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1-0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시편 50편 7-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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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1-05
2017′경향의 강단(47)(2017년 11월 5일 / 주일 대예배)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시편 50편 7-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주일낮예배 /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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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시편 50편 7-23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꼭 필요한 것’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함께 ‘쓸데없이 끼어드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도 사용하는 비유인데, 한방에서 조제해 주는 한약에는 대부분이 다 감초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나온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한약은 매우 쓰기 때문에 복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이 감초의 단맛이 그것을 순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동의보감’에 따르면 감초에는 해독작용을 하는 성분도 들어 있어서 다른 한약재의 독성을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하며, 근래에 와서는 감초에 소량 포함되어 있는 스테로이드 성분이 또한 여러 가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 ‘감초’와 같이 꼭 필요한 것을 찾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마 ‘감사’가 그에 해당될 것입니다.
  한약에 감초가 빠진다면 맛도 없고 효과도 줄어들 듯이 예배부터 시작해서 기도나 봉사나 성도교제 등등 신앙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만약 감사가 빠진다면 그 기쁨이나 은혜가 크게 줄어들든지 아니면 아예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영장(지휘자)들 중의 한 명이었으며 시편 50편을 노래한 “아삽” 역시 그런 사실을 체험한 성도였습니다.
  이제 감사의 달 11월의 첫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감사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감초와 같은 것인지 그 이유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감사는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본문 7절부터 15절에 “7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면서 그들이 당신께 드려야 할 제사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우선 8절에서는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사에는 “제물” “항상” 포함되어야 함을 천명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준비하는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책망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에 그런 짐승의 “번제”가 항상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제사가 완벽한 것이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0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을 비롯하여 “산의 모든 새들” “들의 짐승”까지 “다 내 것”이라고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시듯이, 제물에 사용되는 짐승들 모두가 애당초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13절에서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라고 반어법으로 강조하고 계시듯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잡수시고 싶어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제사란 ‘사람이 하나님께 부족한 그 무엇을 채워드리는 행위’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처럼 제물이 제사에 필수요소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제사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꼭 더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두고 본문 14절 상반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드려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즉 앞에서 바쳤던 ‘짐승’이라는 구체적인 제물에 ‘감사’라는 마음의 제물이 합쳐짐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제사가 된다는 뜻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14절 하반절에 보면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서원’은 ‘감사’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편에서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제물과 함께 바치는 아주 당연한 반응인 것에 비하여, 서원은 그것을 작정하는 성도 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어떤 선한 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약속하고 시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감사란 무슨 신앙이 아주 깊거나 선한 일에 특별히 열심이 있는 수준에 도달한 신자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신자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것만은 꼭 할 줄 알아야 할 정도로 신앙생활의 초보요 기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22절에 보면 하나님께 이런 감사조차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이미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나 마찬가지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사 즉 예배는 하나님을 “지존하신 이”로 모시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자기 머리 위로, 저 하늘 위로, 지극히 높은 보좌 위로 올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배가 그처럼 하나님을 ‘지극이 높으신 절대주권자’로 받들어 모시는 행위라면 거기에 ‘감사’는 그야말로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언젠가 온 가족이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를 뵈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할머니께 드릴 용돈을 얼마나 마련해 왔는지’를 물어 보셨는데, 어머니께서 우물쭈물 대답을 잘 못하시더니 결국 가져오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하필이면 그때 쯤 가계부에 돈이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약소한 선물 한 가지만 겨우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뵈러 가면서 어떻게 용돈도 준비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화를 내시면서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준비했어야지.’라고 노발대발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당신이 평소에 집안에 쌀이 떨어졌을 때에도 목사 사모가 교인에게 돈을 빌리면 절대로 안 된다고 나한테 그렇게 야단치지 않으셨느냐?’고 응수하시는 바람에 아버지께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물론 차 안의 분위기는 싸해질 수밖에 없었고, 할머니 댁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형제들도 그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어색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 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뵈러 가시면서 용돈을 드리지 못한 때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뵈러 갈 때 ‘빈손’으로 갈 수 없듯이, 신자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갈 때에 또한 ‘감사’가 빠질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십일조는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꼭 바쳐야 할 필수 헌금이지만, 감사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바쳐야 할 헌금인 동시에 매주일 한 번씩은 꼭 바쳐야 할 헌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매주일 감사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십일조도 한 달에 한 번 월급 받을 때마다 하니까 감사헌금도 감사제목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월급을 받는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2주에 한 번 월급을 받는 사람은 격주로, 주급을 받는 사람만 매주 감사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런 식으로 감사헌금을 해야 한다면 ‘일당’을 받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일주일에 한 번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이 어떻게 ‘너무 자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엿새’라는 날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온갖 은혜와 복 가운데 생존하고 활동하다가 주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정말 기억하는 신자라면 그 심령에 감사제목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 매일 감사헌금을 드려야 할 것을 일주일에 한 번만 드리니 오히려 부족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또한 ‘범사에 감사’라는 것이 아주 훌륭한 감사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무슨 좋은 일이 있어야만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넘어간,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넘겨서는 안 될 모든 감사제목들’을 통틀어서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명하지 않았습니까?
  신자가 어떤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감사헌금을 드려야 할 줄 알면서도, ‘범사’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고 ‘헌금’은 안 드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모순인 것입니다.

  감사가 빠진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가 아니라 그저 ‘구걸하는 앉은뱅이들의 모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제물이 결핍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순전히 불평불만만 가득한 ‘다고다고 하는 거머리’들이 자기 소원을 먼저 들어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떼를 쓰는 자리가 될 뿐입니다.
