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9-24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이사야 36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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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2017′경향의 강단(41) (2017년 9월 24일 / 주일 대예배)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이사야 36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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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이사야 36장 1-2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중학생 시절에 애송했던 시 중에 하나가 ‘석상(石像) 노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박봉우 시인이 고등학생 때 어느 문예지에 응모해서 당선된 시였습니다.
  중간의 일부를 생략하고 인용해 본다면 이런 시입니다.
  “너를 믿고 살아야 / 너를 믿고 살아야 / 하늘과 태양만 있으면 그뿐인 너를 믿고 살아야 (중략) 풀이파리 타질 듯 징글징글한 더운 여름에 목이 마르면 소낙비를 맞으며 / 겨울에 매운바람이 불면 하얀 눈송이를 이슬로 만들어 살아야 / 말없이 살아야 (중략) 바보라고 비웃어라 사랑의 패배자라 비웃어라 / 그래도 잔디밭에 버섯처럼 피어 영원한 침묵 속에 못난 체 살아야 / 오랜 세월을 눈물 한 번 없이 살아야 / 웃음 한 번 없이 살아야 너를 믿고 살아야 / 너를 믿고 살아야 / 하늘과 태양만 있으면 그뿐인 너를 믿고 살아야 / 계집애 같은 눈물과 웃음의 꾸밈도 없이 벙어리인 체 살아야 / 너를 믿고 이 목숨이 살아가야” 제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어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 하나로만 그것을 이겨내는 상황을 묘사한 것 같은데, 이런 시를 고등학생 나이에 썼다는 것이 참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성의 백성들도 바로 ‘누구’를 혹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그들의 생사를 좌우하게 될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그것은 곧 1절부터 3절에 나오는 대로, 당시 이미 북조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왕이 이제 남조 유다를 침공하여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예루살렘성마저 함락시키려고 그의 군대장관 “랍사게”의 지휘 하에 “대군”을 파견하였을 때였습니다.
  랍사게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예루살렘성 서쪽 외곽에 위치한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이라 불린 장소에서 “엘리아김”을 위시한 히스기야의 중신들 몇 명을 만나서 성 위에 있던 백성들이 역시 같이 듣고 있는 가운데 유다의 항복을 권유했는데,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4절에 보면 “4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앗수르 왕 산헤립은 랍사게 장군을 통해 히스기야왕과 유다 백성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감히 내게 대항하려 하느냐?’라고 공갈협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예나 지금이나 기독신자에게 항상 주어지는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라면 당연히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하나님보다 더 믿을만하게 보이는 것’들의 미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주어진 말씀을 통해 우리 기독신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꼭 명심하고 조심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하나님보다 더 강해 보이는 세상나라’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5절과 6절 및 8절과 9절에 “5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6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8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9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여기서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라고 한 것은 유다 백성의 아픈 데를 정곡으로 찌른 말입니다.
  당시 열방의 침략에 이리저리 시달림을 당하고 있던 유다는 그 대응책으로 주변의 이방국가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랍사게가 전한 말 중에 나타나듯이 유다는 특히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 왕 바로” “의지”함으로써 앗수르 제국에 대항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좀 아이러니한 사실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유다는 사마리아와 아람의 연합군으로부터 위협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라.’고 가르쳤지만, 당시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는 그 위기를 앗수르 제국의 힘을 빌어서 벗어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앗수르 제국은 더 강성해져서 오히려 유다까지 넘보았고,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유다는 이제 애굽에게 손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은 지금 랍사게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고 비꼬는 말 그대로 이미 쇠퇴기에 들어서 있어서 유다에게 아무 “병거와 기병”의 원조를 보낼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그 애굽을 하나님보다 ‘강한’ 존재로 여기면서 ‘의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유다의 모습은 불신자인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기에도 참 한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들이 정작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 하나님은 간 곳 없고 여기저기 세속적 세력에 빌붙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 꼴을 보고 산헤립이 이처럼 경멸하며 조롱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중국을 의지해야 나라의 경제도 살리고 ‘미제국주의’의 압력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어느새 국회의원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미국을 믿지 말라.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은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해라.”는 말을 흔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는데, 어쩌면 중국은 과거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항상 받들어 모시던 나라였으니까 그랬을까요?
  하기는 주한미군의 훈련 도중에 난 사고를 두고서도 마치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이 ‘반미 데모’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이 중국 어부가 우리나라 해경을 흉기로 찔러 죽였을 때에는 그 흔한 ‘촛불’ 하나 켜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사대주의적 잠재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국이 우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할만한 나라이겠습니까?
