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8-1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장 24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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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8-13
2017′경향의 강단(35) (2017년 8월 13일 / 주일 대예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장 24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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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장 24절 – 2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제가 논산훈련소에 있었을 때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훈련병들 중 무작위로 ‘차출’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것은 영락없이 어떤 작업에 동원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느 날 저도 한번 다른 몇 명의 동료 훈련병들과 같이 보급계로 ‘차출’되어 가서 아주 무거운 짐들을 등에 지고 날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난생 처음으로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맛보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전신이 땀에 흠뻑 젖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온 몸 구석구석의 뼈마디와 관절들이 다 극한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고된 중노동은 물론 무슨 ‘돈이나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나 ‘자원봉사’도 아니고, 순전히 속된 말로 ‘재수 없게 걸려서 개고생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더욱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일꾼’이 된다는 것은 그처럼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일인데, 신기하게도 그와 정반대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실 ‘일꾼’이란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하는 종’과 비슷한 것이니 그리 명예로운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바울은 우선 이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두고서 “복음의 일꾼”(1장 23절)이며 또한 “교회의 일꾼”(1장 25절)이라고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문 1장 24절에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일꾼으로서 당하게 되는 “괴로움” 때문에 끙끙거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을 어찌하든지 회피하려 하는 대신에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 더 많이, 더 꽉꽉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 신기한 사도 바울의 간증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일꾼’으로서 섬기는 성도로 하여금 그 봉사와 충성에 따르는 괴로움과 고난을 오직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수고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은 곧 ‘자신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본문 1장 25절부터 29절에 “25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직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경륜(經綸)’ 즉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한글개역성경에는 이 단어가 ‘경륜’이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서는 ‘직분’이라고 번역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문맥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은, 과거에 교회를 그토록 핍박했던 ‘사울’이 오히려 이제는 ‘사도의 직분’을 받아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된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5절 하반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직분’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란 곧 ‘구약에 기록된 언약과 예언이 다 성취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의 영광”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방인 가운데”서도 그 “풍성함”이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복음’이 먼저 믿게 된 성도들의 ‘전도’를 통해 온 세계만방까지 퍼지게 될 것을 뜻합니다.
  그 ‘신비한 복음’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이미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심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그를 믿는 자에게 “영광의 소망” 즉 천국의 영생을 확신하고 기다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으로써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구령운동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자면, 곧 원로목사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교회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은 이후 바로 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충성을 다하느라고 온갖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는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지만, ‘다메섹의 회심’ 이후로 이제는 오히려 가는 곳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 등 온갖 적대행위와 신변위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고후 11:26).
  어느 모로 보나 유대사회에서 그야말로 앞길이 창창한 ‘금수저’였던 그가 ‘사도’라는 직분을 섬기게 되면서부터는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고(고후 11:23), 전도여행 중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게” 되는(고후 11:27) 경우를 일상의 다반사처럼 겪는 등 그야말로 ‘바닥 인생’으로 전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극한의 괴로움과 고난이 연이어지는 중에도 도대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처럼 ‘사서 하는 고생’ 같은 일을 오직 기쁨으로, 그것도 온 힘을 다해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그것이 순전히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바로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그처럼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 자신의 초인적인 인내나 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스스로가 그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이를 만큼 득도를 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난관에 부딪혀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칠전팔기하는 무한의 재생력,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오히려 그 순간까지 ‘즐거워’하면서 오직 앞만 바라보고 계속 달려가는 줄기찬 추진력은, 바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순간부터 그의 심령 속에 모시게 된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고 계시는 ‘역사’(役事)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두산 베어스’가 된 프로야구팀이 ‘OB 베어스’로 첫 출범했을 때 그 원년멤버 중에 박철순이라는 유명한 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프로생활 첫 해에 22연승이 포함된 ‘24승 4패 7세이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잦은 부상 이후에도 끊임없이 재기하여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당시로서는 ‘최고령 완봉승’의 기록까지 남겼는데 바로 그 역사적인 경기 현장에 저도 1루 바로 뒤의 관중석에서 열렬히 응원을 했었습니다.
  그 박철순 선수의 ‘승부구’는 ‘너클볼’이었는데, 언젠가 어떤 인터뷰에서 “너클볼을 던지는 것은 다른 볼을 던지는 것보다 열 배는 더 힘듭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던졌습니다. ”라고 토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박철순 선수로 하여금 그 힘든 너클볼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은 그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성도로 하여금 ‘죽도록 충성’할 수 있게 해 주는 힘도 결코 나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내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세상의 다른 그 누구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있는 참된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는 주님’이시고 내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좌정하고 계신다면, 그 예수님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만 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봉사’라는 것이 그저 부담스럽고 힘들게만 여겨지는 교인이 있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아직 예수님을 자기 심령에 제대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임이 틀림없습니다.
