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6-18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신명기 2장 1-37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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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6-18
2017′경향의 강단(27)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신명기 2장 1-37절 / 석기현 담임목사
6월 18일(주)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259)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신명기 2장 1-37절 / 석기현 담임목사
우리나라가 북한에 대하여 쌀이다, 기름이다, 달러다 하면서 무조건 ‘퍼부어 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어느 경제전문가가 ‘북한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식량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북한에도 어엿이 ‘경작지’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이 충분한 한, 지금의 ‘공산주의식 협동농장’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도입한 중국이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듯이 자기가 수확한 것은 개인소유를 삼을 수 있도록 보장해만 준다면 얼마든지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북한의 공산독재자가 그런 조언을 들을 리가 없고 그 결과 북한은 지금도 여전히 한편으로는 ‘미사일로 위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쌀 원조’를 기대하는 국제적 거지국가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복지’를 주실 때에도 그냥 손에 쥐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은 이제 출애굽 이후의 제2세대가 중심이 되어 드디어 ‘가나안 복지’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에서 “우리가... 여러 날 동안 세일산을 두루 다녔더니”라는 말씀이나 2절과 3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라는 말씀이 바로 가나안 남방의 광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방황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3절 하반절에서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앞서 1장 7절에서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라고 38년 전에 하셨던 말씀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그때는 가나안을 남쪽 접경지역에서 북쪽 본토로 진군해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동쪽으로 우회하여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나안을 향해 들어가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냥 ‘행진’해 나가기만 하면 절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름으로써 차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넘겨주시는 복지’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정복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의 신자들이 진정한 물질적 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재물을 빼앗으려 하지 않고 ‘정당한 금전관계를 지키는’ 신자를 항상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십니다.

  4절부터 7절까지에 기록하기를 “4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6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향으로 나아갈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민족이 바로 “에서의 자손”인 ‘에돔 족속’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선 “그들과 다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38년 전에 만났던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스라엘이 물리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 에돔 족속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그 남쪽의 산지에 거하는 민족이었던 까닭에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고 명백히 선을 그어 주시면서, 단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 즉 에돔 족속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던 길만 잠시 빌려서 사용하라고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주의사항까지 하달하셨는데 바로 6절에 나오는 대로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양식’은 두말할 것 없지만 ‘물’ 역시 사막 지대인 근동사회에서는 아주 귀중한 자산이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는 이 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지 물리적인 전투를 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에돔 족속으로부터 양식과 물을 구입할 때에 줄 것은 정확하게 계산해서 주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다’라는 단어는 ‘땅을 파다, 매매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어쩌면 여기서도 돈을 주고 에돔 사람들의 우물을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물을 파서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돈을 지불하고 얻으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8절 이하에서 “모압”에 대해서, 그리고 16절 이하에서 “암몬 족속”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에돔과 마찬가지로 먼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민족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9절)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19절)고 명백하게 지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특별지시를 내리신 이유는 우선 모압과 암몬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이 두 민족들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하기 위해서 일단 그 어떤 영토 분쟁이나 금전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그들의 땅을 탐낼 필요가 없고 그들과 물질적으로도 깨끗한 관계를 지켜야 할 이유를 7절에서 밝혀 주셨습니다.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고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8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민수기 32장 1절에서 그들의 가축의 수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고 한 대로, 40년의 광야생활 중에도 주변 민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산이 크게 증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이방 민족을 물질적으로 적당히 등쳐먹으려는 ‘도둑심보’를 보여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풍토는 ‘복지’(wellbeing)라는 ‘빛 좋은 개살구’가 완전히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 때에만 해도 들은 적도 없었던 이 단어가 지금은 우리나라의 여야를 막론한 모든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선거 필승 주문(magic word)’이며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금 나와라 뚝딱’ 하는 ‘복 방망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꿈같은 복지 정책들을 현실에 옮기는 데 필요한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 답은 딱 하나, 바로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받는 것’입니다.
  즉 ‘복지’를 ‘부자들의 재산을 나누어 먹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또한 그것이 ‘가난한 사람의 지극히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부자’들의 돈은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도 되는 것입니까?
  입장을 딱 한 번만 바꾸어서 생각해 보세요.