  지금 조금 나라가 성장한다 싶으니까 당장 주변의 약소국들에게 대한 통치권과 영토권들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고구려사까지 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은 이미 북한을 현실적으로 속국화시켜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속으로는 우리 대한민국까지 넘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이야말로 한반도의 남북통일에 끝까지 실질적인 방해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제는 북한의 핵 위협까지 받게 된 이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이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정말 간절히 붙잡고 의지하는 나라가 되는 것 -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구호가 아니라 이 대한민국의 국방과 안보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요 최선의 방책인 것입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조금만 정신 차려 생각해보면 정말 ‘썩은 갈대 지팡이’에 불과한 것들을 마치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처럼 믿고 의지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이나 나라는 그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게 오히려 ‘찔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와 국제사회에서 하나님보다 더 유력하게 보이는 ‘애굽’들은 우리에게서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빼앗아 가려는 사탄의 미혹인 줄을 깨닫고, 오직 ‘뭇 나라 가운데서 선민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시는’(시 126:2) 여호와 한 분만을 끝까지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편해 보이는 금세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부터 17절의 말씀에 “11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하건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에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12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13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14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15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16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요 17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의 신하들은 랍사게의 선동을 유다 백성들이 듣고 동요할까 두려워하여 그에게 “아람 방언”으로 대화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랍사게는 ‘앗수르 왕에게 끝까지 대항하면 성 안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결국 자기의 대변 소변을 먹고 마시게 될 모든 유다 백성에게 이 말을 해 주려고 내가 왔다.’라고 실로 모욕적이고도 위협적인 언사를 여전히 “유다 방언”으로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면서 랍사게가 유다 백성에게 더 크게 외치며 전해 준 산헤립 왕의 말은 우선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주변 국가의 위협 가운데 유다 백성 대부분의 민심이 애굽을 의지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산헤립은 그 말을 듣지 말라고 유다 백성들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만적 선동은 지금 만일 자기에게 “항복”하면 유다 백성들이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시게” 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 즉 이 유다 땅과 똑같이 먹고 살기에 좋은 땅으로 ‘이주’도 시켜 줄 수 있다고 거짓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산헤립왕의 말은 유다 백성에게는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히스기야왕의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만 계속 신뢰한다는 것은 실상 아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턱 밑에 다가와 있는 앗수르 군대와 전쟁을 각오해야 할 뿐 아니라, 장기간 포위당할 경우 정말 대소변을 받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릴 것이며, 무엇보다도 방어전에 실패할 경우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할 엄청난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저 지금 당장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는 것은 훨씬 편해 보였습니다.
  목숨을 살려 줄 뿐 아니라 평안한 생활까지 보장해 주겠다고 하니, 하나님만 믿다가 온갖 고생과 큰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간단하고 확실한 선택처럼 보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똑같은 유혹이 우리 기독신자에게 찾아옵니다.
  목사의 설교 말씀대로 살자면 여러 가지로 귀찮고 힘들고 정말 고생을 사서 하는 일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편안히 쉴 수 있는 하루를 더 피곤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로만 들립니다.
  경건생활에 힘쓰고 선한 일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은 내 여가를 더 재미있게 만끽할 수 있는 자유와 정력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헌금을 약속대로 다 바쳐야 한다는 말은 내 여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저금통장의 돈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현세와 내세 전부를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과 구원에만 의지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그저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설교는, 요즘 같이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며 문화와 여가생활을 즐기려는 시대에는 도저히 말도 안 될 ‘억지 강요’처럼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아예 불신 세상과 짝하고 거기에 들러붙는 것은 일견 더 없이 편안하게만 보이지 않습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술담배 하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거리낌 없이 연애질 하고, 남는 돈은 노후생활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도록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 가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일단 하나님에게서만 벗어나면, 일단 교회만 떠나면, 일단 신앙생활만 포기하면, 저쪽 세상에는 이제 더 이상 부담스러운 생각으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조금도 없는, 정말이지 완전히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노리고 있는 ‘산헤립’이 오늘도 기독신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교묘한 낚싯밥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진짜 ‘웰빙’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는 사실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더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곧 불신 세상과 짝하며 마귀의 종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사망에서 능히 건지실 하나님’만을 끝까지 의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인본주의 종교’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18절 이하 20절에 “18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19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20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산헤립왕의 인본주의적 종교관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하맛”은 다메섹 북쪽에 위치한 수리아의 한 성읍이며 “아르밧”은 그 하맛과 동맹을 체결했던 성읍이었는데, 둘 다 앗수르 제국에 의해 정복을 당했습니다.