  ‘자기 힘’만 가지고 무슨 선한 일을 위해 충성하려고 하면 금세 지치고 짜증만 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경향교회 성도 여러분께서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중심으로 달려온 지난 44년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은 ‘평화시대에 순교의 각오로써 죽도록 충성’을 다하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왔습니다.
  개척 당시부터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여 지금은 제네바신학대학원으로 정식인가를 받게 되었고, 자체 예배당을 소유하기 훨씬 전부터 세계선교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지금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군세’를 이루었습니다.
  이 강서성전 건축이 시작될 무렵 때맞추어 터졌던 IMF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든 성도들이 ‘내 생애 최고의 헌금’을 기꺼이 바침으로써 열이면 열 다 안 될 것이라고 했던 그 대공사를 끝내 완수해 내고 말았습니다.
  수년 전의 교회 사태로 인해 큰 시험을 겪은 후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를 모아서 교단의 개척교회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해서 교육관 헌관 완결을 위한 ‘보리떡 헌금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은 문자 그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주님께 부어드리는 전제’가 되고자 ‘죽을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될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잘해서요?
  결코 아닙니다.
  경향교회 교인들이 남달리 ‘선한 양심’과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들이어서요?
  그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보혈로써 우리를 사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도구와 병기’로 사용하셔서 ‘친히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이 이 경향교회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기쁘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깨닫고, 이 신비하고 놀라운 힘을 더욱 크게 발휘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기꺼이 힘써 일하도록 만들어 주는 보람은 곧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화되고 있는 교우’입니다.

  2장 1절 이하 5절의 말씀에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골로새시가 라오디게아시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란 바로 골로새교회 교인들과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처럼 사도 바울이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던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이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즉 “비록 내가 너희들을 한 번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을 위해 그 얼마나 애쓰며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너희들도 알아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그토록 ‘힘쓰는’ 일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마음에 위안을 받는” 것, 즉 ‘어떤 낙심이나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 즉 ‘성도의 교제를 통해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은 다 그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며 기독신자로 사는 이유가 그냥 인생이 어려울 때 설교를 통해 조금 위안을 받거나 혹은 교인들끼리 만나서 그저 사교적인 교제를 나누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말씀생활’과 ‘교회생활’을 통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에 이르게” 되는 진짜 중요한 단계는 오직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자나 깨나 각 처에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들의 성도들을 위해서 멀리서나마 부단히 기도하고 또한 서신을 보내어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등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정확한 신앙고백을 통해 확고부동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신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교역자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 속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과의 영적 교통을 통해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서 ‘신행일치에 대한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런 교인이야말로 “아무도 교묘한 말로... 속이지 못하는” 즉 그 어떤 이단이나 우상종교의 미혹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신자로서 계속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구원의 확신’과 ‘성화 과정’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피상적인 교회생활만 하게 되면 항상 교역자들이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신경을 쓰고 돌봐 주어야 하는, 여전히 ‘영적으로 어리고 약한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 까닭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골로새교회 교인들에 대해서 정말 죽어라 ‘힘쓰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비록 그들로부터 “육신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심령으로는 함께” 있으면서 그 소중한 교인들을 그런 ‘교묘한 이단 사설’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그리스도 안의 지혜’를 발휘할 줄 아는 성숙한 신행일치의 신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과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수고의 결과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질서 있게 행함”“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질서 있게 행함’(orderliness)이라는 단어와 ‘굳건한 것’(firmness)이라는 단어는 둘 다 군사 용어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승리할 수 있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군기가 정연하고 그 사기가 든든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온갖 괴로움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해 힘을 다해 충성한 결과, 그들이 영적 기강이 바로잡힌 ‘교회중심의 생활’과 온갖 이단의 공격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성경중심의 신앙’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실로 멋진 열매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그처럼 ‘질서 있고 굳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기쁘게 보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 기쁨은 그가 그들을 위해 전도자로 충성하는 가운데 당했던 온갖 ‘괴로움’과 ‘고난’을 깨끗이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충만하게 넘쳤던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영화 ‘대부 제2편’에는 아버지를 이어 마피아 두목이 된 마이클 콜레오네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때 마이클의 아버지인 비토 콜레오네는 미국으로 막 건너온 이탈리아계 이주민이었는데,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온갖 잡일들을 하며 아주 어렵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가 그 고된 매일의 일과 중에서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 때가 있는데, 바로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 어린 자녀들을 안아줄 때입니다.
