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10-01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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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10-01
2017′경향의 강단(42) (2017년 10월 1일 / 주일 대예배)
10월 1일(주)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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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갈라디아서 3장 1-14절 / 석기현 담임목사
‘슬로건’(slogan)이란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를 홍보하거나 또는 대중의 행동을 고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짧은 문구’를 가리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리의 귀에도 익숙해진 대표적인 슬로건을 들어 보자면, 맥도날드 햄버거 회사의 “I’m lovin’ it.”(난 그게 좋아.)이라든지 드비어스(De Beers) 회사의 “A diamond is forever.”(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혹은 나이키 회사의 “Just do it.”(그냥 해 버려.) 등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몇 개의 유명한 슬로건들을 내걸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곧 ‘오직 믿음’(sola fide)이었습니다.
  이 짧고도 아주 강력하며 간단하면서도 매우 심오한 슬로건 하나가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수적으로는 상대도 안 될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이라는 그 거대한 ‘짐승’을 끝내 이기고 마는 엄청난 용기와 힘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 종교개혁자들의 후배 목사와 신자들은 바로 그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 하나만 가지고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깨닫고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소중한 ‘오직 믿음’에서 떠난 일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부터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신랄한 어조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이란 말은 바로 ‘멍청한, 바보 같은’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마법에 걸린, 넋을 빼앗긴’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로서는 아주 거친 표현까지 써 가면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책망했던 이유는 그들이 다른 이단적인 교훈의 “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참으로 뜻깊은 달의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슬로건이었던 ‘오직 믿음’에서 떠나 온갖 ‘사탄의 꾀는 말’에 넘어가고 있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이제는 오히려 다수가 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적어도 ‘종교개혁자의 후예’로 자처하는 신자라면 왜 이 ‘오직 믿음’의 신앙을 절대로 놓치지 말고 꼭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2절부터 5절에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음과 성령 사이에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역설하면서, 우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었다고 천명했습니다.
  즉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간 바로 그 순간이 곧 성령의 사역이 시작된 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구든지 분명한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곧 성령을 받았음이 확실하다는 뜻도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첫 신앙 체험의 순간을 돌이켜 보면서 바로 이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질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중에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 함으로써 성령 받은 체험을 하게 된 사람이 있었느냐? 아니면 믿게 된 순간에 자기가 성령 받았음을 깨달았느냐?’라고 일깨워 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는 그처럼 믿음을 얻은 이후에도 성도의 생활 속에서 계속 작동하게 됩니다.
  4절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많은 괴로움”이란 곧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던 온갖 시련과 고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처럼 ‘괴로운 시험’도 오로지 성령의 능력으로 얻게 된 믿음만 가지고서 이제까지 잘 견디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즉 ‘이것은 너희들의 경험을 통해 내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일이다.’라고 시작하는 말 그대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생생하게 증거될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그들 스스로가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본인이 “율법”을 지킨 “행위”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따라온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방법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 성령을 무슨 상처럼 내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듣고 믿는 자’가 계속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의 힘을 통해 역사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신자이면서도 착각하고 오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믿음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분명히 있으면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며 마찬가지로 ‘성령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곧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조차 모르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무슨 방언이나 신유 따위의 ‘은사’를 받아야 성령을 제대로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은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이 바로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이단 전도자가 “당신은 정말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추궁하듯이 물어오면 “글쎄요.” 하면서 당황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양자가 다 영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참된 개혁주의 신자는 자기 속에 생긴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분명히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바로 그 성령이 그 이후에도 우리로 하여금 많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가장 큰 역사’는 바로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이지 무슨 ‘은사’를 받게 해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순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견 ‘성령으로 시작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육체로 마치는’, 즉 바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교인’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소위 ‘은사주의’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사주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신자들에게 ‘직접 계시’를 주고 계신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중심의 복음’에서 떠나 건전한 교리를 파괴하고 있으며, ‘의미 없는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인정함으로써 ‘신령과 진정의 예배’ 대신에 흥분된 감정과 무분별한 황홀경을 부추기는 무질서한 예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는 “성령께서는 황홀경을 일으키는 전류나 허튼 소리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말쟁이나 건강과 부를 갈구하는 이기적인 소원을 무작정 들어주는 우주의 요정이 아니시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대다수의 은사주의에서 가르치는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의 영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능력’은 무슨 ‘은사’를 베풀어 주기에 앞서 먼저 바른 ‘믿음’을 얻게 해 주는 데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서 세계적으로 더욱 확장되고 있는 ‘은사주의’는 실상 성령을 가장 오도하고 있는 ‘어리석은’ 교리임을 깨닫고, ‘오직 믿음’만 분명히 있으면 이미 그 누구보다도 ‘성령 충만’을 확실히 받은 신자인 것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직 믿음’만이 우리에게 ‘칭의의 복’을 누리게 해 줍니다.

