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7-09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데살로니가후서 1장 3-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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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7-09
2017′경향의 강단(30) (2017년 7월 9일 / 주일 대예배)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데살로니가후서 1장 3-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7월 9일(주)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215)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데살로니가후서 1장 3-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우리 교회의 ‘구원의 길, 축복의 길’이라는 제목의 새 신자 교육 교재에 보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단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신자가 예수님에 관해 꼭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라는 사실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신앙의 내용’에 마지막으로 나와 있는 것이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에는 앞의 세 가지 사실들만 믿으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초림’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 신자라면 그 예수님께서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도 꼭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나는 예수님의 초림은 믿지만 재림은 믿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사실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쓰게 된 동기도 그와 비슷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거기서 “세 안식일”(행 17:2) 동안 전도한 후에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그 이후에도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사회로부터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교인들 중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교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날과 그 때는 성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예수님께서 명백히 밝혀 주신 사실에 어긋나는, 잘못된 재림신앙의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써 보내게 되었고, 따라서 이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교훈들이 주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왜 기독신자는 예수님의 초림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 또한 반드시 믿고 기다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현재의 고난에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신앙이 더욱 굳건히 성장하게 됩니다.

  3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설립되었지만 아주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다른 “여러 교회”들 앞에서 “자랑”거리였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두고 바울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말하면 또 하나 으레 따라오는 것이 바로 ‘소망’인데, 왜 여기서는 ‘믿음’과 ‘사랑’만 나오고 ‘소망’은 빠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보면, 거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똑같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두고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분명히 셋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몇 달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편지들인데, 바울이 같은 교인들을 두고 왜 첫 번째 편지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언급하면서 감사해 놓고서 이 두 번째 편지에서는 유독 ‘소망’만 빠뜨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빠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소망’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 ‘소망’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구체적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곧바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4절에 보면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는 큰 핍박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그 교인들이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그들이 어떤 ‘큰 소망’을 확실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하고 있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의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받는 ‘박해와 환난’이 바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지상교회를 통해서 이미 시작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문맥을 볼 때 그 완성의 단계 곧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 현재는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도” “견디며”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연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희망을 붙잡아야 현재의 고난을 더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누비게 될 그 설레는 한 날을 그려보면서 수험생들은 다시금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외식하는 것이나 여행 다녀오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생활비를 아껴 적금을 붓는 것도 언젠가는 ‘내 집 마련’의 꿈이 이루어질 날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반드시 도래할 ‘천당’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할 소망이 지금 잠시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넉넉히 ‘인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바로 그 인내가 우리의 ‘믿음’을 ‘칠 배나 뜨거운 불에 연단된 정금’처럼 더욱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어떤 고난이나 핍박이 닥치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재림과 최후심판의 날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표’인 줄로 깨닫고 더욱 ‘신앙의 허리띠’를 단단히 묶고서 끝까지 ‘견디어내야’ 합니다.
  그 ‘테스트’만 통과하면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자’로 한 단계 더 가까워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기독신자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가까워진 예수님 재림의 날을 소망하는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모든 원수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김으로써 최후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6절부터 9절의 말씀에 “6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박해”하고 “환난”을 당하게 했던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일깨워 주면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도중에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그는 거기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자가 되었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것을 두고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면서”(행 17:4-5) 핍박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어”(행 17:10) 피신을 시켰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데살로니가교회의 개척 당시부터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괴롭혀 온, 정말 악질적인 무리를 가리켜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환난으로 갚으시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즉 그 원수에 대한 ‘신적 보응’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처럼 교회와 성도의 원수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시는’ 날이 곧 성도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이것 역시 분명히 예수님 재림 때에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 재림의 장면은 ‘심판주로서의 권위’가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능력의 천사들”이란 바로 ‘심판사역을 보좌하고 수행할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신다고 한 것도 ‘심판의 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이 될 원수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화육강세하셨던 초림 때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 이처럼 ‘무서운 심판주’의 모습으로 재림하시게 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예수 복음의 전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아까 ‘성도로 하여금 환난을 받게 하는 핍박자’들과 다 동격이며 오직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예수님을 두려움 가운데 직면하게 될 한 날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벌이며 곧 지옥세계의 현실이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원수들이 받을 벌을 두고 ‘환난’에서 ‘형벌’로 그리고 여기서는 “영원한 멸망”이라고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더욱 한이 되는 경우는 그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피하게 될 때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가해자의 변호사가 절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는 