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1-26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요한복음 5장 19-29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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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1-26
2017′경향의 강단(50)(2017년 11월 26일 / 주일 대예배)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요한복음 5장 19-29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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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요한복음 5장 19-29절 / 석기현 담임목사
피아노 연주회장에 가면 무대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의 옆면에 으레 ‘Steinway & Sons’(스타인웨이 앤드 선즈)라는 상호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원래 독일에서 피아노를 제조하던 ‘슈타인베그’(Steinweg)라는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스타인웨이’라고 바꾼 뒤에 자기 아들들(sons)과 함께 가문의 이름을 걸고 세운 회사입니다.
  그 후로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그야말로 최고급 피아노로서 전설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회장에 비치되어 있는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처럼 ‘부자(父子)의 동업’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떨치게 된 경우는 그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이 부문에 있어서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아버지와 아들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과 성부 하나님의 본질적인 연합에 대하여, 그리고 당신께서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고귀한 권위에 대하여 아주 논리정연하게 공식적으로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과연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 완성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성취해 가심에 있어서 성자 예수님과 어떻게 함께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여러분과 같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19절부터 23절에 기록하기를 “19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의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단순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호칭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네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관계임을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간격을 다 없애 버리시고 그냥 ‘내 아버지’라고 아주 친밀하게 호칭하심으로써 진짜 부자관계임을 지극히 간단명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 즉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그처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는” 선포 그 자체라는 사실을 단박 정확하게 알아들었는데, 그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신성모독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18절).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는 당신의 성자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선 성부와 성자는 그 “하시는 일”이 똑같다고 본문에서 천명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따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이미 보고 알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는 19절 하반절도 바로 그런 맥락으로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여기서 ‘그와 같이 행한다.’는 말은 ‘흉내를 내거나 모방한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일’(the same thing)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부자지간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사랑’으로 연결되며 또한 친밀하게 유지됩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육신이라는 ‘낮고 천한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까지 보내셨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아버지라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성부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하셨습니까?
  그것은 그 성자로 하여금 당신께서 보여 주신 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이 세상에서 친히 행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놀랍게 여기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가 행하시는 것”이란 앞에서 설명했던 예수님의 일반적인 언행을 통해 나타난 것들이라고 할 때, “그보다 더 큰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곧 성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도 능히 일으켜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은 사실 유대인들도 믿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생명 부활의 기적을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하여 성부께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며, 이것은 아까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하신다고 선언하신 말씀에 대한 강력한 마침표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음에서 부활시키는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기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냥 ‘일’이라고 하신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사람에게는 ‘놀랍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냥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으신 일, 즉 고유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놀라운 ‘부활의 큰 일’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놀랍게 여기게’ 만드신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하여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성자 예수님을 경외하는 것’이 동격이라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바로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의 비유에 나오는 그대로 포도원 주인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하고 보낸 그 아들을 악한 농부들이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인” 행위입니다.
  이처럼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까지 보내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똑똑히 보여 주시면서 당신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연합’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은 자연히 성부와 성자께서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로 귀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성부터 시작해서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부전자전’(like father like son)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그대로 쏙 빼닮은 성자 하나님이신 까닭에,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란 사람이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신 까닭에 육신의 눈에 어떤 실상(實像)으로 나타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영광의 존재이시므로 만약 사람이 그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사 6:5). 그처럼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그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가지시고 그 성부와 ‘똑같은 일’을 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 주신 말씀은 결코 사람의 입이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의 선인(善人)들의 윤리와 금언을 완전히 뛰어 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말씀, 소위 현자(賢者)라는 자들의 지능과 연구를 완전히 초월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 세상의 종교인(宗敎人)들의 득도(得道)와 법언(法言)이라는 것들의 추종을 아예 불허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4)는 말씀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 전부가 다 절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말,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너무나 ‘놀랍고도 권위 있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 행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격자라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창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나오게 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까?
  그 어떤 도인이 온 동네 사람, 아니 전 민족이 다 손가락질하는 세리에게 그처럼 자상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셔서 하루 저녁에 그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소위 ‘4대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중 그 누가 예수님처럼 당신의 몸을 전 인류의 죄 용서를 위한 희생제물로 바쳐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까?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으로서는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말씀과 행동을 남기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사람’이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 즉 신인성(神人性)을 동시에 지니신 유일한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똑같이 말씀하셨으며, 마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마음을 맞추고 행동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역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아들’을 공경함으로써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게 되며, ‘성자 하나님’를 영접함으로써 ‘성부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화육강세하셔서 우리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주셨고 또한 우리의 눈에 하나님의 큰 일을 보여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고 그 선하신 역사를 경외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에게 사람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전권을 맡기시고 집행하게 하셨습니다.