  본문 6절로 9절에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당시 모세의 율법을 오용하여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가르치던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에게 결정타를 던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인용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전해 준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인물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하늘처럼 우러러보던 ‘믿음의 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이야말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있게 한 ‘조부 중의 조부’였으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게 만들었던 ‘근원’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 인용되고 있는 말씀들은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들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편에서 그 어떤 선행 따위를 준행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그의 귀에 들려주시고(창 12:3) 그의 눈앞에 펼쳐 보여 주시면서(창 15:5) 몇 차례나 재확인까지 해 주셨던(창 22:17-18)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면(창 15:5), 그는 그저 “여호와를 믿었을”(창 15:6) 뿐이었습니다.
  자기 나이를 비롯하여 모든 현실적 상황이 그런 엄청난 약속을 믿기에는 너무나도 요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그냥 철저히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해” 주셨다고 창세기 15장 6절 하반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문 6절에서 증거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복이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슨 ‘자손이 넘치고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그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 중에 최고최대의 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복’이 곧 ‘먼저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본문 7절부터 9절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믿음만 가지면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그 ‘택함 받은 자손’이 되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모든 세계만방의 백성에게 활짝 열린 축복의 길이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바로 이 복을 내리시면서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창세기에서 이미 선포하셨음을 사도 바울이 본문 8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고 내 자식이 잘되는 것들만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복은 정말이지 ‘이방인들도 구하는’ 아주 흔하고 값싼 복에 불과하며, 바로 ‘기복주의’ 교인들의 ‘어리석은’ 기도제목입니다.
  은사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복주의 역시 기독교를 아주 저질의 종교 내지는 이단으로까지 끌어내리는 요주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옛날 돌과 나무 앞에서 손을 비비며 절하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라고 하던 것을 그저 돌과 나무 대신에 십자가로, 신령님 대신에 예수님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현대판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는 그 무엇보다도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고 그 하나님의 양자가 된 사실이야말로 그야말로 공짜로 굴러들어온 최고의 복덩어리인 줄로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복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특별사면을 받아서 마치 무죄 방면된 사람처럼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한 복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아가 정말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어서 살게 되었다면 그것보다 더 복스러운 일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칭의’를 입고 ‘양자’의 유업까지 누리게 된 사람이 아직도 자기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줄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돈 주십시오, 승진시켜 주십시오, 제 자식이 대학에 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마치 자기가 제일 불운한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징징대고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라 하면서도 가장 큰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다고 다고’만 외치는 어리석은 기복주의 교인이 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최고의 복’인 ‘칭의의 복’을 나도 누리게 되었음을 진정으로 감사드리는 ‘하나님의 양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오직 믿음’이 우리를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게’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0절로 14절에서 “10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성도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고 복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저주”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복’을 내리신다는 말은 듣기 좋아하지만 ‘저주’를 내리신다는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본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라고 해석함으로써 그 뜻을 억지로 완화시켜 보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율법이 축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율법이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것과 동격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율법의 저주”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그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시는지를 똑똑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를 그 ‘율법의 저주’ 즉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이끌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한 대로 여기에는 그 어떤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행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 앞에 참으로 믿기지 않는 기적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라는 말의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having become a curse for us)입니다.
