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7-10-15 오직 은혜 Sola Gratia [에베소서 2장 7-9절] 신승욱 목사(제네바신학대학원 교수)

More videos
189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주일밤예배 2017-10-15
방화·발산·공항·마곡교구 헌신예배(주일 밤 예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 ③
강사:오직 은혜 Sola Gratia [에베소서 2장 7-9절] 신승욱 목사(제네바신학대학원 교수)
찬양:방화·발산·공항·마곡교구 연합찬양대
※ 찬양 연습 – 오후 4:30, 제3성전(지하 2층)10월 15일(주) 오후 7:00
주일밤예배 _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강
방화·발산·공항·마곡교구 헌신예배
사회 : 박순신 목사 강사 : 신승욱 목사

(189)

오직 은혜 Sola Gratia

에베소서 2장 7-9절
종교개혁기념주일 특강 ③

오직 은혜 Sola Gratia 에베소서 2:7-9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어떠한 종류의 공헌이나 공로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 일정 정도 스스로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비단 종교개혁 당시의 현상만은 아닙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만연하고 있는 일입니다. ‘오직 은혜’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대마다 개인마다 내용이나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긴 하였지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신인협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하였고 그것을 확증하고자 하였습니다.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교리

종교개혁 당시 로마카톨릭의 구원론은 기본적으로 유명론(nominalism)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이 먼저 온전히 종교적이고 윤리적으로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라는 것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 받는 은혜에도 당연히 사람의 공로 즉 하나님의 이 은혜를 받기 위한 공로가 기여를 하는데 이것은 ‘유사공로’(congruent merit)로 불리곤 합니다. 그러한 은혜로 신자가 되어서 행하는 노력들은 구원과 직접 연결되는 ‘순수공로’(condign merit)로 이해됩니다. - 이 순수공로 (당연연공) 개념이 그 질(quality)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후에 조금 바뀌긴 하였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변함이 없다. - 이러한 공로개념은 매우 비성경적인 것으로 잘못된 개념들입니다. 물론 인간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들은 개혁주의 사상에서도 구원의 은혜의 결과로 수반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것들입니다. 결코 무시내지는 경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구원의 ‘공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주 ‘오직 믿음’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의 유능한 천재 사제였으며 후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공포와 심판의 의’가 아닌 ‘구원의 은혜의 의’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늘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행위’에 함몰되어 불안과 근심과 초조에 휩싸여 소위 경건생활이라는 것을 일삼던 루터는 이 ‘오직 은혜’의 진리를 발견하고는 “나는 그때에 천국문이 나에게 열리는 것을 보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같은 시대에 많 사람의 존경을 받던 ‘에라스무스’라는 널리 알려진 인문주의자는 그와는 반대로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고 거기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적 결정과 노력이 공로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1524년 출간된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통하여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펴냄으로써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천명하였는데 이 두 사람 사이의 이른바 이 ‘자유의지 논쟁’은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에라스무스는 결국 믿을지 말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하였고, 루터는 인간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이 작용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한 학기 동안 루터가 1522년 비덴베르크(Wittenberg)에서 했던 설교 8편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매우 놀랐던 것은 ‘오직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설교를 통해 ‘행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매우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오직 은혜’를 투쟁적으로 주장했던 루터는 결코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무시하거나 간과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는 그 처음부터 확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뚝 서며 거기에 결단코 인간의 의지나 행위적 공로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이 성경적 사실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성경 전체에 걸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에베소서에 명시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과 하나님 은혜의 ‘살리심’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는 1장에서 그 우주적이고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사역 그리고 최종 확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성령 삼위하나님의 총체적이고 전격적인 구원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2장을 시작하면서 1-10절에 걸쳐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상태와 그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내용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1절)입니다. 여기서 ‘죽은’이라는 표현은 어떤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요소의 심각한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호흡이 끝난’, 말 그대로 ‘생명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구원작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동원하여 협력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위한 자유의지의 발동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은 시체에게 생명의 알약을 손에 쥐어 주면서 이것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과도 같으며, 죽어서 바다 속 심해 깊은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에게 생명의 줄을 내려주면서 이것을 붙잡으라고 말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즉 구원이 필요한 인간에게 먼저 필요한 것을 그 소리를 듣고 그 줄을 보고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 감각 즉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이 생명을 주시는 것이 구원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독단적인 은혜로만 가능하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인을 ‘개선인’ 혹은 ‘회복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중생인’ 즉 새로 생명을 받고 다시 태어난 자라고 부릅니다. ‘개선됨’ 또는 ‘치료됨’이라기보다는 ‘거듭남’입니다. 성경의 표현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5-6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사’라고 함으로 구원의 시작과 부활 후의 확증까지 보장함으로써 그 처음부터 완성까지 하나님의 독단적인 ‘오직 은혜’의 사역임을 쉽고도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4-10절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선물’이며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으며’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 원인에 있어서 하나님 바깥의 그 어느 요소도 개입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 내부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오직 은혜’에 의한 신적인 사역입니다. ‘오직 은혜’의 원리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 구원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무능한 인간의 손에 넘김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단순히 인간의 사역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이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최소한 스스로 무언가 행할 수 있다는 바리새적 영적 교만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신 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믿으며 ‘오직 은혜’로 진노에서 구출함을 받았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확신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바탕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장래의 은혜’

여기 ‘장래의 은혜’라는 표현은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님의 ‘grace in the future’라는 표현을 필자가 인용한 것입니다. 신약의 13개의 서신서들은 예외없이 서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to) 있을지어다’라고 시작하면서 결론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와(with) 있을지어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를 두고 존 파이퍼 목사님은 그 서신들이 읽힐 때에 독자들에게 임한 은혜가, 서신들을 덮고 생활의 현장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함께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는데 저도 그러한 해석에 동의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중생인들은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장래를 조망함에 있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인정합니다. 그 안에서 강할 수 있으며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32절에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롭게’ 주신다고 알려 주고 있으며 이는 곧 앞선 28절에서 말한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그 영광스럽고도 완벽한 구원의 은혜를 딛고서서 우리의 오늘과 장래도 그 은혜에 내어 맡기며 그것을 굳게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는 은혜

끝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은혜의 삶’의 최고 절정은 베풀고 나누는 은혜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신뢰하고 은혜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형편이 어렵고 부족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며 베풀고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불안하고 확보되지 않은 장래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내어 맡길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삶의 좋은 본보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 당시의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보여 주었는데 바울은 이 일을 아래와 같이 고린도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구하니”(고후 8:1-4). 그러므로 진정으로 은혜의 바다에 몸을 내던지고 은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없다, 없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삶의 시간들을 보낼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도 베풀고 나눌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위에 소개한 마게도냐 교인들이 경험한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했습니다. 좁고 협착하지만 ‘오직 은혜’의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함께함을 간절히 바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