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7-02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 – 4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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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7-02 경향의 강단(29)
2017′경향의 강단(29) (2017년 7월 2일 / 맥추감사주일 대예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 – 4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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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 – 4장 5절 / 석기현 담임목사
철학자 플라톤이 남긴 유명한 ‘세 가지 감사제목’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둘째는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살게 된 것이며, 셋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추가해서 ‘네 가지 감사제목’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이것은 그리스인이 아닌 외국인이나 아테네 시민 중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공감할 수 없는, 오직 ‘소수의 특정집단’에 속한 자들만 공유할 수 있는 감사제목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기독신자만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감사제목’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이제 곧 자신의 목회 은퇴와 순교를 앞둔 시점에 자기 뒤를 이을 후배 목사인 디모데에게 어떤 복음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목회서신의 첫 번째가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감사”라는 말을 세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남달리 많은 사람이었고 또 항상 감사드리면서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제목들에 대하여 그의 후배 디모데 역시 똑같이 감사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 디모데로 하여금 모든 기독신자들 역시 같은 제목으로 하나님께 꼭 감사드리도록 가르치라고 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적어도 참된 기독신자라면 누구나 공히 그리고 항상 감사드려야 할 세 가지 감사 제목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확신’이 있는 기독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고 있는 ‘중생의 은혜’를 먼저 감사드려야 합니다.

  1장 12절부터 17절에 “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같은 죄인을 불러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더욱이 ‘사도’라는 “직분”까지 맡겨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충성되이 여겨”라는 말은 바꾸어 번역하자면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여겨’라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자면, 바울은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기에 부적격자 정도가 아니라 그 과거 경력이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그는 교회와 신자에 대하여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악독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회심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시는, 즉 사도의 직분을 맡길 만큼 완전히 신뢰해 주시는, 실로 큰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그처럼 신임 받는 직분자가 된 것은 물론 바울로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14절의 문장은 ‘내 속에’라는 말을 첨가해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는 말씀은 바로 바울 자신 속에서 일어난 일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심령에는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을 뿐 아니라, 그로서는 황송하기 짝이 없는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는 은혜까지 넘치고 넘쳤던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극단적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야말로 ‘죄인 중에서도 괴수’와 같은 과거를 가진, 죄인 중에서도 참으로 극악무도한 죄인이었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재기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살기등등하게 교회와 신자를 핍박하며 날뛰던 때의 ‘사울’을 보면서, 그런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더구나 교회의 사도까지 될 것이라고 그 누가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울’에 대하여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 그 결과 변화된 ‘바울’은 오히려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실로 훌륭한 모범적 신자가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아무 가망성 없어 보이던 극악한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그런 바울까지도 바꾸어 놓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모습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이었던 까닭에 그는 자기라는 존재 속에 일어난 그 엄청난 기적적인 역사를 두고 이처럼 감탄과 감사를 연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이런 감사가 절로 터져 나왔듯이, 참된 신자는 그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기가 중생 받았다는 이 감사의 간증이 절로 넘쳐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최고 고집불통의 죄인까지도 불러 회개시켜 새사람 만드시는 것, 교회와 신자에 대하여 최고 악질의 핍박자까지도 변화시켜 오히려 충성된 일꾼으로 바꾸어 버리시는 것 - 오직 예수님만 이런 기적을 오늘도 택자에게 일으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생 최대의 기적이 바로 내 인격 속에서,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것을 체험하는 신자는 실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자나 깨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신자라는 사람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새 생명을 두고 먼저 감사할 줄 모른다면, 다른 그 무엇을 두고 아무리 많이 감사한들 그것은 참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사람이 자기를 물에서 건져 준 구조대원에게 먼저 감사하지 않고 자기에게 담요 덮어 주는 사람에게만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장에서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자신을 그 총탄이 빗발치는 중에도 끌어내어 구해 준 동료병사에게 먼저 감사하지 않고 나중에 병원에서 자기를 치료해 주는 간호사에게만 감사인사하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있는 가운데 나오는 다른 감사들은 오히려 부당하고 악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을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던 ‘폭행자’를 이제 교회의 충성된 일꾼으로 섬기며 살게 해 주신 예수님의 이 무한한 긍휼과 엄청난 은혜를 인하여 날마다 제일 먼저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평화시대’를 살고 있는 기독신자라면 국가를 통해 누리고 있는 ‘안보와 신앙의 자유’를 또한 감사드려야 합니다.

