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밤예배 2017-05-28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미가 6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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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밤예배실황 2017-05-28 학교법인 경향학원 헌신예배
학교법인 경향학원 헌신예배(주일 밤 예배)
설교: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미가 6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찬양:경향학원 교직원 찬양대
※ 찬양 연습 – 오후 4:00, 제1세미나실(지하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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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미가 6장 8절] 석기현 담임목사
‘성선설’과 ‘성악설’은 맹자와 순자 이래 특히 교육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논할 때 여전히 피차 대립하고 있는 양대 학설입니다.
  전자는 인간이 본래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발적인 선행을 행하거나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후자는 그와 정반대로 사람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날 때부터 자기의 개인적 이익만을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근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소위 ‘자유방임교육’은 ‘성선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라는 아이는 그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가만히 두면 절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악설’의 지지자들은 그렇게 아이를 방임해 두면 결코 스스로 바른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하지 않기 마련이므로 주입식 교육을 통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성경적으로 이 문제를 판단한다면, 당연히 ‘성악설’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날 때부터 ‘원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는 날이 늘어 가면 갈수록 ‘자범죄’도 점점 더 많이 짓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아이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동시에 ‘바르게 사는’ 생활도 익힐 수 없는 것입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학생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 않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다들 놀기만 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사람은 특히 어릴 때부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이 바른 길인지를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배워야만 그 ‘악한 본성’을 억제시키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본성적으로 악한 사람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쳐야 할 ‘선’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본성적으로 악하다면 부모나 스승도 역시 본질적으로 ‘악한 죄인’이니 그들에게서 어떤 ‘참된 선’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사람이 꼭 지켜야 할 ‘선’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네게 보이셨지 않느냐?”라고 미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워 주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추구하고 판단해서 찾은 선이 아니라, 원래가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선’만이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되기 위해 꼭 배우고 익혀야 할 ‘참된 선’인 것입니다.
  오늘밤 경향학원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선한 것’, 즉 우리 경복여고와 경복비즈니스고를 통해 ‘학원 복음화 운동’을 함께 수행해 가고자 하는 양교의 교사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할 ‘선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향학원의 교사들은 우선 ‘법적인 선’ 곧 ‘정의를 행하는 선’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에 “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그 첫째를 두고 “오직 정의를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정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서 이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법적인 선’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며 ‘옳은 것을 실천하고 그른 것을 반대할 줄 아는 선’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그런 정의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미가 7장 3절 하반절에 보면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지도자”란 바로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처럼 이스라엘의 공직자들과 재판관들은 다 뇌물을 받아서 축재하고 있었으며, “권세자” 즉 최고 권력자들은 “서로 결합하여” 즉 저희들끼리 짜고 공모하면서 “자기 마음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들부터 다 부정부패만을 일삼으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정의, 즉 ‘법적인 선’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길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각 사람이 ‘정의를 행하는’ 것부터 실천할 줄 알아야만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있듯이, 정의라는 것은 우선 나라의 정치지도자들부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국가에서는 그런 정치지도자들을 국민들이 투표로 뽑고 있으니까, 결국은 그 나라 국민의식이 곧 정치가들의 질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선 국민부터가 이런 정의를 분별하고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신자들은 바로 이런 사회적인 선, 법적인 선을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선도할 줄 알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이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부조리하고 불법한 일, 공의와 정도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최고의 사회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20년 전에 사라진 군사독재가 아니라 바로 현재 이 나라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는 온갖 불법적 행위입니다.
