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9-17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이사야 26장 8-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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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9-17 경향의 강단(40) 총회S.F.C.주일
2017′경향의 강단(40)(2017년 9월 10일 / 주일 대예배)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이사야 26장 8-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주일낮예배 / 총회S.F.C.주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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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이사야 26장 8-19절 / 석기현 담임목사

  ‘환자의 마음자세가 환자의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의사들이 실제로 많이 경험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병에 대해서 그저 비관하며 절망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환자에 비해 낙관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환자의 완치율이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어렵고 괴로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그것을 대하는 정신 상태가 그 상황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그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이 이사야 26장은 소위 ‘이사야 선지자의 작은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부분에 속해 있는 장입니다.
  즉 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속사’ 특히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대조가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기독신자가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대표적인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악인이 형통할 때’와 ‘의인이 환난을 받을 때’입니다.
  이 둘 다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인 상황이며 납득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생각해도 당연히 ‘악인이 환난을 당하고 의인은 만사형통해야’ 마땅한데, 현실에서는 그것이 거꾸로 나타날 때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 그저 괴로워하고 원통스럽게만 여기면 그 스트레스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지만,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지혜를 따라 대처하게 되면 실로 놀라운 ‘자가 치료’가 절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놀라운 ‘마음자세’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악인과 의인에게 벌어지는 일견 모순적인 현실 가운데서 기독신자가 과연 어떻게 그런 상황을 ‘낙관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극복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악인이 형통’할 때에 기독신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8절부터 14절에 “8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0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11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12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13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4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 기독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신자들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른 생각 중에 하나가 바로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사실, 곧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라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은 ‘심판’이란 단어만 들어도 펄쩍 뛰고, 사실 명색이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에게 심판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속성을 제멋대로 정의해 버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참된 신자는 그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부처럼 여기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라고 좀 어색하게 직역되어 있는 말은 ‘무언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신자가 자기 눈앞에 벌어지는 어떤 일을 보고서 ‘아!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라고 절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게 되는 경우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게 만들어 주는 일들이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후의 문맥을 볼 때, 그처럼 ‘주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일’이란 곧 ‘하나님의 심판 역사’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앞에서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며, 이어지는 9절에서도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를 생각하면서, “밤에(도)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할” 정도로 그 심판의 날을 기다리면서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심판’ 역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성호를 지극히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신자는 왜 그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사모’하고 ‘간구’하면서 기다리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악인들로부터 당하게 되는 고통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 하반절에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만 세상 사람들이 참된 공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직전까지 그 ‘하나님의 공의’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 교만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10절이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악인이 지금 세상에서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며’라는 뜻입니다.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라고 한 대로,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는 오직 정직한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지시켜 주고 계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악인들은 그런 땅에 살면서도 오히려 신자들을 핍박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악인들이 스스로 교만하고 신자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은 곧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즉 ‘하나님의 주권을 무서워할 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신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꼭 있어야 하겠고 또한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지금은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것을 “보지(도) 아니하는” 악인들이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 즉 당신의 사랑하시는 의인들을 위해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는”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성을 보게 되는 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질 때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는” 즉 악한 권세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중에서도 오직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던” 참된 신자의 억울함을 완전히 풀어 주는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 악인들로 하여금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만큼 철저하고도 완벽한 “벌”이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모든 기억” 즉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 하며 신자들을 마음대로 핍박했던 기억 따위는 깨끗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악인에게 핍박당할 때나 혹은 자기 민족이 주변 열강으로부터 압제와 침략을 당할 때에 바로 이 심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넉넉히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인이 흥왕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꼴도 보기 싫고 속이 뒤집히지 않습니까?
