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6-11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베드로후서 2장 12-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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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6-11
2017′경향의 강단(26) (2017년 6월 11일 / 주일 대예배)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베드로후서 2장 12-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6월 11일(주)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190)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베드로후서 2장 12-22절 / 석기현 담임목사

  ‘블랙홀’(black hole)은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화룡점정과 같은 존재인데, ‘초강력 중력으로 인해 입자나 전자기 복사를 비롯하여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을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이론적으로만 추측했던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관측까지 되고 있는 ‘실존의 공간’으로 모든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최근의 SF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 블랙홀과 관련된 개념 중에 ‘사상(事象)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것이 있는데, ‘관측이 가능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계’라는 뜻이며 쉽게 표현하자면 ‘블랙홀의 가장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블랙홀은 거의 무한대라고 할 만한 중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물체가 거기에 더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강력한 중력을 받게 되지만, 그보다 더 강한 추력을 낼 수 있는 로켓이 있다면 탈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가면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빛조차 바깥쪽으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물체도 결코 탈출할 수 없고 오로지 블랙홀의 중심부로 영원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도 그런 블랙홀처럼 사람을 영원한 어두움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 블랙홀의 중력은 바로 ‘죄의 유혹’이며 그 블랙홀의 중심은 곧 ‘영벌의 지옥’입니다.
  ‘죄의 유혹’은 이미 신자가 된 사람까지도 멸망의 구렁텅이로 끌어당기는 실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 만약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가 버리면 그대로 영원히 끝장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바로 초대교회 안에서 그런 무서운 미혹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베드로의 경고를 통하여 아무리 기독신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죄의 유혹’에 끌려가면 어떤 치명적인 ‘블랙홀’에 떨어지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육체의 정욕’에 끌려가면 짐승보다 못한 ‘저질 인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12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짐승과 같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짐승 중에는 산이나 들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있지만 애당초 도살될 목적으로 태어난 것도 있는데, 물론 이것은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대상임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바로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라는 말씀이 그처럼 ‘불의’를 행한 자에게 남아 있는 당연한 대가는 오직 ‘멸망’뿐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거짓 교사들은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했는데, ‘이성’의 유무는 사람과 짐승의 결정적인 차이점 중의 하나입니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만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발휘할 때 하나님의 도를 깨닫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실상 ‘짐승’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떨어진 자들은 자연히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게” 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란 그런 거짓 교사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영적 세계’를 가리킵니다.
  즉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주제에 분수 넘게도 기독신자의 바른 교리와 신실한 신앙생활에 대하여 온갖 비난만 퍼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 교사들의 진짜 ‘전공과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낮에도 놀’ 정도라면 밤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 향락의 세계’야말로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제일 잘하는 분야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란 그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교인들과 교제의 시간을 가질 때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람 사귀는 재미’만을 목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초대교회 시절의 거짓 교사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선두주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한술 더 떠서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음란한 마음을 품었다는 뜻으로서,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대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마음의 간음’입니다.
  그뿐 아니라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 즉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꼬시는 기술에 숙달된 상습범’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저주의 자식”의 대표적인 예가 곧 “브올의 아들 발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압의 우상 선지자로서 사술로써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가던 길이었는데,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했었습니다.
  즉 ‘짐승 수준’으로 떨어진 자이니 하나님께서 짐승을 통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이성을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연히 동물적인 본능과 말초신경적인 욕구만 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고 통제할 ‘이성적 사리 판단과 결정’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문자 그대로 ‘짐승 같은 사람’ 아니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육체적 욕망’을 오늘날의 인간사회는 조금도 죄악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미화시키면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간통법’은 아예 폐지되어 버렸고, 주거지역인 아파트에서 길 하나만 건너가면 온갖 음란한 ‘유흥업소’들이 즐비한 것입니다.
  그런 압도적인 사조가 교회 안까지 점령해 들어오면서 청년 교인들 중에서 ‘혼전관계’를 가진다거나 장년 교인들 중에서 ‘황혼이혼’을 하는 경우마저 흔히 발생합니다.
  이단들은 아예 ‘혼음’이나 ‘피 갈음’ 따위의 음란한 행위를 마치 거룩한 종교적 의식인양 가르치면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행위를 적당히 합리화시키더라도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오직 ‘미친 행동’이며 ‘짐승 같은 짓’일 뿐입니다.
