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1-12 “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 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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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1-12
2017′경향의 강단(48)(2017년 11월 12일 / 주일 대예배)
“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 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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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

레위기 22장 26-3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아시다시피 저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전혀 보지 않지만, 그 스토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도 불리는 대로 그 내용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며 과정이나 결말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가 고부간의 갈등입니다.
  그런 경우 며느리가 무슨 꽃이나 선물을 들고 시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시어머니는 그것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따위의 장면도 아마 자주 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어머니의 눈에 일단 며느리가 밉게 보이면 제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오더라도 그 선물이 반가울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바로 오늘 본문 29절이 그 사실을 두고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림에 있어서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곧 ‘나’ 자신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풍성한 제물을 바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그 감사제사 자체가 무의미한 의식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의 감사가 그처럼 헛수고로 끝나는 것을 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당신께서 그것을 기쁘시게 받으실 수 있는지를 명백하게 선포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귀하고 좋은 은혜와 복들을 세어 보면서 이제 한 주간 남은 추수감사절을 기다리는 오늘 주일에 저는 과연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심’이 될 만한 감사의 제물로 드릴 수 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감사예물을 준비하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26절부터 28절에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28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앞의 17절 이하 2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께 바치는 제물은 반드시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21절)이 되어야 함을 구구절절 강조하셨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은 절대로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25절)이라고 명백히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26절부터 28절의 말씀은 그처럼 ‘온전한 예물’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추가조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소나 양이나 염소”는 여러 종류의 제사에 쓰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짐승들인데, 이어지는 29절의 “감사제물”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짐승의 종목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면서 특히 그것들이 갓 난 새끼일 경우에는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한 후에 “여덟째 날 이후로는” 언제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2장 30절에 나왔던 명령을 재확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짐승에 대해서도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어차피 짐승의 새끼를 잡는다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잡는 것이나 8일 후에 잡는 것이나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본다면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8일 후’에 잡을 수 있게 한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가 출생한 지 8일 후에 할례를 받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이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정식으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듯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역시 난 지 8일 지난 후에 드림으로써 ‘언약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물’의 격식을 맞추도록 하는 데에 진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28절에서 제물로 쓸 짐승을 잡을 때 그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못하게 하신 것도 역시 그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어미 짐승과 그 새끼를 일부러 같은 날에 잡을 뿐 아니라 더 심한 경우에는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본뜬대서야 결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제물부터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하신 ‘온전한 것’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른에게 무엇을 대접하거나 사 드리고 싶을 때에 “어떤 것을 잡수시겠습니까? ”라든지 “뭘 좋아하십니까?”라고 여쭈어보게 됩니다.
  그럴 때 어른 쪽에서 “아무 거나 괜찮다.”라고 하시든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면 대접하려는 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반면에 그냥 당신의 취향대로 말씀해 주시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거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우리를 더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 할 절기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정해 주셨으며, 그 예물의 종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까지도 상세하게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맥추감사절을 지키라 명하셨고 또한 추수감사절 역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그 날 드려야 할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에 대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해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 감사절기를 불신자의 풍습과는 전혀 다르게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추석이라는 명절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저 귀신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서 지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불신사회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자신의 감사행위를 ‘예배’를 통해 승화시킵니다.
  불신자들은 추수를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순전히 자기네들끼리만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로 끝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원의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당연히 그 감사의 예물까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준비하여 바치면서 이 날을 더욱 즐겁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감사제물부터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서, 이번 추수감사절에도 각자 ‘흠 없고 온전한 제물’들로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다른 성도들과 감사제목을 나누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29절과 30절에 기록하기를 “29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30그 제물은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감사제물”이란 ‘서원제, 낙헌제, 감사제’로 세분되는 ‘화목제’ 중에서 특히 ‘감사제’ 때에 바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5대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 화목제에만 해당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들은 오직 제사장과 그 식구들만 먹을 수 있었지만, 이 화목제만은 그 제물을 바친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 강조된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이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교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열왕기상 8장 63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면서 ‘이만 이천 마리의 소’와 ‘십이만 마리의 양’으로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이 함께 나누어 먹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목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화목제의 특별규정은 ‘감사제’뿐 아니라 ‘서원제와 낙헌제’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있었습니다.
  곧 서원제와 낙헌제의 경우에는 그 제물을 제사 드린 후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감사제만큼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반드시 “그 제물은 그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나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감사제를 드리고 그 고기를 당일에 다 먹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단 가족이나 친지뿐 아니라 더 많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먹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상호 친교가 이루어졌던 것이며, 바로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감사 역시 혼자만 하는 것보다는 함께 나누는 사이에 더 커지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감사헌금의 특별한 제목들을 공개하는 이유도 바로 모든 성도들이 ‘아, 저럴 때에도 저렇게 감사드리는 것이구나.’라고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도 같은 경우가 생길 때 감사드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돌을 맞이했을 때 감사헌금도 드리고 또 성도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열어 대접하거나, 자녀의 결혼 후에 역시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바칠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떡을 돌리는 것 역시 ‘감사가 더욱 증폭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히 ‘감사제물’은 그것을 바친 성도 본인뿐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나누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보다 당연히 먼저, 당연히 더 크게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심히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작은 것 받았는데도 감사드리고, 내가 보기에는 감사의 제목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두고도 오히려 감사드리는 성도들을 보게 될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있으면서도 일 년 열두 달 52주일 내내 감사헌금 한 번 드리지 않던 교인이, 이제 막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쥐꼬리만큼 받는 첫 월급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전부를 ‘첫 소산의 감사헌금’으로 바치는 청년을 보면 좀 무언가 자극을 받지 않겠습니까?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 감사기도조차 드리지 않던 교인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을 당하고도 오히려 장례를 위로와 은혜 가운데 이끌어 주신 것을 기억하여 특별감사예물을 드리는 유족 성도들을 보면 당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보리떡 헌금에 단 한 푼도 바치지 않는 ‘짠 어른 교인’들이, 주일학교 학생이나 유치부 어린이들이 저금통 헌금을 이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면 좀 무언가 그 마음에 찔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제물’을 ‘그 날’에 함께 ‘나누어 먹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바로 이런 감사의 공감대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에는 좋은 의미에서 일종의 ‘전염성’이 있습니다.
