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2-03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1-4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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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2-03
2017′경향의 강단(51)(2017년 12월 2일 / 주일 대예배)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1-4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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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1-47절 / 석기현 담임목사
IT 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을 통한 ‘신원확인’을 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휴대폰을 개통할 때부터 시작해서 온라인 상품을 구매할 때라든지 혹은 신용카드를 신청할 때에 반드시 그 신원확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저는 법적으로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 절차에 있어서 곤란을 겪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분명히 합법적으로 국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게다가 대한민국 국민의 주민등록증에 해당되는 외국인등록번호까지 받았는데도, 인터넷으로 신원확인을 시도할 때 ‘확인불가’라는 화면이 자주 뜨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똑같이 겪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은 외국인이 살기에 불편한 것이 아주 많고 심지어 불평등한 것까지 꽤 있는, 즉 외국인에게 차별이 많은 나라에 속합니다.
  외국인이 이 나라 안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신원확인’조차 이렇게 까다롭게 되어 있으니, 다른 문제는 언급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나는 석기현이라는 사람이고 대한민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이며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가장 답답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떠나 세상에 내려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받으셔야 하는 처지였으니 ‘외국인의 신원확인’조차 그처럼 까다로운 이 인간사회에서는 더욱 그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저처럼 그냥 속수무책으로 안타까워하기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을 믿게 만들어야만 그 죄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그 ‘신원’과 또한 그것을 믿을 수 있는 ‘확인 방법’까지 명백하게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누구’로 믿어야만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을 ‘성경에 기록된 성부 하나님의 증언’을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31절부터 39절에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고 하셨지만, 실상 예수님의 말씀 중에 ‘참되지 아니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법적 효력’과 ‘사회적 관례’에 따를 때 그렇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도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 수는 없다.”라고 못 박고 있듯이,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인이 되는 ‘자증’이란 인간사회의 그 어떤 법정에서도 통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라고 하신 것인데, 문제는 이 ‘증언하시는 이’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신 말씀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증인이 그 다음 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진리에 대하여” 즉 ‘내가 곧 진리’(요14:6)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을 했으며, “켜서 비추이는 등불” 즉 당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밝혀 주었던 유일한 선지자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한때” 동안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을” 뿐, 그 증거의 효력은 일시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은 세례요한 자신의 제자들 중 몇 명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해 누구라도 ‘참인 것’으로 믿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주려 하시면서 그것을 세례요한이라는 한 사람에게 의존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34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더욱 명백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하시는 이’는 곧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성자의 자증이 아닌 만큼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같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증거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성자 하나님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습니까?
  36절에 보면,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 즉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증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첫째가 바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게 하시는 역사” 즉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복음사역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아도 그 오묘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예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행적 하나하나가 다 기적보다 더 위대한 사건들로서 예수님이 실로 ‘화육강세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37절에 기록된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린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본질적으로 영이신 성부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의 눈이나 귀로 보고 듣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예수님의 생애도 극소수의 제자들과 일부 동시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직접 체험해 볼 길이 없는 증거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자 예수님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증언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게” 됨으로써만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천명하시는 그대로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46절에서도 유대인들이 “모세를 믿는” 것과 “나를 믿는” 것, “그(모세)의 글을 믿는” 것과 “내 말을 믿는” 것을 동격으로 취급하시면서, 그 이유는 곧 “그(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바로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은 알았지만 그 영생 얻는 방법을 ‘율법 준수’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구약의 진짜 요점인 ‘메시아’를 놓쳐 버렸고 그 결과 예수님을 믿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한’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경의 ‘숲’을 바로 볼 줄 아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고 명백하게 알려 주시는 최고의 ‘증언’인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이 평상시에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증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자기의 결백이나 진실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면서’(as God is my witness) 자신의 양심선언을 증언해 줄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는 분이시며 완전무결하게 진실하신 증인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할 때에는 왜 하나님은 증인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불충분하고 신빙성이 없다고 기각시키고, 그 대신 사람 가운데 무슨 인격자의 체험이나 지식인의 연구나 성인의 수도(修道)가 더 합당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법정에서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 자기 주인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없듯이 열등한 존재가 자기보다 우수한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을 뒷받침해 주는 증인이 될 수는 결코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을 증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친히 ‘증언하시는 성경’ 이것만이 최고의 증거가 될 따름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증언인 동시에, 수십 명의 선지자와 사도들 즉 법이 요구하는 ‘2명 이상의 증인’을 훨씬 초과하는 충분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 어렵다는 사람은 일단 성경부터 제대로 정독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믿음 주옵소서.’ 하고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령께서 감화감동해 주시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없이 확실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53장에서도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가진 성도가 과연 어떻게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가 그 답입니다.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울” 때 “그 말씀 한절 한절이 내 맘에 교훈 되면서” 실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절로, 확실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친히 증언하신’ 참 증거이며 최고의 증거인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40절 이하 47절에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유대인들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증언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끝내 믿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당신이 과연 ‘누구’이신지를 밝히고 계십니다.
