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7-23 “거룩한 자, 서로 사랑하는 자” 베드로전서 1장 13 – 2장 3절 / 신승욱 교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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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7-23
2017′경향의 강단(32) (2017년 7월 23일 / 주일 대예배)
“거룩한 자, 서로 사랑하는 자” 베드로전서 1장 13 – 2장 3절 / 신승욱 교육목사(제네바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221)

"거룩한 자, 서로 사랑하는 자"

베드로전서 1장 13 – 2장 3절 / 신승욱 교육목사
사도 베드로는 본 서신을 시작하면서 신자들을 ‘흩어진 나그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먼저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 ‘산 소망’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우주적 교회의 멤버들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망과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모든 연단을 이겨낼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인 13절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다 주실 은혜”란 이미 확증된 우리 구원의 완전한 역사적 성취를 포함하여 신자들이 유업으로 받을 온갖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말합니다.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표현은 ‘모든 소망을 완전히 거기에 두라’는 뜻입니다.
  즉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인생의 단계마다 현실적인 목표와 소망이 있지만 궁극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소망은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에 ‘가져다 주실 은혜’에 완전히 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소망을 두는 일이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일이 아니라 상당히 긴장감 있고 현실적인 일임을 일러주고 있는데 그것을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은 긴 가운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어떠한 일을 활동적이고 집중적으로 하고자 할 때에 허리 아래로 늘어져 있는 부분을 걷어 올려 다리 사이로 모아서 허리띠에 잡아 끼웠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소매를 걷어붙이고’정도인데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했으니 마음가짐을 그와 같이 다잡으라는 말입니다.
  “근신하여”라는 말은 ‘깨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의 뜻입니다.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이와 같은 자세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은혜’에다 소망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베드로는 그러한 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해“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사는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은혜에 힘입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1장 14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어진 사명은 먼저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윤리적인 속성을 포함하면서도 그 주된 의미는 ‘구별되다’ 혹은 ‘다르다’는 뜻으로서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가 그 속성과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것처럼 신자들도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행실”에 있어서 그러해야한다고 하심으로써 그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만이 아닌 삶의 총체적인 모든 국면에 있어서 거룩해야함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14절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욕망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 명령의 근거로 레위기의 말씀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다른 이방나라들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함을 알리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즉 믿는 신이나 종교적 개념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과는 다른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정확히 같은 원리를 당대의 신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거룩하게 사는데 실패했다가는 심판 날에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취소되거나 잃어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의 뜻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 즉 ‘공정하신’ 아버지로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계속해서 살지 못하면 그 행위에 따라 이 땅에서 징계하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마지막 심판 날에 불신자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과 ‘거룩한 삶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지내는’ 이 곳은 신자들이 “나그네로 있을 때”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별된 거룩한 삶에로의 명령을 내리면서 신자이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자들이 어떻게 그 명령에 응답하고 끝까지 완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고한 이유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았는데 그 값이 은이나 금 정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이란 하나님 아닌 온갖 다른 것들을 섬기고 의지하고 소망하는 것을 말하며 “대속”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그 ‘헛된 행실’로부터 신자들을 사들여 빼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은이나 금은 가장 귀한 물건들 중 하나로서 한 개인이 소유한 노예를 다른 사람이 사들이는데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헛된 행실’에서 산 것은 귀하디귀하다는 은 금 정도가 아닌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사서 소유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하고 없어지지 않을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대신속죄’는 ‘완전히 성취’되었고 ‘영원한’ 것으로서 신자들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그렇게 되도록 애쓸 수 있는 이유와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분으로서 “이 말세에”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했는데 이는 신자들의 거룩한 삶의 토대인 대신속죄가 창세전에 하나님의 깊고 완벽한 계획 가운데 있던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사실과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었는데 이는 신자들의 “믿음과 소망” 즉 그들의 삶에서의 ‘신뢰와 소망’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두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거룩한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우주적 교회의 신자로 부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에 모든 소망을 두고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첫째 원리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신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를 구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헛된 행실’ 가운데 다른 신, 돈, 명예, 권력과 같은 피조물들을 신뢰하고 목적으로 하며 섬기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초탈했다고 자처하는 삶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은 자신의 인생과 이 세상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결국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거룩하다’는 것은 그러한 모습들과는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모든 소망을 그 분께 두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과 원리’로 성경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되어 거룩한 자가 되는 일은 세상과 담을 쌓거나 초야에 묻혀 살아서는 성취 될 수 없는 일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해 나가고 계시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일각에서는 ‘거룩함’의 개념에는 ‘도덕성’이 가장 강조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한 강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독교에 ‘도덕적 해이(解弛)’가 만연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께 소망을 두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가 ‘지속적인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속량’하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땅에서의 우리의 나그네 여정을 통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신자’라고 자처한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과 가정과 학교를 비롯한 모든 삶의 요소들을 통하여 ‘거룩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속량 받은 무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음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주듯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대신속죄 완전성과 영원성’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가 부족하지만 거룩한 삶을 계속 경주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신속죄의 완전성과 영원성’이 거룩한 삶의 완성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삶’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며 이 ‘거룩한 삶’을 경주하는 자들만이 주님 재림하실 때에 인생의 최후 승리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속량해주셔서 우리가 꿈도 꿀 수 없었던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그 속죄의 권능으로 거룩한 삶의 완성까지 보장해주시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거룩한 자’가 되기를 힘쓰시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2.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장 22절부터 2장 3절에 기록하기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이전 본문에서 베드로는 나그네요 택하신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수직적 관계’의 모습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그 백성들의 ‘수평적 관계’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명령문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다’는 것은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으로 여러 가지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 본문에서는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다’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본문에 이어지는 2장 5절에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표현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의 모습들을 보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즉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즉 ‘완전한 죄 사함을 받아’ 가능하게 된 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것은 ‘거듭난 자들의 일’로서 ‘거듭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면서 “너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듭남’ 즉 ‘중생’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썩어질 씨”가 아닌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연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생식 작용을 통한 “썩어질 씨”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결국 죽고 말지만 ‘중생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썩지 아니할 씨”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중생인들’만의 특권이자 의무인데 이것이 사도 자신이 전한 복음의 ‘말씀’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말씀은 “썩지 아니할 씨”로서 영원하기 때문에 그 중생인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명령’의 가치도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언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풀과 꽃과 같이 시들어 없어지고 마는 ‘육체의 씨’의 유한성과 “세세에 있을” 하나님 말씀을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과 능력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거룩한 공동체의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이 일을 실행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편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순전하고 신령한 젖”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모하다”는 말의 원어는 ‘매우 갈망하다’는 뜻의 단어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그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함’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하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신자가 ‘이미 확증되고 보장된’ 구원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통해 양육 받고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즉 말씀을 매우 갈망하여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구원의 최종 완성에 이르도록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는 다는 의미입니다.
  시편의 인용인 2장 3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맛’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맛 본 사람이라면 말씀을 다시 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언제나 하나의 ‘새로운 인류’(new humanity)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되는 것은 ‘새롭게 하심’ 즉 말씀을 통하여 ‘중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역시도 신자들 간에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함을 명령하면서 ‘거듭난’ 사실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에 순종하려면 먼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동족인 ‘중생인의 무리’라는 매우 특별한 공동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뜨겁게 사랑해야하는 ‘형제들’이란 앞에서 말한 ‘거룩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함께 한 목적을 향해 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 일을 “마음으로 뜨겁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는 ‘경향교회’라는 “형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향교회가 ‘거룩하게 된 자들 간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여 그 교회된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매우 엄중하고도 중요한 명령이며 우리가 중생 받은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뵙기 전에 이 땅에서 하고 가야할 그 어떤 한 일보다도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거룩하게 된 자들의 공동체’가 그 관계를 서로 잘 유지하여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일에 우리의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비방’은 건설적인 비판과는 다른 것으로 그저 남을 깎아내리고 험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가정들과 사업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돕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과 함께 울고 기쁜 일을 만난 자들과 함께 웃으며 서로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각자가 맡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직분을 성실히 감당하며‘교회의 일’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서로 잘 지냄’ 그 이상의 것으로 우리가 ‘교회’를 위해 받은 사명입니다.