  만약 여러분이 작은 가게를 열고 밤잠을 설치면서 죽어라고 일하고 지혜롭게 장사를 해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남겼을 때, ‘당신은 부자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나누어 먹게 세금을 더 많이 내시오.’라고 누가 강요한다면, 그것도 자신은 ‘일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서’ 그저 ‘나눠 먹을 권리’만 주장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은행 빚을 내어서 어렵게 자금을 마련하고 파산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장사를 시도하고 경쟁 업체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경영의 수완을 발휘하고 게다가 여러 거래처와 고객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머리를 짜내면서 그 가게를 운영해 온 사람은 바로 사장인 여러분 자신인데, 정당한 임금을 약속대로 지급 받은 직원들이 ‘왜 당신 혼자 다 해 먹고 우리에게는 쥐꼬리만큼밖에 안 주시오?’라고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면서 파업을 한다면 과연 그 장사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몇 년 전인가 일본의 민주당 출신 수상이 ‘총선 때에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복지정책을 공약대로 실천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를 드린다.’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그래도 일본의 좌파 정치인들은 자기가 잘못 판단했음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아는 양심은 가지고 있구나 하고 크게 감탄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그저 초지일관 온갖 사탕발림의 복지 정책과 포퓰리즘을 동원하여 국회 의석수를 늘이고 대권을 쟁취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 역시 얼마나 못났기에 자기 자식의 점심 도시락 하나 부모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해 줄 수 없는지 그저 ‘공짜 밥 한 그릇’을 더 주겠다는 정치인에게 몰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려 하지는 않고 그저 평생토록 매일 ‘물고기 한 마리’씩 얻어먹겠다는 ‘거지 근성’이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 팽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부자한테서 세금 더 많이 거두면 되지.’라는 ‘도둑 심보’가 특히 이 나라의 청년들, 누구보다도 스스로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할 젊은 세대의 의식 구조 속에 아예 세뇌가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여러분도 좀 상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세요. ‘성장’ 없이 ‘복지’만으로 정말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면 세상에 그 어느 나라가 못 사는 나라로 남아 있겠습니까?
  반세기 전만 해도 ‘이밥에 고깃국’이 꿈처럼 보일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지금 이처럼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을 바라보게 될 정도로 급속도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 ‘복지’ 정책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성장’ 정책 때문이었습니까?
  아니 ‘완벽하게 평등한 복지’로써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겠다고 선동한 것이야말로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민심을 사로잡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이미 써 먹었던 방법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눈과 귀가 있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다 뻔히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에돔 족속에게서 ‘양식’과 ‘물’을 공짜로 먹을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들에게 정당한 ‘돈’을 지불하라고 명하신 말씀을 명심함으로써,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내가 잘 살겠다.’는 ‘도둑 심보’에 빠지지 말고 늘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는 은총에 만족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현실 앞에 낙심하며 원망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맞서 노력하는’ 신자에게 더 큰 복을 내려 주십니다.

  26절 이하 35절에 기록하기를 “26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으로부터 가나안을 향해 진군할 때 그 입구에 해당되는 땅이 곧 “헤스본”“바산”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지역의 이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지시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선 헤스본 사람들에 대해서는 24절에서 “너는 일어나 행진하여”라고 명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호하게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헤스본” 즉 원래 모압 땅이었지만 “아모리 사람 시혼”이 빼앗아서 차지하고 있던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24절)고 명하셨습니다.
  앞의 에돔, 모압, 암몬 족속들에 대해서는 ‘그들과 다투지 말고 그들의 땅을 정복하려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아모리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헤스본 땅을 두고서는 ‘싸워서 취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2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그들을 이길 수 있도록 이미 심리전까지 펼쳐 놓고 계셨습니다.

  방금 읽은 26절 이하의 내용은 그 헤스본을 차지하게 될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헤스본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통과하게 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라고 하셨는데, 헤스본 왕은 절대로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그런 요청을 받으면 헤스본 왕 시혼은 오히려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여” 싸우려 할 것인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땅을 네게(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실 것이니까 그저 맞서 싸우고 정복하고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취하여 이스라엘의 “소유”로 삼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3장 1절부터 3절에 보면 그와 똑같은 일이 한 번 더 벌어지게 됩니다.
  시혼을 무찌르고 헤스본을 차지했던 이스라엘은 곧 이어서 “바산 왕 옥” 역시 똑같은 과정과 방법을 거쳐서 무찌른 후에 그 땅마저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정복하게 된 땅이 바로 길르앗을 중심으로 한 요단강 동편 지역의 땅이었고, 나중에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분배받아서 거주하는 기업이 됩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향해 올 때에는, 이 가나안 동편의 땅은 원래의 정복 계획에 없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아니하고 대적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오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들어갈 진로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미처 가나안 본토 정복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쟁을 치르게 되었지만, 그 강적들을 인해 낙심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그 대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 똑같은 상황에서 보여 주었던 자세와 정반대가 아니겠습니까?
