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6-04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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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25) (2017년 6월 4일 / 주일 대예배)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6월 4일(주)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285)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장 1-10절 / 석기현 담임목사
앤드류 왕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차남으로서 왕위 계승 서열 6위에 있었는데,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할 무렵 왕립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항공모함 인비시블호의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당시 수상이었던 대처는 앤드류 왕자를 후방의 행정 보직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반대하는 바람에 그대로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그 결과 앤드류 왕자는 대지(對地) 공격, 구조, 미사일 교란 작전 등 실제로 위험한 임무들을 수행했으며, 영국 해군의 애틀란틱 컨베이어호가 아르헨티나 전투기의 미사일에 맞아 격침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전쟁 중에 영국 왕실 대변인이 “여왕께서도 다른 영국의 어머니들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아들의 신변을 걱정하고 계신다.”라고 발표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 말이 결코 과장이나 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해리 왕자도 영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공격용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했는데, 최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전에 참여했으며, 탈레반의 공개적인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근무 일정을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의 경우들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영국 왕실의 남자는 대부분이 다 군인 출신인데, 영국은 직업군인제인 까닭에 주로 10년 이상 20년까지 복무하고 있습니다.
  사실 장차 국가와 국민을 다스릴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왕위 계승자라면, 그런 군복무 경험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준비과정이며 게다가 실전 참여까지 하는 것은 왕자로서의 품격을 더욱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기독신자도 그와 같은 ‘특별한 신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 9절과 10절에서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선언해 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 것이 곧 우리가 누리게 된 고귀하고도 특권적인 신분입니다.
  하지만 이 신분에도 역시 그것을 지키기 위한 요건들이 따르게 됩니다.
  이 시간 저는 주어진 본문을 통해 우리 기독신자들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 앞에서 과연 어떻게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온갖 죄악을 벗어버리는 ‘성화생활’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곧 참된 신자에게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성화 과정’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믿고 중생 받게 된 신자라면 그 이후에 거룩한 성도로서의 성장 과정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단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는 말씀이 바로 ‘거듭난 신자’라면 당연히 훌훌 벗어던져 버려야 마땅한 ‘옛 사람의 죽은 껍질’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대표적인 악행들은 모두 다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것들로서, 이것들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앞서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한 참된 중생 신자라면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신행일치의 삶부터 반드시 나타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룩한 양심을 지키고 순결한 생활을 사는 ‘새 사람’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그 형성 과정에 ‘새로운 영적 세포’가 자라기 위해서는 양분 공급이 필수적입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2절에서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바로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아니한, 가장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전에는 육적으로만 성장해 왔다가 이제 중생 받은 성도를 더욱 영적으로 키울 수 있는 실로 ‘신령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의 젖을 먹어야만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생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는 마지막 구원의 완성 즉 ‘영화’에 이를 때까지 그 중간에 반드시 ‘성화’라는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자라게 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장은 오직 성경 말씀이라는 젖을 꾸준히 그리고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빠르고 건강하게 진행되기 마련인데, 그래서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런 성장 과정을 더욱 강조하면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사람이 중생 받는 순간 그 영혼이 생전 처음으로 가장 맛있게 맛보게 되는 체험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 사랑의 맛 - 바로 이 놀라운 인자(仁慈)는 오직 새로 태어난 중생신자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맛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한 번 이 맛을 제대로, 진짜로 본 신자는 절대로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 맛을 사모하게 됩니다.
  즉 그 예수님의 사랑의 맛을 계속 볼 수 있는 음식을 찾게 되는데, 그 특별한 양식이 곧 성경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맛보여 줄 수 있는 양식은 성경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중생을 받은 신자는 반드시 갓난아이들이 젖을 사모하듯이 이 신령하고 순전한 생명의 젖인 성경 말씀을 계속 빨아먹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들이 젖을 얼마나 사모하는지는 사족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갓난아기는 젖 외에는 다른 음식의 맛도 모르고 먹을 줄도 모릅니다.
  오직 엄마의 젖만이 아기의 성장에 가장 좋은 양분인 것을 아기의 몸이 자연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아기의 입은 본능적으로 그 젖만을 찾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중생인이라면 초신자 때부터 그 영혼이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실히 갈구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현상인 것입니다.

