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0-29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요한계시록 20장 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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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0-29
2017′경향의 강단(46)(2017년 10월 29일 / 주일 대예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요한계시록 20장 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종교개혁기념주일(제500주년)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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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

요한계시록 20장 4-6절 / 석기현 담임목사
주후 452년에 훈족이 이탈리아를 휩쓸며 로마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해 왔을 때였습니다.
  이 강력한 이민족을 대항할 능력이 전무했던 서로마 황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는데, 당시 로마의 주교였던 레오가 훈족의 아틸라 왕과 담판을 하기 위해 황제 대신 용감히 나섰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여튼 아틸라는 레오를 만난 후 군대를 돌려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주후 455년에 이번에는 반달족이 로마를 공격해 왔는데, 그때도 여전히 로마의 주교였던 레오는 이번에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만나서 로마 시민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이세리크는 두 주간 동안 자기 부하들이 로마시를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했지만, 그 대신 시가지를 불태우지는 않았습니다.
  그처럼 두 차례에 걸쳐 로마 시민의 생명을 지켜낸 레오 주교는 그때부터 황제보다 더 고맙고 유력한 ‘수호자’로 추앙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 주교’는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소위 ‘Pontifex Maximus’(최고의 제사장)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천주교의 ‘교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명칭은 오늘날까지도 교황에게 붙는 여러 가지 공식 칭호 중의 하나인데, 그 근원을 따져 올라가자면 사실 고대 로마 시대의 이교도에서 ‘대사제’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황제들이 이것을 자신의 공식 칭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라티아누스 황제 이후부터는 폐기되었습니다.
  그처럼 우상종교적이며 정치적으로 사용되던 명칭을 로마카톨릭이 다시 교황의 명칭으로 부활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모든 성도 역시 ‘세상을 향해 왕노릇하는 제사장’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증거합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제 종교개혁 제500주년이라는 뜻깊은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과연 어떤 성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라는 실로 고귀한 명칭으로 불릴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의 진리’를 순교의 각오로 지키는 성도가 진정한 제사장입니다.

  4절 상반절 말씀에 “4a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보좌들” “거기에 앉은 자들”을 보았는데, 이들은 그 영혼이 이미 천당에 올라가 있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한 것은, 모든 기독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심판을 실시하실 때에 그 심판주와 ‘함께 왕노릇하며’ 그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 받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세상을 심판할 성도들 가운데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순교란 두말할 것 없이 신자로서의 최고 충성이며 순교자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런 순교의 조건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행을 다니다가 우연히 이슬람교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죽임당하는 사람은 ‘열사’라고는 불릴 수 있지만 ‘순교자’는 아닙니다.
  또한 목사나 기독신자라 하더라도 무슨 ‘사회 정의’를 부르짖다가 죽게 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희생’일 뿐이지 절대로 ‘신앙적인 순교’는 아닌 것입니다.

  순교는 반드시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해서 성경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선포하고 수호하려다 ‘목 베임’ 즉 죽임을 당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제 때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 강요에 대하여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반대하다가 죽임당한 신자들이나, 독재자를 우상화시키면서 무신론을 외치는 공산주의자들의 총칼 앞에서 ‘오직 예수 신앙’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한 신자들이야말로 여기서 말씀하는 진짜 순교자들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를 자기 목숨을 걸고 순교의 각오로 지키는 성도만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참된 제사장이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카톨릭은 성경에 전혀 없는 ‘이행득구’의 교리로써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면죄부’를 사게 하고 ‘성지순례’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원’을 팔아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도생활이나 고행 따위를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행했지만 전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마틴 루터도 그 때문에 ‘로마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을 때에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득 없이 오히려 완전한 실망에 빠져 에르푸르트로 돌아오게 되었던 루터는 로마카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회의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그는 비텐베르그대학에 종신직 성경교수로 임명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전까지 마틴 루터는 공의로써 죄인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누그러뜨릴 수 없음’ 때문에 고민을 해 오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 사이에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향하여 그저 화를 내시고 심판만 하시는 공의’가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아무 공로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저 믿기만 하면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은혜와 자비를 발휘해 주셔서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의’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소위 ‘상아탑 사건’(the event of tower experience)이라 불리게 된 이 경험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언제 있었는지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하여튼 마틴 루터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새로 태어나게 된” 참된 ‘중생의 시점’이었으며 바로 그 바울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자기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 열리는 ‘구원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로마카톨릭의 ‘최고 제사장’은 이처럼 ‘복음의 본질’을 파괴시킴으로써 루터와 같은 가장 열성적인 사제조차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경의 진리를 깨달은 마틴 루터는 사도 바울이 ‘우리의 전파한 복음’이라고 했던 그 원래의 ‘진짜 복음’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종교개혁이라는 대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뒤를 이은 종교개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대전제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구석구석 읽고 연구했으며 그 결과 ‘구원론’을 비롯한 ‘신학’에서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에 이르기까지 ‘오직 성경중심’의 원리를 발견하고 집대성함으로써 오늘날 장로교회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종교개혁자 선배들처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모토 아래 이 ‘진리 사수’를 위해 순교의 각오로 싸우는 이 시대의 참된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적그리스도의 연합세력’과 맞서 싸우는 성도가 참된 제사장입니다.

