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8-20 “너는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라” 열왕기상 19장 1-18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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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8-20
2017′경향의 강단(36) (2017년 8월 20일 / 주일 대예배)
“너는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라” 열왕기상 19장 1-18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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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라"

열왕기상 19장 1-18 / 석기현 담임목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파죽지세로 북진하면서 압록강까지 거의 다다랐던 미해병 제1사단이 1950년 11월에 개마고원의 장진호(長津湖)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을 당해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였습니다.
  미군은 어쩔 수 없이 흥남으로 철수하여 바다를 통해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들이닥친 최악의 한파와 싸우면서 병력이 10배나 되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그 작전을 시도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연일 악전고투였습니다.
  그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 현장에 있었던 한 참전용사가 어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에서 이런 회상을 했습니다.
  그는 후퇴 행군 중에 두 명의 동료 병사가 길가에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희들 여기 그렇게 앉아 있으면 곧 중공군 놈들한테 잡힐 텐데 빨리 일어나야지.”라고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이나 대꾸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두 병사도 자기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동사(凍死)되든지 포로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육체적으로 완전 탈진, 정신적으로 완전 자포자기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참전용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버려두고 그 자리를 그냥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바로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세벨 왕비를 주동으로 한 북조 이스라엘의 바알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홀로 고군분투하던 엘리야는 그 고된 싸움에 너무 지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일어나서 한 걸음 더 걸어갈’ 기력이나 의지조차 전혀 없는, 완전 절망 상태가 그 대선지자에게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냥 죽도록 그 자리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당신이 아끼시며 당신께서 사용하시는 선지자의 생이 그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나게 할 수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기독신자 역시 그냥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을 정도로 극한의 낙심에 빠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절망의 밑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도를 어떻게 소생시키고 재기시켜 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 더 갈 수 있는 힘’을 더해 주십니다.

  본문 1절부터 8절의 말씀에 “1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의 생애 중에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갈멜산의 제단’의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서 엘리야가 거둔 승리는 그야말로 혁혁한 것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대항하여 혈혈단신으로 싸운 전투였지만 그 제단에서 오직 엘리야 선지자만 ‘하늘로서 내려오는 불의 응답’을 받았으며 그 직후 모든 우상 선지자들을 붙잡아 기손 시냇가에서 단체로 즉결처단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분위기만 본다면 그 누구의 눈에도 이제 싸움은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악한 이세벨 왕비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아합 왕으로부터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던 우상 선지자들이 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오히려 엘리야에게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고 자기가 믿는 우상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살해 위협을 보내왔습니다.
  그것은 엘리야 선지자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우상 선지자들을 일망타진함으로써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녹다운 될 줄 알았던 상대방이 오히려 더욱 악에 받쳐서 자기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강력한 카운터펀치를 날려 온 격이었습니다.
  바로 “이 형편을 보고” 즉 이세벨로부터 그런 뜻밖의 반격을 당하여 한순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당황한 엘리야는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결국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약 5:17)이었으니 그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그런 그의 심정은 그가 자기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남겨두고 혼자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한 것이 무슨 ‘자살 충동의 발로’나 ‘자기 생명에 대한 저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기로서는 이세벨과 우상숭배자들을 대항하여 최선을 다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완전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허탈감과 낙심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한탄조의 기도가 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이어지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엘리야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싸울 기력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진, 아니 이미 ‘다운’(down) 되어 마지막 카운트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게 된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우선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마치 권투시합 중에 지친 선수의 어깨나 다리를 세컨드나 코치가 주물러 주듯이,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에 곯아떨어진 엘리야 선지자의 육신적 피로를 그렇게 회복시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에너지까지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나 먹고 마시고” 난 후에 바로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자는 엘리야 선지자가 광야로 들어갈 때부터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좌절감 속에서 ‘광야로 하룻길쯤’ 들어간 후에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다고만 생각하면서 오직 ‘죽기를 원하는’ 절망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여기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된다. 네 갈 길이 있으니 다시 일어나야 한다.’라고 그를 강력하게 다그치셨습니다.
  바로 그 격려 때문에 엘리야 선지자는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그 한 걸음이 ‘40일 밤낮’ 계속되면서 끝내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도달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스스로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목숨이니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신자 역시 대선지자도 그랬으니만큼 낙심과 절망의 극한에 다다를 때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본성이 같은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죽고 싶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의 극한에 도달했을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죽지는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때문에 신자는 아무리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도 자살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죽지 말라고 하시면 결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일어나 걸어가라.’고 내 생명의 주권자께서 명하시면 그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한 번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 보면, 저자 자신이 우편비행사 시절에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게 되었던 경험담이 나옵니다.
