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0-08 “그러나 성경이” 갈라디아서 3장 15-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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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0-08 경향의 강단(43)
2017′경향의 강단(43) (2017년 10월 8일 / 주일 대예배)
“그러나 성경이” 갈라디아서 3장 15-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169)

"그러나 성경이"

갈라디아서 3장 15-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기독교 교회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침례교회’, ‘감리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입니다.
  이 구분은 ‘교회의 정치가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른 것으로서, ‘침례교회’는 ‘회중’ 즉 ‘평신도 중심’으로, ‘감리교회’는 ‘목사들이 모인 총회’ 즉 ‘감독회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장로교회’는 자연히 ‘장로 중심의 교회’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목사나 신자라면 이 ‘장로교회’란 곧 ‘성경 중심의 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성경 중심’이라는, 간단하지만 명료하기 이를 데 없는 멋진 표현 역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오직 믿음’(sola fide)과 더불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또한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내세웠습니다.
  바로 그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무이한 규범’이라는 정신이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를 탄생시킨 대전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성경관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그들 또한 구약성경을 분명히 ‘믿는 자’들이었고 더구나 그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라고 자타 공인하고 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성경의 나무’도 ‘성경의 숲’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던 ‘소경’일 뿐이었습니다.
  본문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데, 율법주의자들은 구약 곳곳에 나오는 이 두 단어 중에 오로지 후자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이 두 단어들을 동시에 균형을 맞추어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사람에게 계시해 주시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본문을 통해 ‘오직 성경’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두 가지 실로 중대한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오직 성경’만이 ‘죄인을 위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계시해 줍니다.

  15절부터 18절에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구약 성경을 대할 때 오직 ‘율법’이라는 단어 하나에만, 속된 말로, ‘꽂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율법, 그것 하나가 마치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인양 곡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 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지적하면서, 성경에는 ‘율법’이라는 단어나 나타나기 훨씬 전에 “약속”이라는 실로 중요한 단어가 먼저 기록되어 있었음을 여기서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언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바로 본문 15절과 17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구약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율법’은 모세 시대에 주어진 것이지만, 이 ‘언약’은 바울이 지적하듯이 그보다 훨씬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원래 무슨 ‘개인적인 약속’이나 ‘사업상의 계약’을 두고 쓰인 말이 아니라 ‘유언’에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헬라 사회에서도 어떤 개인이 작성하고 공증하여 남긴 유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일부분을 수정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본문 15절에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고 바울이 언급하는 사실이 그 당시의 사회적 통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물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불변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셨던” 그 변치 못할 “약속”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그에게 ‘큰 민족과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가나안 땅과 거기서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통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약속이 거기에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가나안에 세워진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 국가로서는 다 성취될 수 없는 약속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자손’과 ‘땅’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영적 선민’과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영적 왕국’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뒤에 오고 올 수많은 택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16절에서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단수’를 쓰심으로써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약속의 완성자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언약’ 즉 ‘유언처럼 아무도 폐할 수 없는 약속’을 통해 택자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유업”은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으로서 율법보다 “사백삼십 년” 전에 이미 주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결국 결론적으로 사람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거저 주신 선물’ 일 뿐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직 ‘율법’밖에 볼 줄 몰랐던 유대주의자들은 이런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이라는 단어 하나만 이리 재어 보고 저리 달아 보다가 그들은 결국 ‘사람은 율법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는, 성경에는 전혀 없는 ‘이행득구’의 이단 교리를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약을 ‘모세의 율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 보지 않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바로 그 ‘약속’을 따라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즉 성경 전체의 주제는 결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구속사’인 것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대할 때에 마치 ‘길 없는 정글’같이 모든 것이 뒤엉켜져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신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방대한 내용들은 서로 상관이 없거나 또는 피차 모순이 되는 ‘자질구레한 말들의 덤불’로 뒤죽박죽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경험을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긴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왔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기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만큼 뚜렷한 한 가지 주제를 일관성 있게 기록하고 있는 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비록 ‘여러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책’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감동시킨 성경의 원저자는 단 한 분 곧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결과 성경은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가지 주제만을 뚜렷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속역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해 가고 계시는 인간 구원의 ‘완벽한 종합계획’(master plan)입니다.
  여기에 바로 ‘성경의 통일성’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큰 그림’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로 좁은 시야 즉 자기 시대에만 한정된 눈으로 역사를 판단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 역시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상황’(current affairs)에만 몰두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해 보아야 기껏 ‘냉전 시대’를 추억해 보고 ‘컴퓨터 만능 시대’를 예고하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들 ‘역사의 나무 몇 그루’만 보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인류 역사의 최초 시발점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이어지는 세계사 전체를 오직 성경에 기록된 ‘역사의 벽보’를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고 죄악이 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장차 오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영생과 영벌로 심판하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약 39권으로부터 신약 27권까지 맥맥이 이어지는 ‘언약’의 말씀을 통하여 이와 같은 ‘죄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우리에게 밝히 계시해 주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직 성경’만이 ‘나 자신이야말로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해 줍니다.

