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7-30 “여호와께로 돌아가 힘써 그를 알자” 호세아 5:13-6:6 / 신승욱 교육목사

More videos
172
Views
   

WMA음성받기MP3음성받기동영상다운받기동영상다운방법
주일낮예배 2017-07-30
2017′경향의 강단(33) (2017년 7월 30일 / 주일 대예배)
“여호와께로 돌아가 힘써 그를 알자” 호세아 5:13-6:6 / 신승욱 교육목사

(172)

"여호와께로 돌아가 힘써 그를 알자"

호세아 5:13-6:6 / 신승욱 교육목사
우리는 흔히 상황이나 마음을 쇄신하고자 할 때에 ‘돌아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를 들어 ‘기본으로 돌아가자’ 혹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등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되어 가고 있는 일들이나 사람의 마음가짐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다고 판단될 때에 그러한 다짐을 하면서 바로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일은 필연적으로 그 기본이나 초심을 ‘상기’하는 것을 포함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호세아 선지자는 환난으로 인해 비참한 신세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자’ 그리고 ‘알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로 돌아가며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백성들에게 의무적이면서도 동시에 효력 있는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줄 모르고 반복되는 자신들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 돌아오라고, 원래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자고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의 호소를 끊임없이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 백성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신세를 해결하기 위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람의 명령을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불신앙적인 해결책만 강구합니다.
  번영을 누릴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고난을 당할 때는 사람만 찾아 의지하는 최악의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여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리가 그를 힘써 알자’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며 ‘자신들에게는 복된’ 최상의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죄와 그 징벌에 대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해결되었지만 동시에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에게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해 환난과 역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있어서 유일한 최상의 해결책인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를 힘써 아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합니다.

  1. 언약 백성은 시련을 격을 때에 의지할 다른 어떤 것을 찾아 나서지 않고 먼저 여호와께로 돌아갑니다.

  5장 13절부터 6장 2절에 기록하기를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병을 깨달으며”, “상처를 깨달았고”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자신이 비참한 신세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갈 생각은 못한 채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는 불신앙적인 해결책만 강구합니다.
  그러니 그 앗수르가 “너희를 고치지 못하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자, 젊은 사자”처럼 그들을 “움켜가고” “탈취하여”라고 표현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즉 ‘그것이 바로 나이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강조용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겪는 비참함은 그들이 단지 불운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가져오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심으로 하나님 외에는 이스라엘이 도움을 받을 소망이 전혀 없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자신의 친 백성을 그 상태로 유기하여 버려두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자비’가 선언됩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은 사자가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 백성들을 찢긴 상태로 놓아 둔 채 그들로부터 떠나버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라고 조건을 다시면서 그 백성이 언제라도 뉘우쳐 회개하기만 하면 회복시켜주실 준비가 되어있으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라고 확언하심으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전적 타락과 무능’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실하신 사랑과 전능으로 회개하게 만들어 주시고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6장 1-3절은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대언되는 하나님 자신의 말들 가운데 유일한 호세아 선지자 자신의 말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심중이 선지자의 호소로 표현된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라고 할 때 ‘돌아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슈브’는 이 문맥에서 ‘회개하여 다시금 찾다(seek)’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죄를 시인하고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다시 여호와를 찾고 바라자!’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찢으셨”“치셨”지만 다시 “낫게”하시고 “싸매어”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그 일이 “이틀 후에, 셋째 날에” 된다고 했는데 이는 ‘곧, 당장’의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완벽한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리시”“일으키시”“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라고 선언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회복의 성취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저와 여러분은 언제든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환난과 고난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회복의 성취는 결국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었습니다.
  패역한 죄인들의 죗값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부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에서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고 18절에서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 같은 언약백성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책(罪責)’을 완전히 벗었고 ‘자유’를 얻었으므로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에게 ‘영원히’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본문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언약백성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환난과 고난을 만날 때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속죄함을 받은 언약백성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가져올 ‘구원의 완전한 성취’에 이르기 전까지는 언약백성 아닌 자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내리신 ‘언약적 저주’아래 놓여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여전히 환난과 질고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욥의 경우와 같은 믿음의 ‘연단’일 수도 있고 혹은 죄에 대한 ‘징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매우 유한하여 이 고난이 ‘연단’인지 ‘징계’인지 명확히 분간해낼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가 되었던지 간에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 ‘여호와께로 돌아가야’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먼저는 ‘회개 자복’하는 것입니다.
  즉 역경 앞에 섰을 때 나름 잘해왔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냐며 스스로 속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딱히 부족한 모습 없다고 교만을 부리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다시금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하루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온전히 인정해야합니다.
  또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찾고 바라는’ 것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자식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월급날을 바라보고 사는 것처럼, ‘바라보다’ 즉 그것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 효력을 믿고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을 찾고 바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호와께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선 하시는 일은 “낫게” 하시며 “싸매어”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당한 환난과 고난으로 마음과 정신이 망신창이 되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돌아온 자식의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치유해 주시며 지치고 나약해진 정신을 다시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살리시고” “일으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 ‘소생의 능력’으로 돌아온 당신의 자녀의 인생을 ‘소생’ 시키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일으켜 부활 승리케 하신 그 권능으로 당신의 자녀들 역시도 부활의 승리의 자리에 까지 일으키실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답게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 자복하고 하나님만을 찾고 바라봄으로써 마음과 정신의 치유함을 받고 인생이 다시 소생케 되어 최후 부활 승리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2. 언약 백성은 고난 가운데서도 성실히 여호와를 알기를 힘씁니다.