  이어지는 4절 하반절과 5절에 “4b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짐승”이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우상”이란 그런 적그리스도가 펼치는 우상종교 운동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살펴보면, ‘용’으로 나타나는 사탄이 바로 이런 ‘적그리스도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연합세력을 사용해서 교회를 대적하며 성도를 박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사주를 받은 적그리스도가 활동할 때는 필연적으로 거짓 종교인들을 앞장세워 꼭두각시로 사용하는 전법을 쓰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는 항상 ‘기독교가 아닌 우상종교’나 ‘기독교인 척하지만 실상은 이단에 속한 교회’를 사용하여 참된 교회와 신자들을 핍박해 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만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이마와 손의 표’란 바로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나오는 저 유명한 ‘666의 표’인데, 이것은 그 적그리스도 짐승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 이름의 “수”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계 13:17).
  그 ‘666’의 의미에 대해서는 온갖 해석이 분분하지만, 오직 확실한 것 하나는 이것이 “사람의 수”(계 13:18)라는 사실입니다.
  ‘7’이란 숫자가 ‘하나님의 완전수’인데 그 ‘7’에서 하나 모자라는 것이 곧 사람의 숫자 ‘6’이 되는 것이니, 이 ‘666의 표’란 한마디로 말해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극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바로 우상종교와 결탁하여 모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의 표를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표를 이마나 손에 받지 아니하는 자 즉 이런 인본주의와 결탁한 우상종교와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매매를 못하게”(계 13:17) 즉 인간 사회에서 살지 못하도록 왕따를 시키고 압력을 가해 올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 세계의 영계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너무나도 뚜렷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교회를 위협하는 사탄의 작전은 바로 세상의 우상 종교들을 통하여, 또한 기독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든지 자유주의든지 간에 어쨌든 하나님이란 이름만 같으면 무조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시적 교단 통합 운동의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이든지 그 종교개혁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한 로마카톨릭의 후예이든지 간에 사실은 ‘나누어진 한 형제’인 것을 서로 인정하고 같은 기독교 이름 아래 합쳐져야 한다는 주장이 완전히 압도적인 대세인 것입니다.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 1994년 3월 29일에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소위 ‘ECT(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선언’이라는 것이 미국 교계에 발표되면서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주요한 교리적 차이점이 이제 다 극복되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 ‘ECT 선언’은 소위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와 자매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도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기독교와 천주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여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문은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성경관, 교회관, 성례의 문제, 성모 마리아와 성자숭배 문제 등에 대하여서는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양자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전파라는 한 가지 사명을 지향해야만 할” 관계에 있으며 그런 까닭에 신앙의 공통점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하여(by grace through faith because of Christ) 의롭다함을 얻게 됨을 함께 확인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마치 칭의 교리에 대하여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듯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프라울(R. C. Sproul)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선언에 ‘오직 믿음(only faith)’ 대신에 그냥 ‘믿음’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 즉 ‘오직(only)’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분 나쁜 일”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믿음이 칭의를 얻기 위한 조건’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한 적은 그 어느 때라도 한 번도 없었으며, 그러므로 이런 선언문에 합동조인했다고 해서 그들의 원래 입장에 대해 양보하거나 후퇴한 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는 그런 “믿음을 통하여”가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하여” 얻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이 ‘반종교개혁운동’을 목적으로 1545년에 소집했던 ‘트렌트 공회’는 바로 그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공식적으로 부인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죄인은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협조해야만 할 다른 아무 것이 없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며, 그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자기를 준비하고 처신해야 할 그 어떤 필요성도 없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anathema)를 받을지어다.”라고 명백히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회는 그와 같은 트렌트 공회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재천명함으로써 역시 종교개혁자들을 ‘저주’했으며 그 저주는 바로 그들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는 오늘날의 개혁주의 신자와 교회를 향하여서도 여전히 내려지고 있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ECT 선언’에 천주교 사제들과 함께 조인했던 여러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실상 천주교의 교묘한 술책에 고스란히 속아 넘어간 꼴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 “살아서 그리스도와 왕노릇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종교통합운동의 회원권’을 받지 않고 외톨이로 몰리는 것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적그리스도의 연합세력’과 맞서 싸워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악한 불신세상 앞에서 지키는 성도가 진짜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6절 말씀에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첫째 부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중생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지옥의 영벌에서 구원 받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처럼 ‘구원의 확신과 영생 소망’이 확실한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된 기독신자들이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즉 교회를 중심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모르는 이 악한 세상 앞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사람으로서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고귀한 직분입니다.
  바로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는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즉 참된 신자는 ‘신령한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 이 죄악이 관영한 불신 세상 앞에 정확하게 보여 줄 줄 아는 이 시대의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기독교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이 곧 ‘기독신자는 믿음만 내세우고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김없이 야고보서 2장 14절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말씀을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합니다.
  하지만 우선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결코 ‘이행득구’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오직 ‘신행일치’를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행위가 있는 믿음’과 ‘행위가 없는 믿음’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한 것처럼, ‘행위가 없는 믿음’이란 아예 ‘믿음’이 아닙니다.
  즉 사람은 ‘믿음과 행위가 동시에 있든지’ 아니면 ‘믿음도 없고 따라서 행위도 없든지’ 둘 중의 하나로 나누어질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신약성경에 야고보서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대로 ‘일단 한 번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따위의 이단 교리가 더욱 극성을 부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칼빈은 누구보다 ‘성화’ 즉 ‘참된 믿음에 따라오는 신행일치의 삶’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사람이 거룩하게 살아야 구원 받을 자로 선택된다.’고 주장했지만, 칼빈은 ‘신자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는 이유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선행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이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이 사실을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을 가지고서 논증하기를 ‘기독신자가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성이 선택의 결과임을 선언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사는 것’이 이유가 되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로 선택해 주시는 것이라면 이 성경 말씀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사는’ 제사장이 되어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게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과 인류는 사실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다윈의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더 좋은 쪽으로의 진화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이 죄를 짓고 더 악한 행위들을 창출해내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인류는 더 똑똑해지고 더 재주가 늘고 더 잘 살게 될수록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쪽으로만 일사천리로 진화, 즉 ‘악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불신결혼을 하면서 ‘장부들을 낳고’ 건강하게 잘 살았습니다.
  문명은 발달하고 산업이 확장되었으며 여가생활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태평성세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로까지 극악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기독신자야말로 그런 세상의 ‘악한 조류’를 정반대로 거스르는 유일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똑바로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만이 끝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참된 ‘천년왕국의 신민’이 될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더러워지고 더 악해지기만 하고 있는 불신세상 앞에서 끝까지 ‘성별된 신행일치의 삶’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마틴 루터나 요한 칼빈이라고 해서 ‘무흠한 성인’은 절대로 아니었으며,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 또한 그들을 ‘특별히 거룩한 사람’으로 떠받드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들 역시 인간적인 결점도 있었고 종교개혁운동 과정에서 일부 시행착오도 저질렀던, 그야말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죄인조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실로 놀라운 복음을 일깨워 주었고 또한 본인들 역시 그런 모범을 보여 주면서 살았던 ‘신약 시대의 신앙 선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외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여전히 ‘교권주의의 노예’가 되어 신부 앞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면죄부’를 사고 ‘고행’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주는 기쁨과 은혜는 전혀 없는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천주교의 이단성’을 밝히고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돌과 나무 앞에 손을 비비고 절을 하면서 그것들을 ‘천주’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신행일치의 성화’를 몸소 보여 주면서 ‘만인제사장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세상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라 ‘교황을 하나님처럼 모시고 그 앞에 절하는 종’이 되어 있지 않았겠습니까?

