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9-03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민수기 32장 1-4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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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38) (2017년 9월 3일 / 주일 대예배)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민수기 32장 1-4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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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민수기 32장 1-4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연예인들의 군입대 리얼리티로 진행되는 ‘진짜 사나이’에 아나테이너 서경석 씨가 출연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진짜 사나이’들은 철조망 설치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훈련담당 장교는 ‘간식과 휴식’을 포상으로 걸어놓고 두 소대 사이에서 어느 쪽이 일정한 길이의 철조망을 더 빨리, 그리고 더 튼튼하게 설치하는지 경쟁을 시켰습니다.
  치열한 경쟁 끝에 공교롭게도 서경석 씨가 소속된 소대가 지고 말았고, 그 소대원 전원은 상대 소대원들이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서 쉬는 동안 두 곳의 철조망을 모두 다 제거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땅에 박힌 쇠막대기를 다시 빼내고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은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고된 작업 도중에 서경석 씨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자 곁에 있던 동료 소대원이 이럴 때에는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대원들에게 “전우야, 같이 하자!”라고 부탁하면 아마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서경석 씨는 저 연병장 반대편에 앉아 있던 소대원들을 향해 “전우야, 같이 하자!”라고 힘껏 외쳤는데, 거리도 꽤 멀었고 더구나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그들은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두 번 더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서경석 씨는 자신의 요청을 듣고도 일부러 못들은 척 한 줄 알고 그만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이긴 쪽 소대원들은 나중에 간식을 다 먹은 후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나머지 철조망 제거 작업을 도와주려고 다들 돌아왔지만, 서경석 씨는 한참 뒤에 당시의 진짜 상황을 알게 될 때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서경석 씨는 오해를 한 것이지만, 만약 같은 편의 전우가 힘든 훈련 중에 서로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진짜 전투 상황을 맞이했을 때 죽더라도 같이 죽을 각오로 함께 싸우는 전우애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상 동료 전우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가나안 본토를 향한 진군이 시작되고 이제 눈앞에 있는 요단강만 건너가면 첫 전투에 돌입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도 바로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온 백성이 다 그 강을 건너가서 함께 싸우느냐 아니면 그 전투에서 자기만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생기느냐 하는 갈등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전투하는 지상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군사 된 성도가 ‘영적 전우애’를 서로 발휘하기 위해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성도가 혼자 안주하려는 시험에 오히려 더 쉽게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1절부터 5절의 말씀에 “1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2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3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4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5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막 요단강을 향해 전진하려는 시점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대표자들이 갑자기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그 계기는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땅은 가나안 본토에 속한 지역이 아니라, 소위 ‘요단강 건너편’(Transjordan)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지역을 그런 명칭으로 부르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 이곳이 요단강 건너편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살고 있던 원주민인 아모리 족속과 바산 족속이 이스라엘의 진로를 막고 나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부득이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예기치 않았던 땅을 덤으로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단 그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차지한 후에 보니 그 ‘요단강 건너편’ 지역은 고원 평지로서 목축에는 아주 적격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도 특별히 “심히 많은 가축의 떼”를 소유하고 있던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이 점에 더욱 구미가 당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합의를 본 후에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 즉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각료’들에게 특별청원을 하러 찾아왔는데, 그 내용은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함께 싸워서 얻은 땅을 자기네 지파에게 할당해 달라는 것도 염치없는 요구였지만, 더 큰 문제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해석자는 이 구절을 ‘그 대신에 우리는 요단강 너머의 가나안 본토에 있는 땅은 분배받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의역하기도 하지만, 6절 이하에 나오는 문맥을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음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르우벤과 갓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민족들과 싸우는 전쟁에 아예 참가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뜻이었음에 분명한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 타산이요 같은 민족으로서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른 열 지파는 아직도 갈 길이 태산인데, 아니 지금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해야 할 판인데, 그 두 지파만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다는 것은 곧 자기네들만 먼저 발 씻고 편안히 앉아 있겠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오고 이런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먼저 안주할 만한 땅’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요단강 건너편’ 지역의 땅을 얻기 전까지는 모든 열두 지파가 다 같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 한다는 이 엄연한 민족적 목표에 대하여 다른 아무 이견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땅덩어리가 그냥 굴러 들어오듯이 생기자 ‘우리는 그냥 이 곳에 안주하고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습니다.
 ’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이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심히 많은 가축 떼’를 이미 소유하고 있던 두 ‘부유한 지파’ 백성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버렸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교인들이 인색한 줄 아십니까?
  철칙은 물론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가난한 교인보다는 부자 교인들이 더 그렇습니다.
  이것은 제가 미국의 이민교회에서도 자주 보고 겪었던 일입니다.
  교회 내에서 제일 알부자로 알려져 있고 또 자기 개인이나 자녀를 위해서는 큰돈을 펑펑 쓰면서도 주일헌금조차 제대로 내지 않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자신의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곳’으로 알지 못하고 순전히 ‘하나님이 자신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온갖 혜택을 제공해 주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넉넉하지 못한 교인들이 오히려 정말 헌신적으로 희생하면서 교회봉사에 앞장을 섭니다.