  6장 3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패역한 실상을 다시 다른 표현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러함에도 그들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음도 다시금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를 두고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인애” 즉 ‘성실함’이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금세 없어져버림을 통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라는 말은 선지자들이 선포한 내용대로 그들을 치셨음을 의미하고 “내 입의 말로” 즉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그들이 심판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있는 죄를 그냥 없다고 넘기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면서도 그 친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애절한 마음을 또 다시 전하고 계십니다.
  그 마음의 내용은 “제사를 원하시는”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과 “번제 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인애”로 번역된 ‘헤세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말이 나타낼 수 있는 몇 가지 뜻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 단어의 핵심적인 의미인 ‘지속적 신실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신다는 말은 ‘아침 이슬’처럼 잠간 있었으나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 ‘꾸준한 신실성’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제사자체가 필요 없다거나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인애” 즉 ‘지속적인 신실함’이 없는 허울뿐이고 종교적 형식만 있는 제사라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는데 여기에 쓰인 ‘알다’라는 단어는 어떤 지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식을 요구하고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이심을 알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신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의 언약’을 세워주셔서 영원히 구원해주시고 언제나 함께해주신다는 ‘임마누엘의 언약’을 주셨는데 그 백성들이 그 은혜롭고 놀라운 약속들을 자꾸 망각하고 신뢰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라’ 즉 그러한 ‘언약의 주’ 되시는 하나님을 상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즉 언약의 하나님임을 믿지도 못한 채 그저 이방종교들 흉내나 내면서 제물이나 바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언약의 주’로 신뢰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힘써 여호와를 알 때에 그 분은 스스로를 “새벽빛 같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일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임하신다고 했는데 여기 “비”는 봄비를 의미하며 “늦은 비”는 가을비를 의미함으로써 메마른 땅을 부족함 없이 적시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메마른 심령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지금 환난으로 인해 비참한 신세에 처한 백성들에게 촉구되는 두 번째 내용은 바로 “인애”로써 “힘써 여호와를 알자”였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주’되심을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일에 ‘계속해서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언약백성 된 우리에게도 시대와 장소가 바뀌었을 뿐 동일한 말씀이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주어져 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후세들이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조상들의 언약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인가? 그 때 그 언약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가?’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심지어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후 본국에 돌아 와서마저도 제기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의심을 계속 품었던 이유들 중 핵심적인 이유가 그들이 처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이시라는 것과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는 언약이 사실일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상기’ 하고 ‘기억’하라고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면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시라는 것과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언약적 사실을 ‘힘써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애” 즉 ‘꾸준한 신실성’을 함께 요구합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들여서 헬스클럽에 가고 데이트를 하고 즐겨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시청하듯이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들여서 ‘여호와를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칼빈이 말하였듯이 저와 여러분은 너무 ‘연약하고’ ‘죄성이 강해서’ 스스로 혼자서 알아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시간을 내서 교회의 예배의 자리, 봉사의 자리, 성경공부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꾸준하게 신실하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일들은 ‘교회 중심’ 이라는 그저 교회가 늘 강조하는 식상한 구호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게 될 ‘여호와를 힘써 알기’위한 가장 실제적인 방편들입니다.

  언약은 본질적으로 우리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그 ‘언약의 주’되시는 하나님으로 안다고 할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진리가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의 언약을 받은 자들만이 누리는 ‘임마누엘의 언약’ 즉 ‘함께하심’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 때에 당면한 어려움들이 당장에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들이 오랜 시간 바뀌지 않고 때론 너무 길어지는 나머지 다윗처럼 “주여 언제까지니이까?”하고 탄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호와를 알기’를 힘쓰는 자는 환난이 가지고 온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온갖 근심과 두려움으로 그늘 한 점, 물 한 방울 없는 사막과 같던 메마른 심령이 ‘임마누엘 언약의 위로’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유는 오늘 본문이 말해주듯이 ‘여호와를 알기’를 힘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벽빛 같이 어김없이” 나타나시고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임마누엘 언약의 위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여 ‘문제 해결’과 ‘복’을 달라고 담대히 부르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결같은 신실함을 가지고 늘 하나님이 언약의 주되심과 그 약속들을 기억함으로 큰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침 해와 단비처럼 임하시는 임마누엘의 위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신앙의 실패를 자주 일삼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언제든지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정말이지 복음이요 축복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헤세드’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세우신 언약에 스스로 그토록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를 받아주실 수 있는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그렇게 받아 주신 백성을 소생시키시고 복 주실 수 있는 전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헤세드’를 언제나 원하고 계십니다.
  변덕스럽고 부족하며 죄로 얼룩진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온전한’것으로 ‘수용’되고 ‘간주’되므로 꾸준히 지켜나갈 것을 원하십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그 자녀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이 연단이든 징계든 혹은 인간의 타락이 세상에 가져온 자연스러운 산물이든 상관없이 그 택한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거기에 숨어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에 ‘여호와께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고 기대하여 상한 심령의 치유와 삶의 소생케 됨을 얻을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힘써 알아’ 그 분이 언약에 신실하신 언약의 주되신다는 것을 꾸준히 기억하고 구원 언약의 확신 위에 굳게 서서 임마누엘 위로의 언약의 복을 맘껏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을 의지하려 찾아 나서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알기’를 힘씀으로서 시련의 한 복판에서도 참된 언약백성의 언약적 삶을 즐길 줄 아는 언약 신앙의 장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