  사방 수백 킬로미터의 사막 한가운데서 생텍쥐페리와 동료 승무원 프레보의 수중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커피 반 리터, 포도주 4분의 1리터, 포도알 몇 개와 오렌지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다섯 시간만 걸으면’ 다 증발되고 말 수분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은 털끝만한 가망성이라도 붙잡기 위해 무작정 한 방향을 정하고 일단 걷기로 했습니다.
  그런 필사적인 행군이 나흘 째 되던 새벽에 완전히 탈진한 동료 프레보는 모래 속에 몸을 처박고 드러누워 일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생텍쥐페리는 “프레보, 떠납시다. 우리 목구멍이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걸어야 합니다.”라고 그를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다시 시작된 걸음이 얼마 후에 사막 부족 베두인 한 명을 만나게 만들었고, 그 두 사람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딱 ‘한 걸음’입니다.
  그냥 쓰러져 있느냐 아니면 마지막 힘을 짜내어서 한 번만 더 일어서느냐의 차이가 비참한 패배자와 인생역전의 승리자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죽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일어나 걸어가라.’고 엄명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직을 당해도 오늘 하루 밥 지어 먹을 쌀이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내게 먹여 주시는 ‘떡과 물’인 줄로 깨달아야 합니다.
  파산을 했을지라도 아직 건강한 몸이 있으면 그것을 곧 하나님께서 ‘일어나 호렙산까지만 네 발로 걸어가라.’고 독려하시는 징표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죽고 싶은 생각만 남아 있을 정도로 모든 기운이 다 소진되었을 때에도 ‘로뎀나무 아래’에 그냥 쓰러져 있지 말고 생명의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일어나서 기적적인 재기를 향한 ‘첫 한 걸음’을 꼭 내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에게 생의 의욕마저 사라지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을 일깨워 주십니다.

  9절 이하 18절에 기록하기를 “9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 선지자는 한 “굴에 들어가” 거기서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하나님께 솔직히 하소연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 이세벨과 싸우지 않고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단호한 추궁에 대하여 엘리야 선지자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힘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로서는 그처럼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지만 상황은 여전히 호전되지 않고 있다고 탄원했습니다.
  갈멜산 전투 이후에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은 여전히 “주의 언약”“주의 제단”을 저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계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이제 혼자 남은 자기마저 이세벨의 추격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서 두 번이나 똑같은 말로써 한탄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좀 특이한 방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먼저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등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고”, 그 대신 마지막으로 “세미한 소리”로써 그에게 찾아와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악한 이세벨의 세력을 완전히 도말하기 위하여 행하실 역사는 어떤 강력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엘리야 선지자의 심령에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우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또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하사엘의 칼”“예후의 칼”을 우상숭배로 범죄한 북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써 사용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름을 부어 세웠던 또 한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였는데, 하사엘과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하신 말씀은 엘리사도 직접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사역 역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엘리야 선지자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마지막 사명을 명하시면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는 의외의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싸우는 사람이 자기뿐인 줄 알고 ‘하나님, 저는 이제 혼자만 남았습니다.
 ’라고 비명을 질렀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엘리야와 같은 편에 서서 싸우는 아군이 무려 ‘칠천 인’이나 더 있다고 밝혀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칠천 인’이 다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서 숨어 있던 그 신실한 자들을 하나하나 다 확실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남기리니’라고 천명하신 대로 아무리 성도를 대적하는 원수가 수적으로 많고 그 세력이 압도적으로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소수의 참된 성도를 끝까지 보전하심으로써 엘리야 선지자를 격려하고 지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너무나도 놀랍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스스로 생의 의욕 자체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엘리야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이 아직 남아 있음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도 엘리야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뒤에는 ‘칠천 명의 신앙공동체’라는 실로 천군만마와 같이 든든한 지원군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자살하게 되는 대표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 의미나 목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내가 도대체 왜 더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아무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나 같은 사람 하나야 세상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내가 죽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라고 망연자실하는 가운데 음독을 하거나 투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도 찾을 수 없고 다른 아무 사람도 대답해 줄 수 없는 그 ‘막다른 골목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바로 ‘너는 나를 위해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인간사회에서는 ‘있으나마나한 투명인간 같은 존재’로 취급 받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저와 여러분이 꼭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구속사 완성’을 위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시키시려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가정에서는 ‘무기력한 가장’이라고 무시를 당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아내’라고 욕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 해도, 하나님에게는 그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두고 