  바로 19절 이하 22절에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전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데 반하여 후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전해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재삼 확인된다고 사도 바울은 천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대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실제로 율법주의자들은 그처럼 사도 바울을 공박했습니다.
  “만약 바울 당신의 말대로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도대체 율법은 왜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당신이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의 복음 속에서 모세의 율법이란 아예 설 자리도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모독하는 자다.”라고 대들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보기에는 바울이야말로 “율법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행21:28)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거나 율법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적용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했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야말로 ‘율법’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숲’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무’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의 기능이 사람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능력하고 절망적인 죄인’임을 먼저 인식하게 함으로써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이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 19절과 22절에서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사도 바울이 일깨워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들을 다시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율법은 왜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저지른 죄를 밝혀 주기 위하여 (성경 말씀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증거합니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똑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했고, 로마서 4장 15절에서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고 했으며, 또 로마서 7장 7절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즉 법이 있어야 죄목이 뚜렷해지고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원리는 인간 사회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당신의 법을 성경에 똑똑히 명문화시켜 놓으심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앤드류 쥬크스(Andrew Jukes)는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사탄은 우리 사람이 율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거룩한 존재라고 증명하게끔 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라고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율법의 기능과 작용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약속하신 자손” 즉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가 되시는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존재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이 그 믿음 안에서 구원받게 될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며, 그 후에는 이미 완전히 ‘죄 사함’을 받은 상태이니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베풀어지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함 받는 은혜의 감격을 제대로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부터 인식하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아동용 서적 출판사에서 발행한 ‘왈도는 어디에 있을까?(Where’s Waldo)라는 유명한 시리즈 퍼즐이 있습니다.
  그냥 전체만 척 보면 무언가를 그린 그림인데 그 안에 ‘왈도’라는 인물이 숨어 있는 퍼즐입니다.
  그 퍼즐 안에서 ‘왈도’를 찾는 어린이들은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곧 지금 첫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찾아보면 그 그림 안 어딘가에 ‘왈도’가 꼭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책도 마찬가지인데, 단 성경에 있어서 ‘왈도’에 해당되는 인물은 곧 ‘나’ 자신입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큰 그림’ 속에는 ‘다른 죄인’들뿐 아니라 ‘나’라는 ‘나무 한 그루’ 역시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다른 사람 아닌 ‘나’야말로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 상태에 빠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율법’으로써 자신부터 저울질해 보지 않고는 ‘약속’의 은혜로운 참 맛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회(bypass)해 버리고 곧바로 복음으로 직행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명백히 어긋나는 곁길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십자가의 대속 복음에 진실로 감사 감격할 줄 모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소위 ‘인품 좋고 덕망 높다’는 목사들은 죄를 책망하면서 동시에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엄중한 유죄선언을 내리고 있는 ‘율법’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 결과 구약은 아예 덮어 놓고 신약만 은혜롭다고 가르치는 ‘비뚤어진 신학’과 ‘반신불구의 설교’가 강단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가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라고 한탄했던 일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은 빠져 있는 복음’이란 실로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더러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진주의 아름다움을 결코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밤하늘이 배경이 되어야만 별빛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의 죄와 그 받아 마땅한 심판이라는 어두운 배경이 먼저 눈에 들어와야만 그 가운데 빛나는 ‘계명성’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로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얻어맞고 찢겨져 있어야 우리는 그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복음을 간절히 소망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저주의 속박에 꽁꽁 묶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자유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지옥의 절망감을 먼저 맛보아야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고 약속으로 구원받게 되는 은총을 절실히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야말로 구세주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이 꼭 필요한 ‘죄인’임을 엄중하게 일깨워 주고 있음을 똑바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천주교는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라는 소위 ‘이행득구’를 주장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했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눈을 뜨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이행득구’란 성경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명백한 이단 교리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도대체 천주교는 어떻게 이런 무서운 일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에 있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우리 장로교회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의 규범’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천주교는 어떤 줄 아십니까?
  그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제일의 규범’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유일’이라는 단어 대신에 ‘제일’이라고 딱 글자 하나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유일’이란 ‘오직 하나’라는 뜻이며 반면에 ‘제일’이란 ‘제이, 제삼’ 등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음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 ‘첨부되는 신앙과 행위에 대한 규범’이 곧 ‘교황령’이나 ‘교회 법령’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교황의 말씀도 성경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천주교는 그보다 한 술 더 뜹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있음으로 해서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바른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어처구니없게도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신구약 성경을 집대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교회가 공회로 모여서 신구약 성경에 포함될 각 권들을 지정했으니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교회가 성경을 모은’ 것이 결코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만드셨던 성령’께서 ‘공회에 모인 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신구약 66권을 확정하도록 역사하셨을 뿐입니다.
  즉 ‘성경을 쓰신’ 분이나 ‘성경을 모으신’ 분이나 동일하게 오직 ‘성령 하나님’ 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산물’인 교회를 오히려 성경 위에 둔 천주교는 바로 그 때문에 온갖 이단적 교리와 행위들이 뒤를 이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성경’만 따르는 대신에 ‘오직 교회’를 더 위에 세우게 되니 결과적으로 ‘오직 그리스도’ 대신 ‘오직 교황’, ‘오직 하나님께 영광’ 대신에 ‘오직 나 자신의 공로’ 따위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즉 ‘오직 성경’을 떠난 순간 천주교는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교권주의’와 ‘인본주의’의 이단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천주교는 소위 ‘교황 무오설’을 비롯하여 ‘성자 숭배’ 등을 통해 ‘사람이 스스로 의인인 척 과시하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고’ 있지 않습니까?
  교황이고 성자고 간에, 아니 천주교에서 ‘무흠한 성모’라고 주장하는 마리아까지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죄인일 뿐이라고 성경은 엄중한 선고를 내립니다.
  그처럼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선행을 통해 공로를 쌓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현대판 율법주의자의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구원을 오직 믿는 자에게만 주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길은 무슨 ‘면죄부’나 ‘교황의 희년 선포’나 ‘성모 마리아의 중보’ 따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행하고 계시는 구속역사’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신구약 66권 전체가 명명백백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의 슬로건을 소리 높여 외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배들의 후예로 자처하는 오늘날의 개혁주의 기독신자답게 예나 지금이나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규범’임을 굳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