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1-19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2장 19-23절, 6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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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49)(2017년 11월 19일 / 추수감사주일 대예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2장 19-23절, 6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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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2장 19-23절, 6장 5-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기독신자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분류할 때 ‘특별’과 ‘일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성전건축을 위한 특별헌금’과 ‘경상비를 위한 일반헌금’이라든지 혹은 ‘특별선교회비’와 ‘일반선교회비’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헌금’은 두말할 것 없이 ‘보통과 아주 다른 경우’에 바치는 것이고, ‘일반헌금’은 물론 ‘별다른 일이 없는 보통의 경우’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헌금을 바치게 되는 이유 중에 ‘아주 특별한 감사제목’과 ‘가장 일반적인 감사제목’을 찾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약의 훌륭한 대선지자 다니엘의 모범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전체를 통해 ‘다니엘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표현이 딱 두 번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오늘의 본문 구절들입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린 때야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 두 사건만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 감사들이 각각 결코 범상치 않은, 실로 돋보이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2017년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하루가 기독신자에게 일 년 중 가장 크고 특별한 감사의 날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감사생활이 이런 감사절을 한 번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물론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언제 어디서든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지극히 소중한 특별감사제목’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적용되는 ‘아주 커다란 일반감사제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참되고 신실한 기독신자라면 절로 공감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 두 가지 감사제목이 무엇인지를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성도에게는 최고의 특별감사제목입니다.

  2장 19절부터 23절에 기록하기를 “19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저 유명한 ‘큰 신상’의 꿈을 꾸었을 때 생긴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깨어난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꾸었던 꿈의 뜻은커녕 그 꿈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되자 완전히 ‘맨붕’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고문서의 한 구절에 ‘만일 사람이 자기가 본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고 있는 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것은 자신에게 아주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망각에 대해 깊은 불안 증세에 빠지게 된 느부갓네살은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2절)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당대에 있어서는 최고의 ‘석학’들이나 다름없었으며, 특히 갈대아 술사들은 꿈 해몽이나 점성술 따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타공인의 권위자였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자기가 꾼 꿈과 그 뜻을 동시에 말해 달라고 요구하자, 그들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만 알려 주면 그 뜻이야 그들이 사용하던 소위 ‘꿈 해몽 교범’ 따위를 이용해서 당장 해석하겠는데, 왕이 아예 그 꿈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그들로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최고의 브레인’이라고 믿고 있었던 자들의 그런 무능력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느부갓네살왕은 급기야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다니엘은 곧 왕을 찾아가서 일정한 기한만 허락해 주시면 그 꿈과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처럼 겨우 연장된 소중한 시간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데에 온통 다 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어 그 “은밀한 것”을 밤에 “환상”을 통해 다니엘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느부갓네살왕의 꿈과 그 해석을 동시에 알게 된 다니엘이 그 순간 즉시 하나님의 “지혜” “능력”에 대하여 “찬송”하며 “감사”드린 장면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에 대해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살고 있던 때란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후 포로로 잡혀 온 동족들은 바벨론 왕의 기침 소리 하나, 손가락 끝 놀림 하나에 좌우되고 있던,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처럼 비록 자기 민족이 처한 시대와 위치는 최악의 형편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것이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한 아무 두려워할 것 없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바로 그 ‘신상의 꿈’ 즉 세상의 강대국들이 장차 메시아 왕국에 의하여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꿈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또한 그런 미래에 대한 지혜를 ‘계시를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며”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왕은 그와 정반대로 당대에 내로라하는 소위 현자와 지식인들을 총동원해도 자신이 알고 싶어 안달하는 것을 도저히 알 길이 없자 결국 거의 히스테리 증세까지 보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는 그처럼 온 세상이 몰라서 당황하고 있던 ‘깊고 은밀한 일’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알려졌으니 그 얼마나 통쾌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었겠습니까?

  또한 다니엘은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믿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자기에게도 변함없는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찬송했습니다.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이제 오늘날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현재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했던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행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다니엘 자신에게도 직접 역사해 주심을 체험함으로써 다니엘은 ‘신앙의 선조들이 믿었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도 변함없이 신실한 하나님’이 되심을 몸소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짜릿한 전율을 느끼면서 체험하게 된 다니엘이었으니 그의 입에서는 절로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마틴 루터가 그 거대하고 강력한 로마 카톨릭을 상대로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완전히 탈진상태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좌절 상태에서 사흘 동안이나 누워 있던 루터의 침상 곁에 갑자기 그의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루터가 “누가 죽었소?”라고 묻자 아내는 “예,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될 소리요?”라고 반문하자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당신이 이렇게 절망에 빠져 누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게 된 마틴 루터는 즉시 일어나서 다시 힘을 내어 종교개혁의 사명에 끝까지 매진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이 요지부동의 사실인 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불안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불신자들은 자기네의 ‘모르는 일’들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며 답답해하고 있습니까?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의 머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자들은 여전히 느부갓네살과 똑같이 조바심과 신경질을 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소위 ‘열적 종말’을 예언한 어느 고명한 과학자는 스스로 비관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우주나 인류의 장래는 고사하고 자신의 내일 일조차 알 길이 없어 안달하는 가운데 어제 밤에 꾼 ‘개꿈’까지도 무슨 큰 뜻이 있는 것처럼 해몽해 보려 하는 유치함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만물과 인류 역사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존재하며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현실에 쫓기며 어려운 중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전 생명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성경을 통해 사사건건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을 몽땅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결코 알 길이 없었던 실로 깊고도 은밀한 지혜와 지식을 바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써 완전히 통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열조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순간순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사의 과거를 통해 ‘종교개혁자 선배’들과 ‘순교자 선조’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동행해 주시는 임마누엘’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입술에서는 절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며 그 절대주권자께서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기독신자에게 ‘최고의 특별감사제목’인 것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범사’조차 성도에게는 최대의 일반감사제목이 됩니다.