반드시 완수하시려는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곧 나 한 사람을 ‘교회중심으로 서로 격려하며 협동하는 일꾼과 군사’로 사용하심으로써 ‘십사만사천 인의 남은 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채우는 구령 사업을 성취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몇 년 전 ‘교회 사태’가 일어났을 때 사실 제일 약하고 못난 꼴을 보였던 사람은 정말 부끄럽게도 명색이 담임목사라 하는 저였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을 격려하고 힘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제일 먼저 낙심의 끝자락에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 고비 겨우 넘겼다 싶으면 또 닥쳐오는 악재의 연속 앞에 저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완전포기 상태에 이르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도 ‘같은 편에 서 있는 칠천 명’을 하나 하나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경향교회를 위해서 제가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아직은 하나님께서 써야 할 목적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일깨워 주시면서 저를 억지로 일으켜 주셨고, 바로 그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있어서 ‘나’라는 사람은 아직 쓸모 있는, 아니 아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그냥 죽어도 별 상관없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 두셔야 하는 지극히 소중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바람과 지진과 불’의 기적은 동원하지 않으시더라도 ‘세미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사명을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격려에 힘입어서, 설사 생의 의욕까지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말고 의연히 칠전팔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수술을 받게 되는 환자나 중상을 당한 병사에게 곁에 있는 의사나 전우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Don’t ever give up.)고 격려하는 장면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하여 스스로 완전히 포기해 버리면 바로 그 순간 정말 모든 것이 끝나고 말지만, 생명에 대한 애착과 의지를 끝까지 붙잡을 때에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언급했던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라는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동료 중 한 명이었던 기요메라는 조종사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겨울에 우편비행기를 몰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던 도중에 악천후를 만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골짜기에 추락해 버렸습니다.
  실종 소식을 들은 생텍쥐페리와 다른 동료 비행사들은 즉시 그를 찾기 위해 수색 비행을 했지만 그 넓고도 깊은 산중에 떨어진 작은 비행기 한 대를 그것도 한겨울에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것은 기요메 본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요메 조종사는 피켈도, 로프도, 식량도 없이 영하 40도의 추위 가운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골짜기를 내려가기를 반복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7일 동안 밤낮 계속 걸어서 끝내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나중에 병상에 누운 채로 생텍쥐페리의 병문안을 받게 된 기요메는 “내가 한 것은 맹세코, 세상의 그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적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초인적인 탈출 과정을 회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삼사일이 지났을 때 가장 큰 고비였다고 했는데, 그때 쯤 되니까 생존본능 자체가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냥 눈 속에 드러누워 영원히 쉬고 싶은 욕망만 간절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쓰러질 때마다 정말 온 몸의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억지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계속 걷기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발이 미끄러져 눈 속에 배를 깔고 쓰러지게 되었을 때 그는 정말이지 다시 일어나기 싫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희망 없는 짓인데 왜 쓸데없이 이 고생을 하는 것인가? 그냥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평안해질 텐데.’라는 생각밖에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예 죽기만 기다리고 있던 기요메는 마지막으로 자기 아내를 떠올리면서 ‘보험이 있으니 생활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다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퍼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약 자신이 ‘실종’으로 처리가 되면 법정사망 판정은 4년 더 미루어지고 그때까지는 아내에게 보험금이 전혀 지불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쓰러져 있는 위치는 가파른 언덕이어서 여름이 되어 눈이 녹으면 깊은 골짜기 밑으로 자기 시체가 굴러 떨어져 버리면서 영원히 발견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기요메는 약 50미터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까지만 가서 바위 위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놓으면 여름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자기 시체를 발견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각 하나 때문에 기요메 조종사는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단 일어나서 천근같은 한 걸음을 내디딘 후 그는 그 바위를 지나쳐 계속해서 이틀 밤과 사흘 낮을 더 걸었고 끝내 자력으로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이대로 죽고 싶은’ 생각만 남은 자리에서 그 조종사는 자기 아내를 위해서 남편으로서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할 일’을 상기해 내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시 시작한 ‘한 걸음’이 결국 자기 생명을 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 인생의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여겨질 때에 그저 ‘딱 한 걸음’만 더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한 걸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기적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무 살 이유조차 없다고 판단될 때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아직 내가 마치지 못한 사명’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일어나’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딱 한 번만 더 일어나면 비참한 패배로 끝나기 일보직전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최후의 승자’로 바꾸어 주시는 대역전이 반드시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저 ‘죽고만 싶을’ 정도의 극단적인 낙심과 절망이 찾아올 때에도 우리 생명의 주권자께서 ‘너는 일어나서 여호와 앞에 서라’고 명하시는 이 ‘세미한 음성’을 듣고 자신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움으로써, 정말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영원히 안식하게 될 저 영광스러운 천국의 결승점까지 반드시 도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