  40절을 조금 바꾸어서 번역하면 ‘너희들은 내게 와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아니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곧 ‘영생구원’임을 명백히 선포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구세주로 오시되 그 죄인을 그저 용서하시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영생하시는 실로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처럼 예수님께서 주려 하시는 영생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소원, 아주 유치한 요구들만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공짜 떡을 얻어먹는 재미에, 또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표적’ 따위를 요구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도 그런 맥락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신유나 오병이어 같은 기적만 베풀어 주셨더라면 대중의 인기를 얻기란 아주 간단했겠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속에 없는” 외식자들로부터는 그 어떤 인정이나 칭찬 따위를 받고 싶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끝내 알지도 믿지도 못했던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라는 사실 즉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화육강세하신’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대신하는 자격을 가지고’ 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입고 오셨다는 것도 같은 의미로서 ‘사람의 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성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로서 이 세상까지 찾아오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만 “영접”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나 세속 정치인들이 그러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도 그런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과 37절에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라고 기록된 것이나, 사도행전 11장 21절부터 23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라고 기록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가짜 메시아들의 공통점은 ‘자기 이름으로 와서 스스로를 선전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오로지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만이 목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자들에게 쉽게 미혹당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에게는 그처럼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를 영접하는’ 악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라고, 누구보다도 바로 유대의 교권주의적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자기과시욕에 빠져 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고 선한 사람인 체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영광만 서로 취하기’에 바쁜 나머지 정작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전혀 볼 줄 몰랐던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절대로 틀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짜 떡’을 나누어 주려고 오신 자선사업가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려고 오신 무료시술 의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사회의 정의 구현을 위하여, 혹은 억압당하는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오신 정치적 메시아도 결코 아니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소원성취만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실상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는 너희에게 영생 구원을 주기 위해 온 메시아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을 정면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이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그저 내 자녀 대학에 붙게 해주시고 내 남편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무슨 ‘무당’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정말 제일 주기 어려운 것, 그러면서도 받는 우리에게는 제일 중요한 것을 공짜로 주려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고 너무나 유치한 것들만 예수님에게서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영생구원을 거저 베풀어 주려 하시는데, 그것을 감사히 받을 생각은 전혀 없이 그저 엉뚱한 소원만 남발하는 그런 기복주의 교인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기가 막히시겠습니까?

  이 ‘영생 복음’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고 그 대신 오로지 ‘자기의 이름’을 과시하면서 ‘사람의 영광’만 서로 높이는 종교인들도 정말 많습니다.
  천주교의 교황을 위시한 사제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경건한 체 과시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 대신 자기네들을 ‘신부’(Father)라고 부르게 하고 ‘구세주 예수님’ 대신 자기네들 앞에서 고백성사를 하도록 강요하는 등, 자칭 ‘그리스도의 대리자’ 행세를 합니다.
  불교 역시 무슨 도를 좀 닦았다 하면 고승이니 어쩌고 받들어 모시면서 한번 만나 뵙기 위해서는 먼저 ‘삼천 배’를 해야 한다는 둥, 문자 그대로 ‘사람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종교입니다.
  원래부터가 ‘참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의 영광’만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큰 부동산 소개회사에서는 자기네 회사와 거래한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추첨을 해서 집을 한 채 공짜로 주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회사 대표 한 명이 그 사람을 찾아가서 “당신이 이러이러한 추첨에 당첨되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집 한 채를 공짜로 줍니다, 받으십시오.”라고 집 열쇠를 건네줄 것입니다.
  그때 그를 맞이한 사람이 그 소식을 전해 주는 ‘회사 대표’와 그 ‘행운의 당첨 사실’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사람 놀리지 말고 차라리 지금 내가 매달 내는 집세나 좀 내려주시오.”라고 요구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많은 교인들이 ‘중보자 예수님’과 ‘영생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바로 그와 똑같은 바보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영생구원이라는 실로 엄청난 선물을 그야말로 ‘택배’처럼 친히 전달해 주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구원을 아무 조건 없이 성립시키기 위해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로지 이 예수님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시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유일한 중보자로 끝까지 의지함으로써 그 영생구원의 약속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신원확인’은 오직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가장 정확하고도 충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면서 자신의 신분증명서를 눈앞에 보여 주는데도, 그것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대신 ‘내가 관상을 보니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오.’라고 우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나중에 ‘너희를 고발할 모세의 글’, 바로 성경의 법에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오직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대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성경에 예수님을 가리켜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성경에 예수님이 무슨 ‘박애정신의 실천인’이라는 말이나 무슨 ‘유토피아의 구현자’라는 말이 어디에 단 한마디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을 그처럼 성경에 전혀 없는, 오직 육신의 소욕에 따라 만들어낸 ‘세속적 메시아’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은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멋대로 정의하고 판단하는, 실로 교만의 극치에 달하는 신성모독이 아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이미 ‘성자 하나님’이셨고 성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여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까지 찾아오신 ‘죄인의 중보자’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비범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높임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그 성부의 구속사’를 실현시켜 주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에 대한 자증을 이 신구약 성경 66권 구절구절마다 ‘예언’으로, ‘표상’으로, ‘약속’으로, ‘증거’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즉 성경이야말로 화육강세로부터 십자가 대속과 영광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구세주요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퍼포먼스’처럼 볼 수 있게 해 주는 ‘입체동영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당당한 어조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탄의 절기를 맞이하면서, 이처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에 대해 증언해 주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실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로 저와 여러분을 찾아와 주셨다는 사실을 더욱 굳게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