  2장 1절과 2절 말씀에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신자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특히 그 중에서도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간구와 기도와 도고”를 하는 중에 또한 “감사를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신자들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이란 신자의 개인 신앙생활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단정”이란 말은 품위 있는 생활, 즉 인간답게 사는 육신생활을 뜻합니다.
  “고요하고”란 외적인 방해가 없는 생활, 즉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어떤 혼란이나 전쟁이 없는 안정된 상태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한”이란 내적으로 근심 없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종합해서 다시 말하자면, 영육 간에 ‘안보와 자유’를 누리며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기독신자는 나라의 위정자들이 제대로 정치를 해서 자신이 바로 이런 ‘경건과 단정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또한, 이미 그런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누리게 해 주시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그런 행복한 환경을 국가라는 조직사회와 위정자의 통치를 통하여 누리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독신자는 국가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며, 또한 조국과 사회를 통하여 현재 누리고 있는 평화시대에 대해서 늘 진정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감사를 했을 때 그에게 있어서 ‘국가’란 바로 로마제국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그렇게 옹호하고 보호해 주는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황제숭배와 우상숭배가 국교화되다시피 한 나라였으며, 바울의 진짜 조국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 억압하던 나라였습니다.
  더구나 그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기운마저 이미 싹트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런 로마제국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또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그 로마제국이라는 국가 덕분에 기독신자들이 신앙의 자유와 사회적 안보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로마제국의 법과 치안과 국력이 초대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전쟁 없는 평화 시대,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다니며 전도할 수 있는 교통망, 각 민족의 고유종교에 대한 자유 등을 누리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그렇게 사용하심으로써, 초대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중해 연안의 각 민족과 나라에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고,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로마제국이라는 나라와 그 위정자들을 두고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하겠습니까?
  아직도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 나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완벽한 국가라고는 할 수 없으며, 더욱 정계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에서 종북좌파가 급속도로 세력을 넓혀 가면서 국가안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지금의 우리나라를 옛날 왕조 시대나 일제 때에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오직 왕 한 사람만 자유롭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우리는 그래도 개인의 자유와 생존권이 헌법에 의해 보장된 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가 되어서 종교의 자유마저도 크게 핍박당하던 때와는 달리 얼마든지 마음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저와 여러분은 공산독재자의 압제로 인해 신앙을 위협당할 걱정이 전혀 없는 민주주의국가에 살고 있으며,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체포당했던 군사독재시절로부터도 이미 완전히 벗어난, 실로 건국 이래 최고의 평화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에도 바로 이런 나라에서 이런 좋은 시절을 누리고 살아왔는데 어찌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두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세상 국가의 체제는 완벽할 수 없고 위정자들의 정치는 불신앙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나라와 정치가들을 친히 주장하셔서 이 조국의 안보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베풀어 주신 사실에 대하여 또한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육신의 생명’이 영위되고 있는 기독신자라면 일상을 통해 누리고 있는 ‘일용할 양식과 범사의 복’을 항상 감사드려야 합니다.