  “스발와임”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성읍으로서 “사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이미 앗수르 제국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산헤립왕은 그처럼 앗수르 제국의 칼날 앞에 자기를 섬기는 백성조차 지켜내지 못한 “열국의 신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도 별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립에게 있어서 신이란 이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처럼 대제국을 호령하는 위대한 군주의 능력 앞에서는 신이라 할지라도 꼼짝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기고만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이란 개념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산헤립왕은 앞에서부터 이미 이처럼 ‘여호와 유일신앙’에 대해 도전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7절에서 랍사게 장군은 “7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고 했는데, 물론 이것도 산헤립의 말을 전달한 것입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왕이 헐어 버렸던 “산당과 제단”들이 우상 신들과 여호와 하나님이란 신이 함께 ‘공유’하는 것인 줄로 여겼습니다.
  즉 이 말은 ‘히스기야는 너희더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해 놓고도 그 하나님의 제단들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것 딱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 버려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니, 너희들이 그 하나님을 의지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그들은 결국 다 같은 신이라는 ‘범신론’에 젖어 있었던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는 히스기야왕의 ‘유일신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0절에서도 산헤립왕은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10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고까지 떠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산헤립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든지 혹은 그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너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뜻 역시 분명히 너희를 멸하는 것이다.’라고, 실로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산헤립왕의 종교관이란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은 전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뜻과 능력만을 최고로 높이는 ‘인본주의’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그저 대제국의 왕인 자기의 뜻을 따라 맞장구쳐 주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어쩌고 함으로써 그 신들로 하여금 자기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만드는 것이 곧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이란 ‘무조건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산헤립의 종교’로 사람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무슨 종교를 믿든지 간에 결국 다 같은 것이며, 그뿐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자기 마음에 무언가 의지하는 바나 확신하는 것이 있으면 그 자체가 바로 종교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보다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일견 지극히 타당하지 않습니까?
  ‘이런 범신론적 인본주의 종교를 통해서 결국 인류는 더 선하고 지혜로우며 더 행복하고 능력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 끝없이 성장해 나가 끝내 이 우주에 존재하는 최고의 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가 솔깃해지는 ‘명언’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 한 분만을 믿어야 하고 다른 우상종교를 배격해야 하며 그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섬기는 가운데 신행일치의 열매까지 나타내야 하는 신앙생활’이란 정말 이해하기도 힘들고 따르기도 피곤한, 아주 복잡하고도 어려운 종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나한테 절만 한번 꾸벅하면서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네게 주겠다.’(마 4:9)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인 것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너희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불신앙적 선동에 결코 끌려가지 말고,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는 ‘여호와 유일신앙’만을 굳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사람의 마음에 혼란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언비어를 살포했습니다.
  ‘첫 사람’은 바로 이런 간단한 미혹에 어처구니없게 넘어감으로써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사망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똑같은 사탄이 지금도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라고, 이 시대의 기독신자들을 불신앙으로 유도하는 질문을 ‘유다 방언’으로 요란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을 믿고, 그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며, 그 주님의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과연 하나님이 마지막 날 정말 너희에게 영생 구원을 주겠느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도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이 세상에 많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그저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거짓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의 소원과 욕구를 성취시켜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거짓말에 또 넘어가면 이제는 정말 끝장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속았으면 됐지 두 번 속아서야 되겠습니까?
  다음 37장에 나타나는 대로 히스기야 왕과 유다 백성은 이런 산헤립의 기만전술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함’으로써 결국 기적적인 구원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적군이 총알 한방도 쏘지도 않고 그저 거짓 선전만 늘어놓고 있는데도 그것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사탄이 무슨 물리적인 핍박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가지고 떠벌이고 있는데 신자라는 사람이 거기에 넘어간다면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아마겟돈 전쟁’ 같은 실전이 닥친 것도 아닌데 그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벌써부터 귀가 솔깃해진다면, 진짜 시험과 환난이 닥쳐서 예수 신앙을 자기 생명과 바꾸어야 할 자리에 서게 될 때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자’는 무슨 강대국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온 세상조차 감당치 못할’ 무적의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만 끝까지 의뢰하는 신자’는 ‘산헤립이 약속하는 곡식과 포도’ 정도가 아니라 ‘영생의 만나와 생명수’를 먹고 마시는 ‘천국의 웰빙’을 누리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 믿고 그 앞에 예배하는 신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동거하는 장자의 총회’에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무엇이 어떻게 되더라도 그저 ‘하나님만 믿고 이 목숨이 살아가야’ 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까지 사탄이 ‘할 수만 있다면 택자까지 미혹하려고’ 곳곳에서 외치고 있는 교묘한 기만선동에 결코 넘어가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의뢰하는 신앙’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시험을 이기는 가운데 끝내 원수를 물리치고 영광의 구원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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