  예배가 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아무 영광도 돌리지 못하고 그저 ‘오병이어’만 공짜로 얻어먹으려는 ‘무리’의 이합집산으로 끝나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제물’이 항상 제단에 올려지는 것처럼 동시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마음’을 꼭 함께 바침으로써 진정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감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복을 받게 해 주는 필수조건입니다.

  16절 이하 23절에 “16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21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2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데, 그 중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16절 하반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즉 여기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악인이란 그냥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제법 율법도 배우고 제 딴에는 ‘하나님의 언약 운운’할 줄도 아는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이제 와서는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는 저주까지 받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17절 이하 21절에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지적하고 계시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온갖 악행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내세우는 ‘율법과 언약’을 그대로 순종하는 ‘신행일치의 삶’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도둑”, “간음”, “거짓”, “형제 공박”, “비방” 등등 실상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을” 자기네 등 “뒤로 던져” 버리는 이율배반적인 모습만 가득했습니다.
  즉 그들이 ‘몸으로 나타내는 행동’은 그들이 ‘입으로 떠벌리는 신앙’과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모양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22절 상반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명색이 ‘선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백성’이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을 잊은 악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까?
  그 실제적인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23상반절에서 상기시켜 주고 있듯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제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사로써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유지하고 인격적인 교통을 할 줄 모르는 백성은 제아무리 ‘선민’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악인’으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23절 하반절에 보면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 즉 ‘감사의 제사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리고 그것이 무슨 ‘공로’가 되어서 보답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십자가의 대속공로에 의하여 이미 주어진 것이며, 성도가 감사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최고의 은혜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의 제사로써 하나님 앞에 옳은 행위’를 보이는 자에게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일반적인 은혜로 도와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까 15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이와 똑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릴 줄 아는 자라야만 하나님 편에서도 계속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고 싶으실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복이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감사에 보답해서 축복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사실상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기는커녕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인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으며 다른 사람 앞에서 ‘성경 말씀이 이렇고 저렇고’ 운운 하면서도 ‘감사라는 옳은 행위가 전혀 없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라는 경고는 실로 우리 신앙생활의 정곡을 찌르지 않습니까?
  ‘네가 신자라 하면서도 진정한 복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이미 내려준 은혜에 대해서조차 조금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저와 여러분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위해 날마다 베풀어 주고 계시는 각양 좋은 은사들을 기억하며 감사헌금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교인이라면, 실제로는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나 그 무한한 사랑과 놀라운 역사와 큰 은혜를 전혀 믿지 않는 ‘악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제게 무슨 선물을 보내 주시는 교인에게 제가 꼭 감사카드를 보내 드리는데, ‘아주 가끔’이지만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생깁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처럼 저의 감사카드를 받지 못한 교인은 제게 다시는 선물을 보내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교인이 계신다면 제가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또 그 이후로 제게 선물을 전혀 보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계실지라도 저는 오로지 ‘제가 당해야 마땅한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선물’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입장을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별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은 정말 많이 하는’ 숨은 봉사자들에 대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은 대접이나마 해 드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것은 ‘자장면 배달’일 수도 있고 혹은 제가 손수 만든 ‘특제 김밥’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야구 관람’이나 ‘콘서트 티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접을 받은 교인들 쪽에서는 으레 제게 감사인사를 문자메시지나 카드로 보내 주시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유독 별나게’ 감사인사를 하는 교인이나 그룹이 가끔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면 다른 교인들도 다들 따라하려고 할 것이니까 여기서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하여튼 제가 받으면서도 약간 쑥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로 ‘요란하고 야단스럽게’ 감사인사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아무래도 그런 교인들에게 또 더 대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복을 받기는커녕 결국에 가서는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없는 교인은 실상 ‘하나님을 잊은 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모른 체’ 하면서 그냥 교회를 다녀가기만 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그런 무례한 교인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마음이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도 자세히 보면 별빛이 보일 것이다.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도 햇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신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내 인생 주위의 모든 것이 ‘캄캄하게만 보이는 밤중’ 같은 상황에서도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면 ‘별빛’ 같은 감사의 제목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작은 감사 제목을 찾아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에게 끝내 ‘천국의 빛’까지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면 사실 그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일에 불과한데도 하나님께서도 그 감사를 아주 크게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감사란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에 비하면 실로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간이라도 빼줄 듯이’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를 더욱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그처럼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더 큰 은혜와 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시편 118편 21절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은혜가 ‘구원’인 것처럼, 우리 쪽에서 그 하나님께 마땅히 나타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반응이 곧 ‘감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구원의 확신’이 있는 기독신자라면 그 구원의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감사의 제물’이 자신의 마음과 손에 반드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예배생활에 아무 기쁨과 은혜가 없다면 바로 이런 ‘감사의 제사’가 결핍되어 있는 것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가정과 학업과 생업에서 구체적인 응답을 여태껏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서조차 감사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감사’라는 ‘감초’가 빠진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맛도 없고’ ‘시너지 효과도 사라진’ 무미건조한 형식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주일부터 ‘감사의 달’ 1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한 달여 전부터 우리는 ‘감사노트’를 적으면서 크고 작은 ‘감사의 이삭’들을 빠짐없이 모아서 ‘큰 감사의 단’으로 묶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 감사제목 하나하나가 우리의 매주일 예배를 진정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만한 온전한 제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마음으로 기억한 감사제목에 따라 바치는 감사헌금’이 또한 이 2017년의 마지막 두 달을 유종지미의 복으로 가득 채워 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실로 매주일 아니 매일 ‘지존하신 이’에게 ‘감사로 제사’를 올려 드리며 그런 ‘옳은 행위로써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위해 ‘환난 날에 도와주시는 복’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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