  4장 1절 이하 5절에 기록하기를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믿음에서 떠난” 이단 중의 한 가지 유형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자들로서, 금욕주의가 곧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또 고린도전서 7장에서 환난의 시기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좋을 수 있다고 가르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바울은 결코 결혼을 금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결혼 금지를 법으로 정해 못 박는 것이야말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라고 단정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정한)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역시 금욕주의자들의 주장이었는데 특히 ‘육식을 금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이처럼 자기 의지로 자신에게 고행을 가함으로써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서, 여지없는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이처럼 금욕주의의 이단을 경고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은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음식물은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받아먹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물을 대할 줄 알게 되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즉 어떤 음식물이든지 귀중히 여기고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음식을 앞에 두고 항상 하신대로 먼저 ‘축사’하는 것 즉 감사기도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음식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신 바를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받고 또 기도를 통하여 그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리게 될 때, 그 음식물은 실로 “거룩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식사 감사기도는 아마도 기독신자가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감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성경의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 음식물에 대해서부터 ‘감사함으로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제일 쉽게 감사하는 마음이 떠오를 수 있는 일이고, 매일같이 일정하게 감사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사 감사부터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릴 줄 알게 됨으로써, 신자는 매일의 일상생활에 대한 범사에서 더 많은 감사 제목들을 기억하고 더 깊은 감사들을 더욱 자주 하나님께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혹 집에서 혼자 식사할 때 감사기도를 잊어 먹거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남들이 보는 자리라 부끄러워서 감사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 신앙 인격 교육의 첫걸음도 안 제대로 못 뗀 사람입니다.
  진짜 감사, 마땅히 드려야 할 더 많은 감사는 평생을 살아도 하나도 더 배우지 못할 사람입니다.
  음식물조차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 날마다 내려 주시는 각양 ‘범사에 좋은 것’들을 두고 어찌 다 감사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뭔가 한 건 크게 터지면 감사드리겠다.’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큰 감사 제목 주실 것을 기다리고만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그런 교인은 절대로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육신 생명을 영위시켜 주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귀중한 감사 제목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더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도 계산을 못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내려 주실,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당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먼저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감사를 드림으로써, 그 외에도 나의 가정과 학업과 생업의 일상생활을 통해 실로 자상하고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온갖 ‘범사의 복’들에 대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가 제일 처음 배우는 감사는 자기에게 무언가 좋은 것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에게 과자나 선물을 줄 때, 반드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받는 것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신자가 일용할 양식부터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런 단계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감사조차 할 줄 모른다면 그야말로 동물과 다름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아이가 자라 청소년이 되면서 생각하는 수준이 조금 더 높아지면, 무슨 특별한 것이 주어질 때뿐 아니라 자기가 매일 누리고 있는 생활환경 그 전체를 감사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방이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있는 집, 학문을 배울 수도 있고 자기 또래의 친구도 있는 학교, 이런 것들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신자들이 이 신앙생활의 환경, 즉 국가와 사회를 통해 누리게 되는 이 자유와 평화를 감사하게 되는 것이 그런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런 청소년이 인격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되면 이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자기가 호흡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기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두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신자의 최고 수준의 감사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 정도가 아니라 영육 간에 영원한 새 생명 주신 것을 두고 날마다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제목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은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감사 정도에서 그치고 말 것이며, 조금 나은 사람은 이 자유민주국가에서 평화시대에 살게 된 것까지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중생의 삶,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 은혜에 대하여 비단 감사절에뿐 아니라 매일 진정으로 감사드리며 살고 계십니까?
  진짜 기독신자라면 적어도 이 세 가지는 반드시 공감할 줄 알아야 할 가장 공통적이며 기본적인 감사 제목들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 감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불평과 원망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불평과 원망’이란 바로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 곧 모든 불신자들이 매일같이 나누고 있는 기본적인 공감대입니다.
  그런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은 자연히 항상 찌푸린 얼굴로 다니면서 짜증만 내는 것이 일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정반대로 늘 ‘감사’가 자신의 심령에 가득 차 있는 기독신자들은 매사에 절로 기쁨이 충만하고 생기가 넘쳐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저 ‘절기의 날짜’만 같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감사의 마음을 똑같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드렸던 세 가지 감사 제목들은 디모데에게도 그대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감사들은 초대교회의 모든 신실한 기독신자들에게 항상 넘쳐 있었고, 청교도들 역시 바로 그 감사 제목들을 가지고 첫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디모데의 감사, 신앙의 선조들이 드렸던 감사 - 바로 오늘의 기독신자 역시 똑같이 공감하면서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시한 모든 육신 생활의 복, 조국 대한민국 안에서 누리고 있는 신앙생활의 자유와 평화시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을 통해 베풀어 주신 중생의 은혜 - 이것들을 두고 하나님께 오늘 특별히 크게 감사드리며 남은 평생을 통하여 매일 함께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