  겉모습만 거룩하게 보이는 데 있어서는 천주교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교황의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거창한 명칭에서 시작하여 ‘신부와 수녀의 복장’이나 ‘뾰족하게 높은 천장과 화려한 스테인글래스로 치장된 성당에서 평신도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라틴어 의전을 따라 진행되는 의식’들과 심지어 ‘사람이 스스로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거룩하게 보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성자’, ‘성녀’로부터 시작해서 ‘성물’, ‘성골’, ‘성상’, ‘성지’ 등등에 이르기까지 온통 ‘거룩하게 들리는 명칭’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요즘 일부 기독교의 목사들이 ‘노회’나 ‘총회’라는 원래의 명칭 대신에 ‘성노회’, ‘성총회’ 따위로 부르는 것도 그처럼 ‘성스러울 성(聖) 자’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천주교를 무의식중에 따라가는 ‘개념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정말 거룩한 사람은 바로 이 천년왕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고 있는 모든 성도입니다.
  교황이 ‘최고로 거룩한 제사장’인 것은 결코 아니며, 선행의 공로를 많이 남겨 놓고 죽은 사람만 ‘성(Saint) 아무개’라고 불릴 수 있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을 죽을 때까지 증언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며 ‘첫째 부활’에 참여한 신실하고 충성된 기독신자야말로 모두 다 진짜 ‘거룩한 제사장’인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종교개혁자 선배들이 가르치고 보여 준 그대로 ‘성경 진리’를 순교의 각오로써 수호하고 ‘적그리스도의 연합세력’에 끝까지 대항하여 싸우며 ‘신행일치’를 통해 세상 앞에 진짜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이 시대의 참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