  감사의 제목을 성도끼리 나누는 가운데 ‘무엇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언제 어떻게 감사드리고’ ‘얼마나 감사드리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해피 바이러스’가 교회 안에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향공동체를 통해 나누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반드시 이러한 ‘감사의 화목제물’을 공유함으로써,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감사제사를 더 자주, 더욱 풍성히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결단과 함께 감사드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31절 이하 33절까지의 말씀에 “31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감사제물’만 강조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연이어서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고, 어떻게 보면 앞 구절과는 아주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너무나도 문맥에 맞는 말씀입니다.
  감사제사를 한 번 드렸다고 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주 만홀히 여기는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거룩하게 함(여김)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께 겨우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잡아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께 그 얼마나 모독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즉 당신의 백성을 천하만민들 중에서 택자로 부르시고 선민으로 삼아 주시는 분이신데, 딱 감사절기 하루만 지키고 나머지 날들은 그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성호를 속되게 하는’ 즉 신성모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특히 그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라고 스스로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단순히 일 년 농사를 도와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남의 종살이 하고 있던 백성에게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해방을 베풀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진정 그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는 자라면 무슨 맥추절이나 장막절 때에 감사제사 한 번 드리는 것만 가지고서 그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 말도 안 될 소리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아주 구체적으로 요구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베풀어 준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감사제를 드리는 날뿐 아니라 평소에도 늘 내 계명을 순종하고 살아야 마땅하다.’라고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말씀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모시는 방법’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요,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야말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물들’ 중에서도 가장 요긴한 제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감사란 예물을 바치는 것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까지 행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갖출 것을 완전히 갖추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거룩히 모시는’ 성도의 기본마음에 해당된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기본자세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냥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고 꾸벅 인사 한 번 하고 헌금봉투 한 장 내밀고 돌아서서 ‘이제는 다 끝났다.’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감사절에 올린 감사가 진짜 감사인지 아닌지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날을 통해 다시 일깨워진 감사의 마음을 그 이후에도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그 감사절 때문에 각자의 심령 속에 증폭된 감사를 이제 자신의 행동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발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면 이제 성탄절이 올 때 정도까지는 적당히 주일을 빼 먹어도 괜찮겠지.’라고 ‘머리 굴리는’ 교인이 혹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특별감사헌금을 내 딴에는 꽤 많이 드렸으니 이제 내년 맥추감사절이 올 때까지 일반 감사헌금은 내지 않아도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지.’라고 제멋대로 ‘계산을 끝내 놓는’ 교인마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실로 ‘속되게 만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신 성부 하나님을 너무나 ‘만홀히 여기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아 성별된 성도라면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어른이 무슨 고마운 일을 베풀어 주실 때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진심으로 드리는 사람이라면 ‘더 잘하겠습니다.
 ’라는 말도 절로 따라오게 되지 않습니까?
  감사의 예물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서원과 결단 또한 함께 올림으로써 비단 감사절뿐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성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그 감사가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감사가 그저 체면치레에 불과할 때, 감사의 정성이 모자랄 때, 혹은 감사 자체가 아예 외식이고 거짓일 때에 그 감사는 결코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기쁘시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니라”(that you may be accepted)고 하셨습니다.
  ‘제물이 받으심이 되도록’이 아니라 ‘너희 자신이 받으심이 되도록’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4-5)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벨의 제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즉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받으시든지 아니면 그 사람과 그 제물을 동시에 받지 않으시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 어린이들 중에 가끔 제게 선물을 가져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선물이란 정말 각양각색인데, ‘색종이로 접은 하트’부터 시작해서 ‘먹다 남은 과자’일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저의 얼굴을 정말 괴상하게(?) 그려 놓고 게다가 그냥 ‘목사’라고 ‘님’ 자도 없이 제목을 달아 놓은 그림도 있고, 아마 틀림없이 엄마가 함께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될 정도로 작품성(?)이 높은 공예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선물이 어떤 종류인지,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를 따지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들이 저를 찾아오는 자체가 더없이 기쁠 뿐이며, 더욱이 그런 ‘특별한 선물’까지 가져올 때에는 그 기쁨이 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물’ 자체보다 당연히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제물’로 바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온전한 감사예물’을 준비하고, ‘감사의 제목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어’ 증폭시키며, 또한 ‘감사에 따르는 순종의 결단’을 서원함으로써, 이번 추수감사절에 더욱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감사제를 함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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