변론을 한다든지 혹은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자기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도 범인은 오히려 비웃는 미소를 띠면서 법정을 여유 있게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아버지나, 자기 남편을 죽인 범인이 실형을 받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어도 속수무책인 아내는 그야말로 한이 맺혀 이를 바득바득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 직후에 있을 ‘백보좌 심판대’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기독신자의 모든 원수들을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그 마땅한 ‘형벌’을 받게 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독신자는 그 어떤 원수에 대해서도 완벽한 최후승리를 거둘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그 원수가 그냥 ‘무죄방면’ 되도록 버려두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그러니 너희는 그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에게는 ‘영원한 멸망’으로, 의인에게는 ‘안식의 구원’으로 갚아 주실 예수님 재림의 날을 굳게 믿음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원수’들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재림의 소망을 지키는 성도는 영화(榮化)에 도달하여 우리 주 예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비단 ‘원수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라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당신의 공생애를 통해서나 부활 승천하셨을 때에도 보여 주지 않으셨던 최고최대의 영광을 대동하시면서 오실 것은 아까 7절 하반절을 비롯하여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온갖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장면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조차 “놀랍게 여김을 얻는” 우주 역사상 최대의 장관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놀랍게 여김을 얻는다.’라는 말은 ‘찬사와 경탄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독신자들은 이 세상에 살 동안 늘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 주님을 친히 뵙게 될 날을 그려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날을 맞이하게 되어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때에는 그 평소의 상상이나 기대와는 비교도 안 될 실로 ‘영광의 극치’로 충만한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 모두가 ‘놀라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너희도 우리 사도들의 증거를 믿었으니 이 재림주를 놀라움으로 영접하는 자리에 꼭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재림 때에 예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찬란하기 짝이 없는 영광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우리 신자들이 도대체 거기에다 무슨 영광을 더 입혀 드릴 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여기 ‘얻으시고’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받으시고’라는 뜻인데, 그처럼 이미 최고의 영광을 대동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께 도대체 뭐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또 받으셔야 할, 더 추가되어야 할 영광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성화생활을 하며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이제 ‘영화에 이르게 된 성도’들을 당신이 받으실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이라고 하면서 그 기도의 제목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쁨으로 선을 행하고, 믿음의 역사를 힘을 다해 이루는’ 가운데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성화의 진보’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계속되기를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결과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는” ‘성화의 완성’ 곧 ‘영화’에 이르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황공스러운 사실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영물들과 천군천사들이 호위하는 영광보다도, 성화의 완성에 도달하여 당신 앞에까지 서게 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 소중한 영광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온 우주와 천상의 모든 빛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당신을 감싸는 그 어떤 영광보다도, ‘선을 행함’과 ‘믿음의 역사’를 통해 많은 ‘달란트’를 남기면서 ‘주인’을 기다려온 ‘충성된 청지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받으시는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며 또한 반드시 바쳐야만 할 유종지미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환난 중에도 재림의 날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를 통해서 이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핍박을 당하면서도 모든 심판을 오직 ‘백보좌 심판’에만 맡기는 가운데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를 통해서 이런 영광을 ‘받으시게’ 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을 대동하시고 재림하시면서도 오히려 저와 여러분을 통해 바로 이런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도록 그 날이 올 때까지 부단한 ‘성화의 진보’를 통해 ‘영화’의 자리에 꼭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주일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 신앙의 내용은 곧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과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에 이어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으로서 완성됩니다.
  즉 예수님을 ‘재림하실 심판주’로 믿는 것은 예수님을 ‘죄인을 위해 화육강세하신 구세주’로 믿는 것과 똑같이 요긴하고도 필수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기독신자라 하면서도 ‘예수 재림의 소망’이 없으면 문자 그대로 그 ‘믿는다는 것’도 다 ‘헛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없다면 온갖 시험과 환난이 그칠 날 없는 이 땅에서 도대체 무슨 희망을 가지고 계속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지켜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살 맛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보좌 심판대’에 높이 앉으셔서 모든 악인들을 ‘영원한 멸망’에 처하실 그 날이 없다면 도대체 그 어떤 ‘착한 사람’이 자기를 ‘옥에 가두고 채찍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아무리 기독신자라 할지라도 그야말로 원한에 가득 차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재림주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뵙게 될 날을 믿지 않는다면, 그저 세상에 살 동안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대상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기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대상’을 그저 추상적으로 받들어 모시는 외식적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죄인 대속을 위해 구세주로 오신 초림’을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필연적으로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주로 오실 재림’ 또한 믿어야만 합니다.
  즉 재림 소망은 우리 기독신자의 ‘예수 신앙’의 내용 중에 제일 마지막이면서도 또한 화룡점정입니다.
  이 재림 소망이야말로 ‘우리 믿는 것’에 대한 하이라이트이며 동시에 대단원의 막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그 어느 위인이나 현자도 죽을 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약속을 남겨 주지 못했습니다.
  석가모니는 ‘너희들도 스스로 득도를 해서 나처럼 불타가 되어라.’는 말을 그의 제자들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중들은 오늘도 꼭두새벽마다 일어나서 몽롱한 상태에서 죽비로 맞으면서 참선을 한답시고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호메트는 ‘나는 다시는 너희들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간다.’라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슬람교도들이 그네들의 교주와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오로지 그 마호메트의 썩은 시체가 묻혀 있는 메디나에 성지순례를 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런 소위 ‘성인’들과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께서 더 이상 인간의 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것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는,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실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멋진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세상에서 남보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꿈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합당한 자’로 영접 받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소멸될 수밖에 없는 무슨 ‘버킷 리스트’가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소멸하게 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완성될 ‘영생’, 곧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실 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0:20)고 철석같이 약속하신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는 그 날에 이 놀라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을 저와 여러분이 꼭 믿어야 합니다.
  바로 이 소망 가운데서 오늘의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모든 ‘원수’에 대하여 ‘승리’하고, 끝내 ‘영화에 도달한 천국 백성’이 되어 우리 예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