  ‘이성’으로써 ‘육체의 정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가장 ‘저질적인 인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꼭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만 따라가면 ‘사탄의 종’으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17절부터 19절의 말씀에 “17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 사람들” 즉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물 없는 샘”이라고 했습니다.
  모양은 ‘샘’인데 그 속에 ‘물’이 없는 것이 있듯이 겉보기에는 기독신자이지만 그 심령 속에 영생구원의 확신이 없는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또한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런 형식적 교인은 비록 세상에서는 신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교회 안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지옥을 향해 ‘밀려갈’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문맥의 연결인 것입니다.

  18절은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빠졌지만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면서 그 ‘거짓 교사’들이 영벌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 즉 자기 자랑에 불과한 거짓말로써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 즉 초신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앞 문단의 14절에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했다는 말이 그와 똑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 교사’들이 그래도 명색이 신자가 되었다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그런 ‘육체의 정욕’에 빠지도록 유혹했습니까?
  바로 “자유를 준다”는 명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곧 ‘자유’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요한복음 8장 36절에 나오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 따위를 그럴듯하게 인용했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곡해’요 ‘억지 해석’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자기네의 가르침을 따르면 사람의 정욕을 마음대로 발산하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서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마음껏 육체의 낙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고 정확하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민족을 정벌하고 나면 그 사로잡은 포로들을 다 노예로 만들었던 사실을 비유로 사용한 경고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짓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람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탄에게 지는 것이니, 그 결과는 승자인 사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그 어떤 속박도 받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실상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악의 속박 상태로 떨어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두고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전화를 하거나 심방을 와서 이런 저런 권면을 하면 마치 개인의 권리를 침해당한 것처럼 기분 나빠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같은 교회에 다닐 때에는 멀쩡한 기독학생처럼 보이다가 유학을 가서 혼자 살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를 아예 등지고 사는 자녀들도 흔히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자기의 시간이나 힘이나 돈을 마음대로 못쓰게 만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거나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지 못하게 하고, 아예 근본적으로 자기의 생각이나 양심까지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속박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게 되면 자신의 사고와 생활이 실제적으로 묶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사로잡히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끌려가게 되고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규제되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탄이 꾀는 죄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 매이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 나은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 - 참 멋있게 들리는 말입니다.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산다.’ - 일견 인생의 최고 가치와 심지어 신앙생활의 본질까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와를 꾀었던 ‘옛 뱀’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준다.’는 소리에 미혹 당하면 곧바로 ‘사탄의 종’으로 영원히 꽁꽁 묶이게 된다는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사슬에 묶여서 바로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이단’에 빠져 배교자가 되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20절 이하 22절에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처럼 초대교회 신자들을 유혹하여 ‘저질 인생’으로, ‘사탄의 종’으로 전락시키고 있던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1절에서 “거짓 선지자”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이는” 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단언할 수 있었던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의 생명을 당신의 보혈로 대신 갚아 주신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지 않는 자들이었으므로,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명백한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 20절에서 “그들”이란 바로 그런 이단에게 넘어가서 참된 신앙을 저버린 ‘도중하차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대로, ‘배교’란 ‘불신’과는 달리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의 길에 한 번은 들어서고 난 후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을 하고 세례도 받고 혹은 직분까지 받아 섬기는 것은 실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즉 이 악한 장망성과 성별된 새 삶을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시작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인들 중에 “다시 얽매이고 지는” 사람, 즉 ‘이단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그 미혹에 지는’ 사람이 안타깝게도 지상교회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배교자’는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짜배기 불신자’는 아직 전도 받을 기회가 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게 될 수 있는 가망성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처럼 신앙생활을 한 번 시작해 보았고 또 어느 정도 지속해 왔던 사람이 배교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불택자’일 가망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21절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바른 신앙 진리를 배운 후에 그것을 저버린 사람은 다시 돌아오게 될 가망성이 거의 없지만,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불신자에게는 오히려 구원의 가망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배교’는 ‘불신’보다 더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이며, 마지막 22절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비유했습니다.