  심지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서 당장 먹고 살 일이 막연해진 날조차 그는 과일 하나를 사들고 와서 그 아이들이 그것을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섬기다가 때때로 피곤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잠깐이기는 하지만 낙심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여러분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교인들이 ‘훌륭하고 존경스럽다.’고 추켜세워 주는 말입니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교만에 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역자들이 ‘충성스러운 직분자’라고 등을 두드리며 칭찬해 주는 것입니까?
  정말 죄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사실 저만 해도 여러분의 그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온갖 봉사들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넘어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재림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반드시 내려주실 상급입니까?
  물론 그것이 최고의 영광이 될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꾼’으로서 온갖 힘을 다하느라고 지쳐 버리거나 아예 이제는 그만 두고 싶은 생각까지 들 때에도 바로 그 순간 즉시 저와 여러분을 소생시켜 줄 수 있는 활력소는 다름 아닌 ‘이 경향교회 안에서 함께 성화되고 있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심방장, 구역장으로서 돌보고 있는 새신자들이 믿음이 자라면서 함께 ‘새소식반’을 위해 봉사도 하게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들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한 가장 큰 보람입니다.
  여러분이 주일학교와 SFC 교사가 되어 그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고 주일마다 전화를 걸면서 ‘개혁주의 신앙’과 ‘교회중심의 생활’을 가르친 결과 어느새 그들도 의젓한 ‘신앙의 장부’들이 되어 교회에서 직분까지 받아 섬기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남모를 수고’를 단번에 잊게 만들어 주는 ‘청량음료’요 ‘원기회복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장로, 집사, 권사로서 ‘생애 최고의 것’뿐 아니라 이제 ‘생애 전부의 것’까지 바치며 ‘희년맞이 5대 목표 완결’을 위해 그야말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있지만, 바로 그 덕분에 우리의 후손들이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우리 세대 때보다 ‘갑절의 복’을 누리게 될 미래를 내다보기만 해도 우리는 실로 ‘천만인의 아비와 어미’ 된 성도만 체험할 수 있는 엄청난 행복을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아직은 우리가 이 경향교회를 위해 ‘힘에 지나더라도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생을 통해 우리의 자녀와 내 곁의 연약한 교우들이 ‘굳건한 신앙’과 ‘질서 있는 교회생활’ 가운데 영원한 천국권속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기쁘게 바라봄’으로써 ‘끝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당신이 하셔야 할 모든 사역을 이 땅에서 다 마치셨습니다.
  하지만 그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몫도 남겨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각자의 몫에 태인 십자가의 사명을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각 성도에게 남겨 놓고 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명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면서” 그 남겨 주신 영예로운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남겨 주신 사명을 수행하고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교회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제아무리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위해 선행을 하니 봉사를 하니 어쩌니 해도,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수고를 자신의 육체에 채우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의 일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 경향교회가 장차 재림하실 주님 앞에서 일꾼으로서의 평가를 받게 될 ‘포도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경향교회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친구 따라 한번 와 보게 된 교회라고만, 그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편리해서 출석하고 있는 교회라고만 여기고 있습니까?
  혹은 교구 담당 교역자에게 매주일 ‘얼굴도장’만 한번 찍으면 내 자녀의 주일학교 교육에도 유익하고 여러 동호회 모임을 즐기기에 좋은 ‘대형교회’라고만 여기고 있습니까?

  이 경향교회가 여러분에게 그런 정도의 교회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각 성도가 예수님을 자기 마음에 모시고 그 능력의 역사를 발휘하는 필승의 산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교통하는 가운데 함께 성화되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무한정 에너지’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보람’이 넘치는 성도가 되어야만 우리는 이런 ‘신비한 비밀’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그저 ‘헛수고’요 ‘개고생’처럼만 보이는 온갖 봉사와 희생을 오히려 즐거워하면서 자신의 ‘육체에 채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아무 보람도 없이 그저 죽도록 일만 하면서 산다는 것은 평생토록 끝없는 괴로움과 고통의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그런 비참한 ‘노예’가 아니라 실로 명예로운 ‘교회의 일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오직 ‘내 속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고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려내고 있음을 진심으로 기뻐함으로써, 이 ‘할 일 많은 교회’에 ‘서 있어야 할 곳에서 섬기는 일꾼’으로 불러 주신 사명을 따라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