  제가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 제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 개인적으로 선물을 주신 교인들이 십 수 년 동안 딱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큰 사업체가 있거나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장로나 집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오로지 본인도 자녀들이 쥐꼬리만큼 주는 용돈 외에는 아무 수입이 없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교인들뿐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집회 인도 차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 전 주일 오후에 어느 권사님께서 용돈으로 쓰라고 하시면서 몇 십 불인가 되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억지로 제 손에 쥐어 주셨는데, 그 권사님의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저는 갑자기 쏟아지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인사드린 후 얼른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원로목사님께서 부산제일영도교회의 예배당을 새로 짓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그 교단 내에 가장 큰 규모였는데, 가난한 동네에 위치하고 그리 대단한 부자도 없던 교회로서는 사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대공사였습니다.
  하지만 온 교인이 성전건축헌금을 작정하여 그 합계가 예산을 초과하게 되었고, 그 주일예배의 기도 시간에 원로목사님께서 “이 가난한 영도의 성도들이...”라고 울먹이시면서 한동안 기도를 잇지 못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정말이지 ‘가난한 과부’는 자기 전 재산에 해당되는 ‘두 렙돈’을 다 바치지만, 부자는 자신의 풍부한 것 중에 ‘지극히 적은 일부’만 바치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 강서성전을 위한 건축헌금이나 헌당헌금을 작정하던 주일에 일부러 무슨 출장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예배에 아예 출석도 하지 않은 교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리떡 헌금 추가 작정’을 할 때에도 이번에는 꼭 좀 함께 참여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 되었던 교인들은 여전히 쏙 빠지고, 반면에 이미 작정해 놓은 헌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교인들이 오히려 자동차를 처분하거나 결혼예물을 팔아서 그야말로 ‘힘에 지나도록’ 더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한 번 각자 솔직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열 지파’는 오직 ‘가나안 정복’ 완수를 위해 ‘요단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길르앗 땅’에 안주하려 하는 교인은 혹시 없습니까?
  물질적으로 남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으면서도 오히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것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자.’라고만 생각했던 ‘한 부자’의 시험에 결코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끝까지 힘을 다해 함께 싸우지 않는 것은 다른 성도를 낙심시키는 큰 죄가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절 이하 15절에 “6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9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10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11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13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고 기록했습니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의 그런 청원을 듣게 되었을 때 모세는 불같이 노했습니다.
  모세의 책망은 “너희 형제들” 즉 다른 열 지파들이 “싸우러” 가는 동안 그 두 지파만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는” 행위는 곧 그 형제 지파들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 두 지파만 요단강 건너편에 눌러 앉으려 하는 이기적인 욕심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그런 배신적인 행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는 바로 이것이 실로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 죄를 두고 옛날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던” 뼈아픈 사건과 비교하며 책망했습니다.
  그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을 공격하는 것은 마치 거인 앞에 선 메뚜기와 같은 꼴이라고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고를 함으로써 온 회중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결국 가나안 진군을 포기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처럼 불과 ‘열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전 이스라엘 공동체를 ‘낙심’시키는 바람에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이십 세 이상”의 출애굽 세대 전부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한” 후에 다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 역시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기네의 청원이 그 열 정탐꾼들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죄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열 정탐꾼들은 자기네들만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낙심하고 함께 포기하도록 선동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지금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그처럼 가나안 본토 자체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네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지금 그 두 지파의 태도나 옛날 열 정탐꾼들이 했던 악한 일이나 둘 다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낙심하게’ 만드는 점에서 조금도 다름없는 죄인 것을 지적하면서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라고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도 당신도 둘 다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이나 ‘나는 못 가지만 당신은 건너가시오.’라는 말이나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남을 실족시키는 한 통속의 죄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낙심시키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두고 모세는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 것이며 끝내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라고 추상같이 꾸짖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빠지는 것은 내 신앙양심을 따라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어디까지나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함께 건너가서 싸우지 않고 혼자만 뒤에 처질 때 사실은 그 ‘나만의 문제’ 이상의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다른 형제 교우를 낙심하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입니다.
  ‘나는 교회를 욕하는 말도 한 적이 없고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교인을 방해한 적도 없으니, 적어도 남을 낙심하게 한 적은 없다.’라고, 자신이 결코 ‘열 정탐꾼’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남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우를 낙심하게 하고 심지어 실족하게까지 만드는 순간들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좀 바빠서 게을리 하는 예배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큰 교회에서 나 한 사람쯤 빠진다고 해서 무슨 표가 날까?’라고 방심하는 마음이, 주일밤예배와 수요일밤예배에 열심히 나오던 교인들의 발걸음까지도 점점 더 약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쯤 빠져도 교회 재정에 별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이는 헌금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제직회를 할 때마다 ‘경상비 적자 보고’가 나오는 것을 듣고 어느 다른 제직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교인들도 헌금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뼈 빠지게 고생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는 시험에 들게 되면, 그 ‘나 한 사람쯤’이 점점 더 늘어만 갈 것입니다.