  이것은 ‘중생인들’만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자 보람이며 삶의 용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것처럼 이 일의 ‘가치’와 ‘당위성’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중생인’이라면 이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온전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와 같이” 갈망해야 합니다.
  이유는 신자는 ‘말씀’을 듣고 믿어 ‘거듭나게’되었고 여전히 그 ‘말씀’을 듣고 믿어 ‘자라가게’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이행 할 수 있는 ‘영적 자양분’ 또한 ‘말씀’을 통해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주는 ‘은혜’와 말씀이 가져다주는 ‘능력’을 한 번 맛 본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을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생명’을 변화시킨 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도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자신의 인생과 스스로의 유익 밖에 볼 줄 몰랐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볼 줄 알게 만들어주고 ‘형제들’을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줄’아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세상의 현실’에 지배를 받던 사고방식이 ‘말씀’에 지배받게 될 때에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말씀을 실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포되는 말씀 앞에 늘 모여야 하며 기록된 말씀을 늘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에 큰 변화와 역사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갈망함으로 그 말씀에 능력에 힘입어 거룩하게 된 경향의 공동체의 바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경향의 형제들을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그저 좋은 사람(nice person)이 되는 것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대로 그것은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구분되는 인생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제도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유익을 추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또한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저 사회와 개인의 안녕을 도모하는 지역사회의 종교단체 정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교회된 자들에게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과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는 매우 핵심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 사명을 부여 받은 자들은 1세기 로마제국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때는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자’로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주 힘든 환경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러한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했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이 그 일의 종국적인 성취를 확신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능하게 했으며 ‘말씀의 은혜’가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도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쉽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신자들에게 하시는 이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들은 우리를 택하신 이유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온전히 유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하려고 할 때에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과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살리신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고 헛된 행실에 메여있던 우리에게 중생인의 참된 삶을 허락하신 ‘말씀의 능력’에 힘입을 때에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에 온전한 소망을 두면서 경향교회의 ‘거룩한 자’가 되기를 힘쓰며 경향의 형제들을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일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