  요즘 ‘분유를 먹이면 아기의 머리가 더 좋아진다.’는 따위의 광고도 흔히 보게 되지만,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엄마 젖’과 ‘소 젖’ 둘 중에 어느 쪽이 아기에게 더 좋을지는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모유 수유를 한 아기가 분유만 먹은 아기에 비해 인지력에서 7퍼센트나 더 우수하다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더구나 젖은 비단 영양분 공급뿐 아니라 병을 예방해 주기까지 합니다.
  모유에는 ‘면역’ 성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난 직후부터 분유만 먹고 자란 아기는 일정한 기간 동안 모유를 먹은 아기보다 아토피를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병이 발생하는 확률이 두 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의 순전한 젖’을 먹으면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화되어 가는 신자는 절로 온갖 악행의 죄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연예인이 자기에게 주차 위반을 했다고 지적하는 경찰관에게 상스러운 욕을 해서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어쩌면 아무도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인데, 본인의 입으로 마치 자기가 잘했다는 듯이 대중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온 국민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저 마땅히 해야 할 공무를 집행하다가 졸지에 욕을 먹게 된 경찰관은 “공인이 그런 욕을 하면 됩니까?”라고 점잖게 훈계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 역시 그 연예인이 스스로 고스란히 전해 주는 바람에 알려진 사실인데, 물론 본인은 자신이 ‘공인으로서 공무원에게 욕을 한’ 행위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성도 역시 대인관계에서 그런 저질스러운 언행을 보이면 그야말로 기독신자로서의 품격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 - 이런 것들은 중생 받았다는 성도에게는 정말이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 그야말로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명색이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자들도 대중 앞에서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고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말 한마디 한마디 극히 조심하고 일거수일투족까지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유분방하게 살던 평민 출신의 다이애너가 찰스 황태자와 결혼한 후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던 것 역시 그런 ‘왕족의 엄격한 예절 교육’이 아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죄인’ 출신에 불과했던 저와 여러분이 이처럼 과분하기 짝이 없게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택을 받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신분이 격상되었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품위 유지’를 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9절 하반절) 해 주신 이 엄청난 ‘신분 상승’의 은혜를 입었으니만큼 이제부터는 정말 ‘빛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 삶이 나타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그처럼 격조 높고 고귀한 새 생활을 가르쳐 주는 ‘영적 예절 교본’이 곧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맛보았던 그 주님의 인자하심을 기록된 성경 말씀의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통하여 매일 맛보고 먹음으로써, 온갖 ‘죄악의 언행’들을 억제하며 ‘성화의 진보’를 보이는 가운데 진정 ‘거룩한 백성’다운 영적 품위를 온 세상 앞에 아름답게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성경이 증거해 주는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구원 신앙’을 통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지켜야 합니다.

  4절 이하 8절에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제국 산하의 불신정권과 불신사회로부터 본격적인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제 모든 신자에게 변함없이 최고의 격려가 되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했는데,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구세주’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는” 수욕과 핍박을 당하셨지만 결국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 되셨습니다.
  즉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님 덕분에 우리 기독신자들은 “산 돌같이 신령한 집” 즉 ‘교회’로 함께 “세워지고” 또한 그 교회를 중심으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제사장”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따르는 신자는 그 어떤 핍박 중에도 결코 수치를 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어쨌든 초대교회 성도들은 현실적으로 로마 정부의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고, 많은 성도들이 재판을 받고 투옥을 당하고 더러는 순교까지 당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을 받게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므로 사실상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런 처지를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핍박은 무슨 사회적인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되 정말 확실하게, 진실하게, 굳세게 믿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결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보배로운 모퉁잇돌” 곧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구세주’로 믿는 동시에 교회를 든든히 세워 주시는 ‘머리’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보배와 같이 귀중한’ 분이시지만 불신자에게는 전혀 딴판의 대상입니다.
  본문 7절은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까지가 하나의 절이 되고, 그 다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부터 시작해서 8절 상반절의 “되었다 하였느니라”까지가 계속 이어지는 하나의 인용문장입니다.
  즉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란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 그러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며 동시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우리 신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와 완전 반대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보배’처럼 여기지만 불신자들은 그 똑같은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 즉 아무 가치나 중요성이 없는 존재로 여깁니다.