  6장 5절 이하 10절에 “5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6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7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바사 제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다니엘은 유능한 중신으로 다리오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돋보이는 업무 수행 능력으로 인해 다니엘의 직위는 서열 제1위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출세를 시기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은 그를 모함하여 끌어내릴 궁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적어도 공인으로서의 다니엘로부터는 “아무 근거, 아무 허물” 한 가지도 고소할 거리를 찾지 못한 그들은, 결국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는 사실에서 무언가 트집거리를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계책은 실로 완전무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다리오왕을 추켜세우면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할 것을 다리오에게 건의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다리오 자신을 신의 위치로 승격시켜 주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므로, 다리오왕은 그런 제의의 이면에 자기의 총애하는 신하 다니엘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 법령을 승인해 버렸습니다.

  일단 그 조서에 정식으로 어인이 찍히면 그야말로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 즉 왕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는 고치지 못하게” 되는, 실로 ‘개정불가’의 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인의 법 권위에 대한 의식은 당시 다리우스 3세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직후에 그 사람의 무죄가 밝혀지고 왕 자신도 스스로의 판결에 대해 후회하며 잘못을 인정했지만 결국 사형 그 자체는 집행되고 말았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니엘의 대적들이 보기에 그의 운명은 바사 왕이라 할지라도 구해 줄 길이 없는, 실로 ‘독 안에 든 쥐’의 꼴처럼 보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에서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행동을 태연하게 반복했는데, 바로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어디에 있든지 이 전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십사’고 간구했던 바를 따라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쪽을 향해 기도하더라도 창문을 닫아 놓고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니엘은 대적들이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보란 듯이 창을 열어젖혀 놓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는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삼시 세끼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습관으로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기도만큼은 그저 자동적으로 정한 시간에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마치 필수적인 생리작용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그런 와중에 ‘감사’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의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아까 2장의 경우에서야 감사드려 마땅할 이유들이 충분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정반대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피할 길 없는 치밀한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기도드렸다는 죄목 하나로 억울하게 죽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같으면 그런 처지에서 도대체 어떤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다니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감사했는지는 말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억지로 짐작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감사드릴만한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은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있었고 그 어떤 구체적인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현지에서 장례사업을 하고 있던 어느 한인 장의사가 쓴 책 한 권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비록 미국에 와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장례식만큼은 동방예의지국의 민족답게 유교식 절차를 철저히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인교포들에게 온갖 허례허식을 다 갖추도록 종용해서 장례비용을 ‘크게 뜯어먹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 속에 기독교식의 장례를 비판하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느 기독교신자의 장례식을 맡게 되었는데, 예배의 기도를 맡게 된 전도사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해 놓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그 장의사는 ‘사람이 죽었는데 도대체 무엇이 감사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그 전도사의 기도가 끊긴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처럼 불신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란 ‘아무 감사할 일이 없는 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범사에 감사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에도, 형통할 때뿐 아니라 위기를 당했을 때에도, 복을 받았을 때뿐 아니라 환난이 닥쳤을 때에도 ‘일단, 무조건’ 감사의 제목을 찾을 줄 아는, 참으로 놀라운 심령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혹 죽게 된 것이 뻔한 형편에서 도대체 어떻게, 무슨 제목으로 감사드릴 수 있느냐고 제게 묻고 싶으십니까?
  저는 그 답을 일단 미루어 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항상 ‘성전을 향하여 늘 행하던 대로’ 감사기도를 올리는 성도에게는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의 제목이 끊어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 감사드릴 구체적인 이유가 정 생각나지 않더라도 그냥 감사를 드리십시오.
  바로 그 순간에 생각은 안 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을 테니까 일단 ‘무조건 감사합니다.’하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감사기도를 들으시고 그냥 가만히 계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되는 상황, ‘아무 감사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범사’조차 신실한 신자에게는 ‘가장 큰 일반감사제목’이 된다는 사실 또한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미국에 가서 아직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처갓집 생활 3개월 후에 독립하고 신혼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세탁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차가 없었기 때문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중 길가에 정차해 있던 차량의 운전자가 문을 갑자기 여는 바람에 바로 그 곁을 지나가던 저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순간 저의 몸은 자전거에서 튀어나와 공중으로 떠올랐는데, 다시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자동차에 받혔습니다.
  그 충격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 직후 저는 하반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른 감각은 전혀 없고 오직 극심한 통증만 느껴졌습니다.
  그 대신 상반신은 ‘다 제대로 붙어 있고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 입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반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반신은 이렇게 살아 있으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구급차가 오고 병원에 실려 간 후에 진찰을 받고 나니, 허벅지의 타박상을 비롯하여 무릎 인대 손상과 발목 쪽의 찰과상 외에는 ‘하반신’도 그렇게 ‘중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제가 그 와중에도 일단 감사부터 드린 것을 ‘곱게’ 봐 주셨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볼 때마다 아찔한 그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저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 하나님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에게 ‘감사’란 언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그야말로 ‘자동적’이며 ‘즉각적’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요지부동의 ‘특별감사제목’이며,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사건건’이 곧 제일 큰 ‘일반감사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감사로써 ‘여호와 유일신앙’을 고백하고 감사로써 ‘범사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더 좋은 것’을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최고의 특별감사제목’과 ‘최대의 일반감사제목’을 꼭 기억하고 늘 하나님께 진심으로 정성껏 감사를 올리는 가운데, 그 감사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더 크게, 더 많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