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명칭은 다니엘서에서 ‘심판의 권세 있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장차 심판주로 오실 분이신 까닭에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죄 사함의 권능’ 역시 행사하실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바로 그러한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무리가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치유의 권능’을 베푸심으로써 예수님에게는 ‘죄 사함의 권능’도 있음이 확실히 입증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죄 사함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라는 사실은 바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 죄 사함의 권능이 있으신 ‘성자 하나님’이신 줄은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당신께서 발휘하시는 권능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를 심판하여 영벌지옥에 던지시는 것’에까지 이르게 될 것임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명백히 공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누가복음 5장 15절과 16절에, 사람들이 그런 신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들었을 때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육강세하신 목적이 우리의 육신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그처럼 당신에게 병 고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여 외진 곳으로 ‘물러가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건강이나 돈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실상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한 ‘죄 사함과 구원’부터 베풀어 주시는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날 도와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님, 내 인생 문제는 제가 잘 압니다.
  예수님은 그저 저의 이 병만 고쳐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자세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 무슨 ‘죄 용서’ 따위의 복잡한 말씀은 생략하시고 그저 제가 지금 시작한 사업만 왕창 대박 터지게 해 주시면 제 인생은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요.” - 이런 소원만 성취되기를 바라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잘못 보아도 아주 잘못 보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잡다한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신유의 은혜보다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은 세상의 유능한 의사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죄인을 용서하여 영생을 누리게 해 주시는 권능’은 오직 한 분, 예수님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고마운 권능을 받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일단 예수님을 찾아와서 직접 만나야만 합니다.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꼴들이 영 보기 싫어서 교회 못 나오겠다.”라든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일들이 보기 싫어서 예수를 못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저 ‘예수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무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노력도 하지 않고 그만 발걸음을 미리 돌려 버리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판단이며 옹색한 핑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교인일수록 “이 중풍병자처럼 지붕을 뚫고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직접 한번 만나 뵈어야겠다. 그렇게만 하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틀림없이 다 해결될 것이다.”라는 자세로 나아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전능을 동원해서 도와주십니다.

  찬송 287장의 가사대로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고명한 목사라 할지라도 이것보다 더 간단한 죄 사함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신학서적 몇 십 권을 쓴 학자라 할지라도 그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찬 280장)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온갖 인생의 문제로 인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할 때에 그럴수록 일단 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옴으로써 우리에게 먼저 ‘죄 사함’의 권능을 베풀어 주신 후에 그처럼 일단 ‘영혼이 잘 되는 자’에게 또한 ‘일어나 걸어가라’고 ‘범사의 형통’까지 더해 주시는 은총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서론에서 언급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마지막에 가면 슈호프와 같은 반원인 부이노프스키라는 죄수가 독방으로 끌려가는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전직 해군 중령 출신으로서 죄수들 사이에서도 ‘함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영하 25도의 강추위 속에서 죄수들의 외투와 겉옷을 벗기고 속옷 차림으로 소지품 수색을 하도록 지시한 간수장에게 항의하다가 ‘중영창 열흘’의 처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음집이나 다름없는 독방에서 열흘이나 살고 나면 십중팔구 무서운 폐결핵에 걸려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고 서서히 죽게 된다는 것은 수용소의 죄수라면 다들 알고 있는 상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슈호프의 반장은 그 부이노프스키가 독방에 들어가는 것을 단 하룻밤만이라도 지연시켜 주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고, 결국 ‘함장’은 반원들에게 얼이 빠진 목소리로 “여러분, 잘들 계시오.”라고 마지막 인사를 남긴 후에 저승사자와 같은 간수에게 끌려 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유능한 반장’도 결코 ‘전능한 반장’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인 역시 어디까지나 ‘죄수’에 불과한 반장의 능력이란 ‘간수’나 ‘수용소의 규칙’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 있다 할지라도 사람은 사람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인 이상 본인 역시 오로지 같은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은 다 ‘마귀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고 ‘율법의 저주’ 아래 꼼짝없이 속박되어 있으니 다른 죄인을 도와줄 길이 전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에게는 당신보다 더 힘 있는 ‘권능자’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속박하는 ‘율법의 권위’를 간단하게 압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능히 ‘마귀로부터 건져내’ 주시며 ‘죄와 사망의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 주시는 ‘최강의 구세주’, ‘필적할 상대가 없는 전능자’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역시 ‘이런 권능을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하나님’께 오직 찬양과 감사를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돈만 있으면 다 될 것같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한 백만장자라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육신의 건강만 있으면 만사형통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망의 저주 아래에 있으면 제아무리 건강하게 백세 인생을 장수한다 해도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처럼 무섭고 압도적인 ‘마귀’와 ‘사망’을 능히 이기실 수 있는 ‘권능의 구세주’를 꼭 만나서 그 능력을 힙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성탄의 절기를 통해 바로 이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고 가까이 찾아감으로써 나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마귀로부터 건져 주시고 당신의 보혈로 내 죄를 대속하여 영생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더욱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