  데모를 하면서 자기네가 먼저 ‘노란색 저지선’을 돌파해 놓고도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리고는 복면을 쓰고 쇠파이프를 든, 그야말로 무장강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경찰관을 두들겨 패서 150명이나 부상을 당하게 만들어 놓고도, 오히려 경찰청장에게 찾아가서 항의를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주객전도’의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불법행위가 벌어져도 도대체 왜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국 중에서는 그 ‘폭력시위’의 장면을 단 일초라도, 단 한 컷이라도 방영한 방송국이 하나도 없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어떤 의경 출신의 용감한 시민이 휴대폰 동영상으로 그 장면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바람에 그나마 그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처럼 ‘복면강도’처럼 무장을 하고서 공직 업무를 수행 중인 경찰관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말도 안 될 행위를 두고 오히려 ‘정의로운 국민 자유권의 발동’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복면 데모를 금지시키면 ‘복면가왕’ 연예프로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며 낄낄 대고 희롱하는 자들은 수두룩한데, 어떻게 그런 주장의 명백한 부당함과 모순과 불법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이 나라의 하고많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니 오늘날 우리나라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의로운 일이다.’라는 잘못된 사고방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나라의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이라는 고함소리 앞에 ‘준법정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모르게 되고, ‘민중운동’이라는 선동의 외침에 눌려 ‘국가질서’를 전혀 존중할 줄 모르게 된다면, 과연 우리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법치국가’로 존속할 수 있을지 아니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무법천지로 변할지 여러분은 조금도 걱정조차 되지 않습니까?
  부디 경향학원의 교사들만이라도 이처럼 ‘불법’을 ‘정의’라고 선동하는 이 나라의 종북좌파 ‘방백’들에게 용감히 맞서서,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법적인 선’, ‘진짜 의롭고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똑바로 가르치는 스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향학원의 교사들은 또한 ‘도덕적인 선’ 곧 ‘인자를 사랑하는 선’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8절에 계속해서 보면 “인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여호와께서 보여 주시는 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한자를 괄호로 넣은 성경들 중에는 이 ‘인자’란 단어를 ‘인애와 자비’의 준말이 아니고 ‘사람 인’ 자에 ‘아들 자’ 자로 잘못 표기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이 ‘인자’라는 단어는 ‘사랑, 인애, 자비’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이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이 'love mercy' 즉 ‘인애와 자비를 베푸는 것을 사랑하며’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말 성경에서도 이 ‘인자’라는 단어를 ‘사람 인’ 자와 ‘아들 자’ 자를 쓰는 것보다도 ‘어질 인’과 ‘사랑할 자’ 자를 쓴 ‘인자’(仁慈)로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까운 직역이 됩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하든지 그 의미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인애와 자비’라는 성품은 다른 ‘사람’을 향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런 ‘인자(仁慈) 즉 인애와 자비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사람(人子)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이 점에 있어서도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남을 등쳐먹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미가 2장 8절에 보면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원수같이 일어나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원수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곧 이어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라고 설명해 주듯이, 그처럼 같은 이스라엘 동족들 중에 전쟁을 피하여 도망가는 난민들이 자기 마을을 지나가게 될 때 무슨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겉옷을 탈취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무자비하고 냉혈하기 짝이 없는 사회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고,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그처럼 불쌍한 동족에게도 전혀 인애와 자비를 발휘할 줄 모르면서 도대체 무슨 낯으로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과 그 하나님께서 신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베풀도록 명하시는 사랑은 똑같습니다.
  바로 ‘헤세드’의 사랑, 즉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는 사랑입니다.
  나와 직접적인 혈연이나 지인이나 이해관계로 맺어지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마땅히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줄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인자 사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불쌍한 자기 동족 피난민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의 겉옷까지 빼앗는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지만, 오늘날 그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에는 없겠습니까?

  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특히 기독신자로서 저 북한동포에 대하여 인자를 발휘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런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진짜 동족이며 동시에 저 공산독재자의 압제로 인하여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북한 인민들 중에 다수가 그 폭정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서 중국 국경을 넘는 ‘국제적 피난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탈북자들을 돕기는 고사하고 명색이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탈북자들은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다.’라고 오히려 ‘북한을 자기 조국’처럼 말하면서 그들을 비난하는가 하면, ‘통일이 되면 우리가 저 많은 거지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라고 걱정하면서 ‘그래서 통일이 되면 안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청년들이 바로 이 대한민국 안에 어처구니없게도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어쩌면 같은 한민족이면서 이렇게도 이기적일 수가 있습니까?