  그것은 나 혼자 정도는 참여하지 않아도 아무 차질이 없을 것 같은 자원봉사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 명만 모이면 금세 끝낼 수 있고 하다못해 두 명만 있어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지겹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자기 혼자서 그 일을 끝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전도회원이 다른 회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섭섭한 생각을 금할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자기만 먼저 집으로 가고 있는 차 안에서, 혹은 내 집 소파에 편히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한 명의 교우’를 실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빠지는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뒷전에 물러나는 것은 결코 ‘나만 건너가지 않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 한 사람이 ‘요단강 이쪽 편’에 그냥 앉아 있으려 할 때, 그것은 ‘이 모든 백성’을 다 낙심시키고 최악의 경우에는 전체 교회가 다 ‘망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병사가 혼자 탈주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편 전력에 ‘도움이 안 되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 다른 동료 병사 전체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전시상황에서 탈주병에 대해서는 재판도 없이 그냥 ‘즉결처단’을 하는 것입니다.

  ‘전투하는 지상교회’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빠지는 것’은 ‘나 한 사람의 힘만큼만 약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 싸우러 갈 때 여기 앉아 있는 것’은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다른 성도’들마저 낙심시키는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는 가운데, 우리 경향공동체 전체가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의 땅’에 반드시 들어갈 수 있도록 ‘다 건너가서 함께 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행히도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모세를 통해 들려준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의 말씀을 겸손하게 잘 받아들이고 즉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16절부터 19절에 보면, “16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17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18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19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그 두 지파는 철석같이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조금 땅이 생겼다고 안주하려던 두 지파는 자기 가족과 자기 가축만을 위한 일보다 온 민족이 함께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우선적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땅에 남겨 둘 가족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만 갖추어 놓고 그 후에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내기까지는 아예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는 것이 자기네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자기 생각만 하다가 형제 지파들을 낙심하게 할 뻔했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들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싸울 뿐만 아니라 아예 이스라엘 군대의 선두에 서서 싸우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었을 때, 나머지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나중에 33절에 기록된 대로, 결국 이 두 지파는 또 그 지역 확장에 공헌을 세웠던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자기네가 원했던 “성읍들” “사방 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선한 일을 위하여, 복음 사업을 위하여 함께 건너가서 싸우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을 다 더해 주시는 법입니다.

  ‘알라모’라는 영화에 보면, 그 전투 중에 실제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일화가 나옵니다.
  수천 명 병력으로 구성된 멕시코 군대의 포위망이 좁혀들고 아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최악의 순간이 왔을 때, 그 알라모 요새의 수비대장 트레비스 대령은 백 수십 명밖에 안 되는 대원 전부를 마당에 집합시켰습니다.
  이어서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자신과 부하들 사이의 땅바닥에 기다랗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숨김없이 그대로 전해 준 다음에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나와 함께 이 요새에 남아서 끝까지 싸울 사람은 이 선을 건너오고 그렇게 하지 못할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싸우든지 아니면 탈출하든지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그 대장의 비장한 말이 떨어졌을 때, 부하들은 하나씩 둘씩 그 선을 넘어 왔고 결국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대장이 서 있는 편으로 건너왔습니다.
  만약 그 때 그 선을 넘어오지 않고 혼자 살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남은 대원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 부대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죽기까지 싸우기로 각오하면서 땅바닥에 그려진 그 선을 건너온 바로 그 순간 그 전설적인 용기를 발휘한 알라모 수비대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선’이 있습니다.
  바로 다 함께 건너가느냐 아니면 자기만 이편에 그냥 남아 있느냐를 가름하는 ‘요단강’입니다.
  ‘경향교회의 교인이 총 몇 명인가?’라는 것은 사실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모든 경향교회 성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요단강을 건너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경향교회에 유력한 장로가 있는가?’라는 것 역시 제게 있어서는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3대 후원헌금’이나 ‘보리떡헌금’에 모든 교인들이 많든지 적든지 각각 자신의 정성과 힘을 다해 참여만 한다면, 저는 백억 원을 선뜻 헌금할 수 있는 부자 교인 한 명이 생기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백배 더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요단강의 선’ - 건너가면 힘들 것이 뻔하고 건너가면 죽을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 경향인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함께 건너가기만 하면 실로 이 경향공동체 전체가 문자 그대로 용기백배, 사기충천하여 ‘백전백승하는 전투교회’가 되고야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에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정복전’을 앞에 두고 그 어떤 경우에도 ‘혼자 안주하려는 시험’에 빠져 ‘다른 성도를 낙심시키는 죄’를 범하지 말고 오직 ‘다 건너가서 함께 싸우는’ 신앙의 전우애를 끝까지 발휘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주시는 약속의 기업’을 반드시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