  악인이 지금 만사가 자기 뜻대로 잘 풀려 나간다고 자랑하면서 의인을 마음껏 조롱하고 박해하는 것은 정말 한에 맺히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마치 온 세상이 이미 자기네 것이 되어 버린 것처럼 설치고 있는 종북좌파들로 인하여 바로 그런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불법적인 폭력행위를 저질러 놓고서도 민주화투쟁이라고 미화시키고, 자기네의 억지논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조리 다 적폐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그들의 목소리와 세력이 날이 갈수록 하늘높이 치솟고 있는 가운데, 그야말로 ‘정직한 자’가 설 땅조차 없어지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모순적인 현실에만 사로잡혀서 괴로워한다면 그 딜레마 속에 점점 더 깊이 빠지면서 모든 상황은 갈수록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말로 정말 ‘미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딜레마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악인들을 완전히 ‘멸하실’ 한 날을 예비해 놓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든 악인의 불의와 악행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벌’하시고 그 모든 의인의 억울함과 한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실 ‘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집행될 마지막 한 날은 필연적으로 오고야 맙니다.
  지금 당장은 이 나라 안에서 온갖 불의가 판을 치고 하나님의 대적들이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를 떨치고 있지만, 조국에 여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의인 십인’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위하여 ‘열성’을 보여 주실 날이 틀림없이 도래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 악인들은 자기네가 의인들을 그 얼마나 불의하고 악하게 대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악행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와야만 지금 우리 기독신자들이 이처럼 경외하면서 사모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그 얼마나 ‘공의로운 이름’인지가 만천하에 똑똑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악인들이 기고만장하면서 온 세상이 마치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처럼 설치고 있을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공의의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길’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그런 악인의 형통에 대해 더 이상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실로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고 의롭게 살다가 불신사회와 불신자들로부터 불의한 일, 악한 일을 당할 때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고 선포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림으로써, ‘주께서 땅에서 모든 악인을 심판하시며 세계의 거민이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될’ 그 최후승리의 날을 꼭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의인이 환난’을 당할 때에 기독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끝까지 앙모해야 합니다.

  15절 이하 19절에 “15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은 세상에 종말이 임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이 완성될 때, 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과거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을 회고하게 될 내용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에서 계속 확장되다가 마침내 천당에서 완성된 순간을 찬양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 천국성도들은 특히 그들이 “환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통과했었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16절에 보면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들”이란 곧 하나님의 택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 동안에는 바로 이들에게도 “환난”이 임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무슨 저주나 심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주의 징벌”로서 내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참된 신자는 자기에게 어떤 환난이 닥칠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더 큰 시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만드시기 위해 내리는 경책과 징계로 받아들이면서 더욱 “간절히 주께 기도하며” 매달릴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상황이 더 악화될 때인데, 바로 이어지는 17절과 18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처럼 환난 중에도 그것을 겸손하게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면서 인내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곧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계속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시기를 통과하고 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 징벌은 마치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길고도 극심한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유다의 포로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당하는 ‘해산의 진통’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산고는 그래도 자식을 낳는다는 기쁨으로써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만,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유다인들의 고통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18절에서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산고의 고통을 겪었으면 그래도 어떤 생명을 낳아야 보람이 있을 것인데, 유다인들의 고통은 아무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떤 ‘새 생명을 출산’시키지도 못한 채 그냥 고통 그 자체로만 끝없이 연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대가’가 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벌을 받은 것 때문에 죄가 감해져서 구원 받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 소리는 바로 천주교에서나 가르치는 엉터리 교리일 뿐입니다.