  24절 이하 29절에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과 동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의 여부’가 곧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른 자에게는 실로 놀라운 일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바로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는 사실인데, 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서술어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영생이나 심판이나 둘 다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벌써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이것은 이미 성취되었고 끝난 상태임을 강조하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신자는 이미 사망의 지옥으로부터 생명의 천당으로 벌써부터 옮겨져 있는, 다시 말해서 완전히 이사가 끝난 상태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순간 장차 얻게 될 영생구원은 요지부동으로 ‘확정’되어 있으며 그런 까닭에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란 곧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살전 4:16) 되는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미래와 현재의 시제를 일치시키고 계십니다.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shall hear) 때’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shall live)’는 말씀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 때가 “오나니”라고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에 벌어질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의 때’가 “곧 이때라”고 단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데, 그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라고, 아주 이상한 시제(時制)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그 ‘미래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을 ‘믿음’으로써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란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설 준비를 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며, 바로 ‘그때’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이때’ 즉 ‘아직 내가 살아 있는 오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미래의 때’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닥쳐오는가 하는 것은 ‘그때’ 가서도 아니고 ‘그때’와 ‘이때’ 사이도 아니라 “곧 이때”에 모든 것이 결정 나게 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그에 대한 모든 권위가 오직 성자 예수님께 전적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26절과 27절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고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시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권세와 더불어 ‘심판’하실 권세까지 성부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성자 하나님께 다 위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재림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상관없이, 신자는 물론 불신자까지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다 그의 음성을 듣고” 일제히 무덤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선행’이 아니라 앞서 24절에서 분명히 밝혀 주신 대로 ‘믿음’을 가리키며, 반대로 ‘악한 일’은 곧 ‘불신앙’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생명의 구원을 주느냐 아니면 심판의 저주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부여한 권한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께서 어떤 선고를 내리셨으면 이미 끝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심판주께서 판결을 내리시고 망치를 땅땅 두드리셨으면 이미 ‘상황종료’이며 ‘게임오버’일 뿐인 것입니다.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현재까지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구조대와 연락이 닿은 사람, 구조헬기 소리가 귀에 들리게 되는 사람은 이미 살게 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못 듣고 장망성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 같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미 ‘구원이 100퍼센트 보장된’ 상태인 것입니다.

  불쌍하게도, ‘이행득구’를 믿는 자들은 이런 확신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는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 자체로 교만이 될 수밖에 없고, 그저 “내가 과연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해야만 겸손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주교의 구원론은 겸손을 지키자니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고, 구원을 확신하자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는, 정말 어떻게 해결될 길이 없는 딜레마를 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확증하시면서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선언해주시는데 왜 그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신자는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분명히 선포해 주시는데도 “글쎄요, 제가 정말 구원 받았을까요? 제가 아직 선행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라고 하는 것이 정말 참된 겸손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말, 십자가 은혜를 깔보는 말, 실로 극악한 불신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은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가 결코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대금을 다 지불해 놓고도 상품이 배달되기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며, 시험을 친 후에 발표 결과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상태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영생구원은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와 같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완료되어 있는 ‘실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는 가지각색입니다.
  자녀들의 흐느낌 소리나 조객들의 대화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듣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목탁과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 죽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할 때에는 모두가 다 똑같이 한 가지 소리만 듣게 됩니다.
  바로 모든 죽은 자들을 깨우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일단 그 기상 명령을 들으면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다들 그야말로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즉시 무덤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음성에 놀라며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자기 이름을 친히 불러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은 분명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전권을 부여 받은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 그 구원을 이미 ‘이때’에 확정해 주셨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역을 통해 이처럼 명백하고도 간단하게 주어졌습니다.
  부자가 서로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듯이, 성부와 성자께서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부자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듯이, 성부와 성자께서도 그 뜻과 의지와 계획이 항상 일치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지듯이, 성부와 성자 역시 그 선포하시는 말씀과 그 행하시는 일들이 똑같으신 것입니다.

  단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큰 차이점은 전자가 불가시적 존재인 반면에 후자만이 가시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자는 성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성부를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구세주로 사역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엄청난 간격을 메우고 그 높은 장벽을 허물어뜨려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역사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직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으며 따라서 믿을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도 전무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만이 ‘나 보내신 이’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에 벌어진 가장 기이하고도 놀라운 사건인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가까이 할 수도 없었던 죄인들에게는 실로 은혜롭고 고마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시고 일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또한 그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베풀어 주고 계시는 영생구원의 은혜를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