  또한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 어떤 핍박 중에도 결코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고 자랑해야 할 구세주로 모시지만, 불신자들은 오히려 자기 인생에 ‘부딪히고 거치적거리는 방해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극단적인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8절 하반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곧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본질적인 이유로서 바로 하나님의 ‘선택적 예정’ 때문입니다.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는 말씀대로 원래 하나님께서 ‘유기’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그 결과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택자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인생의 방해물로 여기게 되는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신자는 오직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는 똑같은 그 성경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은 바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명하는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고부동하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보배’처럼 귀중히 여기며 전 인생을 다 바쳐서 섬기게 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그 확실한 증거인 성경 말씀을 불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예수님을 ‘거치는 바위’처럼 귀찮게 여기고 반대하고 핍박까지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느냐 못 믿느냐로 극단적인 갈림이 생기게 되며, 그와 마찬가지로 그 ‘구원의 확신’을 끝까지 지켜내느냐 아니면 신앙생활에서 ‘도중하차’ 하고 마느냐 하는 문제도 바로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과 자격을 지키려면 더욱 성경 말씀에 마음을 모으고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내 인생에 최고의 복이구나!’라고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기쁨을 반드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10절 상반절)이 된 이유는 곧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10절 하반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나 같은 죄인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신 덕분에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음으로써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직 성경만이 증거해 주는 사실이며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어김없이 뜨겁게 되새겨지는 최고의 은혜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왕위 계승자’는 ‘세습’되기 마련입니다.
  다른 모든 종류의 사회적 지위는 본인이 노력하기만 하면 다 얻을 수 있지만, 왕자나 공주의 신분이란 오로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며 평민은 아무리 원해도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없고 그저 ‘동화 속에서나 꿈 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출생 때부터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복이요 기쁨이요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도 그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 신분을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원죄의 피를 받아 태어났고 게다가 자범죄마저 날마다 가중되고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라는 신분을 얻게 된다는 것은 실로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으로 초고속 상승을 한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것, 이것 하나만 가지고 저와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수직 격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동화와 같은’ 일이 실제로 저와 여러분에게 벌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예수 구원 신앙’만 똑바로 지키고 있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자들은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수치를 당하기도 하지만, ‘구원의 확신’을 굳게 붙잡고 있는 신자는 ‘한 번 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영원히 거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사회가 핍박하고 온갖 마귀의 시험이 더욱 기승을 부릴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성경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의 금세와 내세의 ‘최고 보배’로 끝까지 믿고 따름으로써, 바로 그 ‘구원 신앙’ 안에서 이 소중한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평생토록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9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주신 데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전도’입니다.
  ‘우리를 어두운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이처럼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빛 가운데 살게 해 주신 이’ 즉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이 ‘아름다운 덕’을 온 세상과 만민 앞에 자랑하고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처럼 은혜로운 신분을 거저 누리게 해 주신 목적인 것입니다.

  이 목적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 바로 ‘성화 생활’과 ‘구원 신앙’으로써 자신을 중생 신자다운 신자로 더 잘 가꾸어 가야만 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기독신자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그 언행이 여전히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누가 그런 사람의 전도를 받고 자기도 신자가 되고 싶겠습니까?
  그야말로 ‘너나 잘하세요.’라는 핀잔이나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최고의 보배’로 간직하고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이 진심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전도는커녕 오히려 세상 앞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실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시게 되는’ 형식적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 뻔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사회적으로 고귀한 신분에 속한 사람은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멀리 로마제국까지 올라가는데, 당시 로마 귀족들은 자기네가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한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에 대하여 특별한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정신을 그대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예로, 집정관은 로마공화정의 공직자 중 최고 관직이었는데 병역의 의무를 수행한 사람만 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가 카르타고와 16년 동안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무려 13명의 집정관이 전사했을 정도였습니다.
  근대의 사례로는 영국의 최고 명문 사학인 이튼칼리지가 있는데, 귀족의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이 학교 출신 중 제1차 세계대전에 5,619명이 참전해서 1,157명이 전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4,690명이 참전하여 748명이 전사했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예를 들었던 영국 왕자들의 군복무도 바로 이런 정신과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귀한 ‘영적 귀족’답게 살고자 한다면 역시 그에 따른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속한 ‘왕 같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이 곧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전도’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온전히 완수하기 위해서 본인부터 몸으로는 ‘거룩한 생활’을 나타내면서 마음으로는 ‘예수 구원 신앙’을 간직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진정 중생 받은 신자답게 평소에 늘 ‘죄악을 멀리하는’ 성화의 진보를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며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신앙으로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지킴으로써, 실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속한 양자’로서의 영광을 나타내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