  ‘예수님이 저주가 되셨다.’라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표현이며 사실 감히 쓰기도 두려운 말이라고 할 만한데,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 바울은 글자 하나하나를 그 의미하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저주의 대상’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씌워져 있던 하나님의 저주를 당신에게 ‘통째로 옮겨 씌우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인용을 통해 더욱 뚜렷하게 확인됩니다.
  즉 구약에서 사형 집행 후에도 그 죽은 자를 나무에 매달아 놓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었다는 사실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 역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될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던 “우리를 위하여” 그 저주를 대신 받으셨고, 죄인이 피할 길 없던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나무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전혀 불가해한 모순처럼 보이는 십자가에는 이처럼 오묘하기 짝이 없는 구원의 진리가 충만하게 차 있으며, 진짜 “의인”은 오직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의사를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에 대하여서 그 환자 자신이 다 배우고 이해해서 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의사의 의술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병은 의사가 고쳐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열심히 도를 닦고 무언가를 깊이 깨달아야 지옥 저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통하여 다 처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예나 지금이나 주장하는 ‘이행득구’ 즉 ‘사람은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이런 성경의 진리를 명백히 거스르는 대표적인 이단 교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가지고서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고 반드시 ‘본인의 선행’이라는 공로가 추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 이보다 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폄하시키는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람 편의 그 어떤 노력이라든지 공로라는 요소가 전혀 포함될 수 없으며 ‘오직 믿음’ 즉 그저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가치란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도 말하기를 “믿음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오직 귀한 보배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저 무서운 지옥의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똑바로 기억하고 끝까지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것은 천주교에서도 똑같이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천주교의 교리에는 ‘오직’라는 이 결정적인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오직 믿음’은 신구약 곳곳에서 명백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오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멋대로 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 곁에다 ‘본인의 선행’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그처럼 ‘선행’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만들어 놓아야 ‘면죄부 판매’를 비롯해서 ‘성지순례’나 ‘성자의 유물 숭배’ 등을 통해서 그야말로 ‘짭짤한 돈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신실하고 열성적인 사제였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도 바로 이 ‘오직’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이 라테란 성당에 있는 ‘빌라도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연옥에서 형벌이 감해진다고 가르친 말을 그대로 믿고 그 ‘성지’를 찾아가서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8개의 계단을 다 오른 후에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찾아오지 않았고 그 대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그 ‘오직’이라는 단어가 ‘믿음’을 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순간,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이 참된 교회가 결코 아니라 천 년 동안이나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고 그 삶을 탈취해 온 거대한 교권주의의 이단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only)이란 ‘그것 하나뿐이며, 그 하나만으로 충분한’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단어입니다.
  천주교는 이 ‘오직’을 간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란 온갖 ‘은사주의’와 ‘기복주의’ 및 ‘이행득구 교리’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것 하나만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데도, 그 ‘믿음’에다가 ‘마리아 숭배’도 갖다 붙이고 ‘성지 순례’도 더하고 ‘교황 무오설’ 따위를 첨가하니까 결국 ‘총체적인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선배들 덕분에 그 ‘어리석은 이단’에서 벗어나게 된 오늘날의 기독신자들이 다시 그 ‘꾐’에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를 믿는 이 ‘오직 믿음’만 있으면 그 누구라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칭의의 복’을 누리며 끝내 ‘저주에서 벗어나 영생구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실로 ‘마귀에게 넋을 빼앗긴, 사탄의 마법에 걸린’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의 달’을 통해 더욱 이 ‘오직 믿음’(sola fide)의 신앙을 똑똑히 되새기고 더욱 굳게 붙잡음으로써, 진정 ‘보혜사 성령님의 내재’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양자의 자격’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구원’의 은총을 평생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