  ‘산고의 진통’ 같은 큰 징벌을 받아도 그 어떤 ‘구원’의 결과나 ‘새 생명’의 생산은 보지 못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징벌이 때로는 그처럼 길게 이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산고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 확실한 ‘회개’를 나타냄으로써 결국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19절이 증거하는 대로 그처럼 ‘연단’을 잘 통과한 신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며” “티끌에 누운 자들” “깨어 노래하게” 되는 놀라운 ‘부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신자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아무리 길고 고통스러워도 그 환난을 처음 당했을 때 보여 주었던 자세 곧 “주를 앙모하며” “간절히 주께 기도하는” 이 신앙을 끝까지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점점 ‘꼬이기만’ 하면 신자라 할지라도 낙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악재’만 연달아 벌어지는 것은 정말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절로 의심에 빠지고 끝내 불신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교인이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를 상대로 소송하는 일이 가끔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벌어집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은 후에 병세가 악화되면 ‘의료과실’로 소송을 하는 것처럼, 자기가 목사의 설교나 상담을 듣고 그대로 따라해 보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났다는 이유로 일종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사실상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목사의 설교나 상담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순종했더니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직접 대어드는 실로 오만불손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목사의 입장에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성경 말씀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도 그 인생이 전혀 풀리지 않고 오히려 ‘환난’이 연이어 닥치는 교인을 보게 되면, 굳이 그렇게 ‘소송’을 하지 않아도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죄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결코 목사나 교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먼저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죄’가 없는지부터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의인이 당하는 환난’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연단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내리시는 ‘선의의 징벌’인 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원망’ 대신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면서 회개’하게 될 것이고 ‘낙심’ 대신에 더더욱 구원의 하나님을 ‘앙모’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연단’하며 끝내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만드시는 오묘한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신자에게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저주 아래에 있고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은 이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그야말로 ‘버린 자식’처럼 아예 상관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며 그래서 ‘유기(遺棄)된 불택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는 비록 이 세상에서 잠시 ‘환난’을 당해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매’ 때문에 방심에 빠졌다가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며 곁길로 가던 발걸음이 다시 ‘좁은 길’을 제대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고통의 시간이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산고’처럼 극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절대로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벌을 받고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고, 그 어떤 고통스러운 시험을 통과하고 있어도 끝까지 변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기도드리는 신앙 하나만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런 신자는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결국에 가서는 ‘이슬’이 말라붙은 생명을 소생시키듯이 ‘티끌에 누운 시체’와 같았던 인생이 ‘깨어 노래하는’ 기적적인 구원을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도 ‘환난’이 닥치는 일이 흔히 일어나지만 그럴 때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 택자에게 반드시 베풀어 주실 ‘은혜로운 구원’을 앙모하며 간구함으로써 ‘주의 죽은 자’들은 반드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 효능이 없는 ‘가짜 약’을 먹거나 그냥 흉내만 내는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인데도 진짜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명백히 비과학적임에도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은 의학계에서뿐 아니라 체육계에서도 이미 많은 사례와 임상실험을 통해 증명되어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하여 현재까지 발견된 대답은 ‘기대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비록 ‘가짜 약’을 먹었지만 그것이 어떤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는 기대치가 상승하게 되면 그 사람의 뇌 속에서 ‘신경생리학적인 반응’이 일어나면서 절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까 서론에서 ‘환자의 마음자세가 환자의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의사로부터 ‘가짜 약’을 받아먹은 환자가 정신적인 ‘기대감’만 가져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면, 더욱이 전능하신 절대주권자 하나님께로부터 ‘진짜 약속’을 받은 신자가 그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지킬 때 그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환난’은 그냥 그 자체만 두고 본다면 그야말로 ‘난제’요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악인이 기고만장하게 의인을 핍박해 오고 그런 환난을 당하는 의인의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악화일로로만 치닫게 되면 그 정신적 스트레스와 현실적 고통을 견디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바로 이런 시험에 빠져서 실족하고 끝내 배교에까지 떨어지는 일이 번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된 신자는 ‘주를 기다리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적 기대감’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이 비록 지금 당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고 있을지라도 ‘잠시 잠깐 후면 아무리 찾아도 악인이 보이지도 않을 날’이 꼭 오고야 맙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과 역경의 날이 현재로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기만 할지라도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는 자가 영생을 거두게 되는 날’ 또한 반드시 도래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악인이 만사형통하게 보일 때에 오직 ‘심판하시는 주’를 기다리며 의인이 환난에 빠질 때에도 더욱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처럼 그 어떤 경우에도 ‘영혼으로 주를 사모하고 중심으로 주께 구하는’ 성도에게 반드시 베풀어 주시는 최후승리와 구원 완성의 날을 꼭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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