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7-07-0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시편 24편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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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29-1) (2017년 7월 2일 / 맥추감사 찬양예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시편 24편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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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시편 24편 1-6절 / 석기현 담임목사
몇 십 년 전부터 미국교계에 크게 번지고 있는 것이 바로 ‘열린 예배’라는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전통적 예배의 순서와 경건한 분위기와는 아주 다른, 여러 가지 새로운 순서들과 자유로운 분위기가 도입된 예배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바로 그런 예배로 크게 성공했다고 하는 대표적인 한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선 그 예배에서는 목사가 처음부터 사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일단 5, 6인조 쯤 되는 밴드가 나와서 가스펠 송을 인도하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는데, 물론 묵도 같은 것도 없고 그 대신에 밴드 리더가 간간히 유머러스한 멘트를 해서 교인들을 웃기면서 정말 사람을 아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제가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가지 특순 내지는 이벤트 따위가 따라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자가 “타지방에 사시는데 오늘 우리 교회에 방문하게 되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라고 하자 몇 십 명이 손을 들었는데, 그 중 제일 먼 데서 온 사람에게 도넛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또 각자가 앉은 극장식 의자 밑을 살펴보고 거기에 X자가 크게 그려져 있는 종이를 발견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그 당첨자에게는 그 교회 교인 한 명이 운영한다는 볼링장에서 4인조가 플레이할 수 있는 쿠폰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말하자면 무슨 즉석경품 추첨 같은 것을 했던 것입니다.
  또 바로 그 주일에 생일을 맞은 사람들을 다 강단 위로 올라오라고 하고는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타이밍을 맞춰서 강단 위에서는 수십 개의 풍선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순전히 이런 식으로만 진행되는데, 물론 아무 은혜로운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마치 무슨 파티나 행사장에 온 것 같이 저까지도 솔직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가서 어떤 여자 목사가 올라와서 그날의 설교라는 것을 하는데, 이것 역시 성경 한 절 읽어 놓고 나머지는 완전히 인생상담소의 카운슬러들이나 하는 말을 한 십오 분 정도 해 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니 참석자들에게 정말 ‘부담 없고 재미있는 예배’는 되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제가 그날 본 그런 이벤트들이 매주일 똑같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그 순서들이 온갖 새로운 것들로 바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의 논거는, 예배라는 것이 ‘이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seekers’ 즉 ‘구도자’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직 불신자이면서 어떤 참된 도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끌어야 하는데, 전통적인 방법과 순서를 따라서 예배를 드리면 그런 구도자들은 지겨워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소리이지요.
  예배가 어떻게 ‘불신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예배’는 당연히 믿는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전도집회’가 바로 불신자를 위주로 계획되고 실행되어야 하는 행사가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이런 seekers’ service, 즉 ‘구도자를 위한 열린 예배’라는 것이 지금 미국과 한국 기독교계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행병처럼 퍼져 가고 있습니다.
  구도자, 즉 ‘도를 찾는 자’란 참 듣기 멋있고 특히 불신자들을 포장하고 미화시키기에 딱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구도자들이 그처럼 오락프로그램 쇼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열린 예배라는 것을 통해서 도대체 어떤 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찾는다 해도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 참된 복음, 진정한 구원의 길이 될 가망성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택자들이 ‘찾게 되는 것’은 결코 어떤 도가 아니라 오직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 자체임을 증거해 줍니다.
  본문 6절에 “여호와를 찾는 족속,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할 때, 여기 ‘찾다’ ‘구하다’라는 말이 바로 영어의 ‘seek’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기독신자는 예배를 통해 ‘도’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사모하며 그 교제를 즐거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처럼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만 뵈어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그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소유하고 계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1절에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지상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물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어지는 2절에 나오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땅의 기초를 바다와 강물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세우셨다는 뜻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 천지만물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비단 만물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육신부터 시작해서 전 인생까지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가 이런 하나님을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그 분께서 베풀어 주시는 ‘생명의 수한’을 마음껏 영위할 수 있으며 그 분께서 지탱해 주시는 ‘한반도라는 땅덩어리’ 위해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 예술가가 재벌을 후원자로 두면 늘 든든한 마음으로 자신의 창작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만을 ‘복의 근원’으로 찾고 의지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세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충만한 것’을 공급받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활짝 펼쳐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가 하나님만을 구하는 둘째 이유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선민으로 구별하여 교회에 모이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했습니다.
  이 ‘여호와의 산’이란 바로 성소가 있는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그처럼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에 감히 아무 사람이나 올라가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이어지는 4절에 나오는 대로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세상의 불신자들과는 달리 행실이 깨끗하고 마음이 선하고 바르고 정직한 사람들만 이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특별한 공동체 안에서 그런 영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특권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이 교회를 통해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거룩한 단체, 오직 마음과 행실이 깨끗하고 온전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이 성산에 지금 저와 여러분이 서 있는 것입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 모두가 원래는 이 거룩한 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턱없이 모자라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4절에 나오는 대로 완벽하게 살고 있는 사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십자가 공로를 통해 저와 여러분을 이 아름답고 멋진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불신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비록 부족하지만 그래도 함께 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과정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세상 사회에서도 오직 선별된 소수만 가입될 수 있는 특별한 단체가 있지만, 저와 여러분은 그런 사회적 상류층만 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차원 높고 복스러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를 그 언제라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시고 이 ‘거룩한 산’에 들어오게 해 주시고 함께 하나님의 양자 된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 또한 늘 사모하며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5절을 다시 보시면, 이처럼 ‘여호와를 찾고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까 소위 구도자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 순서가 아닙니까?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구원의 의를 입을 수 있게 되는가 하고 구도를 해서 참 신과 바른 종교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참 신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복과 구원 문제는 자동적으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그저 복 복 하면서 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기복주의 종교인들, 그런가 하면 무슨 선행이니 공로니 참선이니 득도니 하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하는 인본주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자들은 평생토록 도를 찾고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해 보아야 결국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참 하나님을 찾을 도리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그런 헛된 구도의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을 바로 찾으면, 모든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 인간의 금세와 내세의 구원과 심판권을 완전히 쥐고 계신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노력과 공로로써 복을 받고 구원을 얻겠다고 헛수고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찾는 족속,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됨으로써 ‘땅과 거기 충만한 것’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복과 이 ‘거룩한 곳’ 교회로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선민’들과 서로 기쁘게 교통하는 복을 마음껏 영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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