  여기에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내용은 잠언 26장 11절에도 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이 말을 두고 ‘참된 속담’ 즉 어떤 경우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개가 그 토했던 것을 도로 먹는 것’이나 ‘돼지가 목욕한 후에 진창에 다시 뒹구는 것’이나 둘 다 ‘더럽고 나쁘고 악한 것으로부터 떠났다가 다시 그 더럽고 나쁘고 악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단은 이처럼 사람에게 가장 나쁜 일을 저지릅니다.
  이단은 불신자를 전도해서 이단으로 만들기보다는, 항상 이미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성교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합니다.
  즉 바른 진리를 배우고 착실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을 미혹해서 ‘자기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들고 그 대신에 온갖 다른 감언이설로 꾀어서 결과적으로는 ‘자기보다 더한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불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우상종교’보다 겉으로는 같은 기독교인 것처럼 보이는 ‘유사 기독교’를 훨씬 더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단은 그야말로 ‘하늘로부터 온 천사’처럼 거룩한 체 하지만 실상은 ‘짐승의 사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이며, 순결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의 본성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 이단의 정체를 똑바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입에서 ‘용의 말’(계 13:11)이 나오면 두말할 필요 없는 이단입니다.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는’ 말, 즉 십자가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그 대신 재산을 다 팔아서 교주에게 바치라느니 혹은 본인이 스스로 선행의 공로를 쌓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100퍼센트 이단인 것입니다.
  이런 이단에 ‘얽매이고 져 버린’ 배교자는 결국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과 유황 못’에 함께 던져질 날만 남게 된다는 경고를 가슴 깊이 새기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소리에 결코 속지 말고 끝까지 참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터스텔라’라는 공상과학영화에 보면 주인공과 그의 동료인 여주인공이 실제로 블랙홀의 중력권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주인공은 자기 동료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3단으로 나누어진 우주선 중 제일 마지막 칸에 그 여주인공을 태우고 자신은 두 번째 단계의 우주선에 탑니다.
  그렇게 해서 각 우주선에 있는 로켓들을 차례로 점화시켜서 최고의 가속도를 낸 후에 동료가 탄 우주선만이라도 블랙홀의 중력을 꼭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우주선을 분리해 버립니다.
  그 결과 여주인공이 탄 우주선은 가벼워진 하중과 3단 로켓의 추력 덕분에 ‘사상의 지평선’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탈출에 성공하고, 주인공 자신은 분리된 우주선과 함께 블랙홀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처럼 비록 블랙홀로 끌려가고 있더라도 ‘사상의 지평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아직 탈출의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죄악의 유혹’에 일시적으로 빠졌더라도 아직 완전한 멸망에 떨어진 것은 아니니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 사상의 지평선’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끝까지 거부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만 지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때때로 ‘자범죄’를 여전히 저지르게 되지만,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회개에 꼭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즉 ‘다시는 그 토하였던 것, 그 더러운 곳에 돌아가지 않는’ 결단과 행동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블랙홀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가벼운 하중’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역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는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대로 ‘눈알 하나를 뽑고 손 한 쪽을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죄의 하중’부터 먼저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상의 지평선’ 안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려면 ‘강력한 로켓의 추력’이 필요한 것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라고 강력하고도 뜨겁게 독려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절대로 같은 죄를 또 짓지 않기로 굳게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안전지대’에 들어와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할 수만 있다면 택자들까지도 미혹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향교회가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분명히 믿음직한 산성이요 든든한 요새이기는 하지만, ‘밤에 몰래 가라지를 뿌려 놓고 가는 마귀’가 뚫고 들어올 구멍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결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 안에서나 현대교회 안에서나 그처럼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스스로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가 그런 ‘죄의 유혹’에 하나씩 둘씩 끌려가다 보면 끝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 ‘깜깜한 지옥의 블랙홀에 온 몸이 던져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훨씬 더 심해지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온갖 ‘죄의 유혹’에 이끌려서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저질 인생’으로 전락되어 ‘사탄의 종노릇’이나 하다가 끝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뿐임을 명심하면서, ‘육체의 정욕’을 ‘이성적 판단’으로 억제하고 ‘내 마음대로’라는 생각 대신에 ‘은혜의 사슬’에 묶이고 ‘이단의 사설’이 미혹해 올 때마다 ‘오직 예수 구원의 진리’로 물리침으로써 ‘저 빛나는 천국’에까지 반드시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