  40년 전 가나안의 남쪽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으로부터 ‘강력한 아말렉 민족’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올라가서 취하자.’라고 격려하는 말은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포에 사로잡히고 낙담하면서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본문 14절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기간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가나안 복지’를 자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받아먹으려 했던 자들은 그 땅에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했지만, 똑같은 난관을 오히려 정면돌파로 맞섰던 그들의 후손들은 오히려 처음에 예상치 못했던 땅까지 덤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그냥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축복의 땅’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신자들로 하여금 어떤 난관과 역경에 처하게 하신 후에 그것을 돌파하게 하심으로써 복을 받게 해 주시는 오묘한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물론 그런 시험이나 싸움들이 당장 겪기에는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통과하기만 하면 그 뒤에는 자동적으로 더 큰 복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명실공히 전 세계 제1위의 강대국이지만, 그 출발은 결코 ‘복지’를 그냥 차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에서 천주교의 박해를 당하고 있던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당시 콜럼버스에 의하여 막 발견되었던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과감한 모험을 단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메이플라워’ 호에 70명의 남녀 성인들과 32명의 유아들, 그리고 닭 몇 마리와 개 두 마리가 타게 되었는데, 180톤의 작은 배로서는 ‘정원초과’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66일 간의 힘든 항해 끝에 그들이 겨우 도착하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플리머스’는 들짐승과 원주민 인디언들만 가득할 뿐 결코 ‘약속의 복지’처럼 보이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무를 베어 교회부터 짓고 난 후에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면서 개척의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바로 그 겨울에 모진 한파가 닥쳤는데 아직 주거지가 미처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음 해 봄까지 총 44명이 사망했는데 생존자의 절반 이상이 어린이들이었고, 그 와중에도 자기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인디언들이 알게 되면 공격을 당할까봐 장례식도 밤중에 몰래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처럼 어려운 첫 해를 지나고 그 다음해 가을에 드디어 첫 추수를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실로 오늘날 미국이 누리고 있는 저 엄청난 복은 바로 그 청교도 선조들이 문자 그대로 ‘싸워서 취함’으로써 후손에게 물려준 유업인 것입니다.

  신자의 손에 축복의 땅을 붙여 주시려고 완벽하게 계획해 놓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바로 이런 의지와 노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 당장은 ‘헤스본과 바산의 왕’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더라도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그런 눈앞의 ‘화(禍)’가 결코 우리를 완전히 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하여 갑자기 일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실직이나 파산을 당하여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그것들이야말로 더 크고 더 많은 복을 쟁취할 수 있는 호기인 줄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에도 때로는 난관과 환난이 우리를 막아설 때가 있지만, 결코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대항하여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뒤에 예비해 놓으신 더 좋은 것,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던 더 풍성한 복까지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는 36절과 37절에서 모세가 그 모든 과정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아예 탐을 내지 않는 것이 제대로 복을 받기 위한 ‘기본자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모든 땅”은 그 어떤 난관이 앞길을 가로막더라도 싸워서 취하는 것이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필연의 ‘정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나라 사회는 남의 것을 공짜로 나누어 먹겠다는 심보만 점점 더 강해지고, 반면에 자기가 노력해서 남보다 더 잘 살겠다는 의지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노인들 중에도 사실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데 일부러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업’이 없어야 ‘공짜 혜택’이 더 많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더 많은 ‘복지정책’을 시행해서 자신으로 하여금 ‘놀고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줄 대통령과 국회의원만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공생애 당시 절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정치경제적 구세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 어떤 왕이나 대통령도 ‘모든 사람을 다 가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정치적 구세주’는 당연히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시작했다가 복지 위주로 흘러서 국가적 파탄과 부도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면서도 온 국민들과 공무원들은 자기에게 돌아오는 ‘밥그릇’이 작다고 데모와 파업을 일삼고 있는 그리스나, 소위 ‘사회주의의 천국’을 이미 성취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북한만 보아도 정말 ‘뻔할 뻔 자’가 아니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나 복지정책 위주의 정치를 해서 잘 살게 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처럼 너무나 명백한 사실인데도, 왜 이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주의가 답이다.’, ‘북이 우리의 미래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종북좌파의 선동이 날이 갈수록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것입니까?
  제 눈에는 이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가 이미 ‘망국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 가족의 예를 들더라도 일단 ‘빵’부터 더 크게 만들어 놓아야 개인에게 돌아올 ‘몫’도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생산을 더 많이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 앉아 놀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빵 덩어리가 더 커지기만을 기다다면 그 집안 식구 사이에는 자연히 싸움만 벌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국가 전체가 그렇게 될 때에 소위 ‘금수저와 흙수저’, ‘기득권자와 서민’ 사이의 골은 갈수록 더 깊어만 가고 바로 그런 악감정을 부추기는 정치꾼에게 휘둘리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틀림없이 들어맞을 ‘예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사회주의적 좌파 사상에 홀려서 자기도 모르게 ‘거지 근성’과 ‘도둑 심보’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세계 10위권 진입’은 고사하고 점점 더 중위권, 하위권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뭐 ‘예언’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서 역사를 배우고 눈을 똑바로 떠서 현실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족속의 양식과 물을 ‘공짜로 먹으려는’ 심보는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땅’은 그냥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경에 맞서 땀과 피를 흘리며 ‘싸워서 얻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복지’를 누리게 해 주시는 철칙인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수고의 결과로 얻게 되며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게 되는 복은 저절로 내 입에 들어오는 떡이 아니라 오직 남보다 더 많이 땀 흘리며 노력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말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신 ‘헤스본과 바산’의 땅을 반드시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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