  자기 애인 사랑하는 것, 자기 가족 사랑하는 것, 이것은 그저 기본적인 인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신자의 사랑은 아무 직접적인 관계나 조건이 없어도 그저 고통 받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수해나 지진을 당해도, 심지어 우리나라를 수탈했던 일본이 쓰나미 재해를 당할 때에도 성금을 모아서 보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랑이란 하물며 압제 받는 자에게는, 그것도 그들이 바로 나와 피를 나눈 동포일 때에는 정말이지 당연히 발휘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재벌의 돈을 빼앗아서라도 가난한 서민에게 복지혜택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 인민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그런 인자를 발휘할 줄 모릅니까?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동성애조차 인권이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인권조례’인지 뭔지를 만들고 있는 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상 최악의 ‘인권 말살’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유구무언입니까?
  자기 자녀들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면서도 교실에서는 미국 백인 경찰이 용의자 체포 과정에서 흑인을 구타하는 장면을 학생들에게 동영상으로 보여 주면서 ‘미국은 나쁜 나라’라고 입에 거품을 무는 좌편향 교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정치수용소에서 한 끼에 옥수수 29알을 받아먹으면서 굶어죽어 가고 있는 우리 동포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몰인정하게 모른척하고 있는 것입니까?

  언젠가 남북이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되든지 아니면 혹시라도 적화통일 되든지 간에 하여튼 그날이 오면, 그간 공산독재 치하에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북한 동포들의 현실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10대 초반의 소녀들이 겪는 초경을 20살이 넘어야 경험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창 아주머니 전성시대를 누리며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을, 같은 50대 여인들 대부분이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참상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비만’이라는 단어조차 없을 만큼 다들 피골이 상접해 있고 ‘이게 정말 사람 사는 꼴인가?’하고 눈 뜨고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몰골들을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100퍼센트 자신 있게 장담합니다.
  그때가 오면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라고 남아 있는 교사라면, 오로지 ‘수구꼴통’이라는 욕을 들을까봐, ‘유신정권의 잔재’로 몰릴까봐 무서워서 학생들에게 북한의 실상에 대해 똑바로 가르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가 정말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지금 제 말을 들으면서 ‘100퍼센트 자신 있게라고? 정말 웃기고 있네.’ 하고 속으로 코웃음치고 있는 교사가 이 자리에 혹시라도 있다면,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교사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조건을 달지 않았습니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는 교사라면’이라고요.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덕적인 선’을 따르고 가르치려는 스승답게, 저 독재자 김정은을 사랑하지 말고 그에게 고통당하고 있는 2천만 명이나 되는 우리의 북한 동포를 향해 ‘인애와 자비’를 꼭 발휘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줄 아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경향학원의 교사들은 ‘영적인 선’ 곧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선’을 학생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고 일깨워 주시면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주시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8절 끝에 가서는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최고로 강조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씀만 두고 보면 마치 ‘사회 정의 구현’과 ‘인류 박애주의’가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요점이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자유주의 목사들의 설교는 바로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 번째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점들,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 버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제물만 가지고 습관적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지 진정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자세는 전무했었으며, 바로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을 그처럼 철저하게 망하게 만들고 있던 핵심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라는 말을 들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겸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겸손이라고 하면 곧 ‘사람의 온유하고 착한 성품’만을 생각합니다.
  즉 교양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그 자신 속에서 발휘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사람에게서만 나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나누어지는 겸손이며 불신자들도 할 줄 아는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은 오늘 본문에서 명백히 강조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또한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믿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줄이자면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스스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양의 미덕을 발휘해서 생기는 겸손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보니 그 하나님이 너무나도 높고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시니까, 나라는 죄인을 예수님 앞에 비교해 보니 그 성자 하나님은 참으로 ‘죄와 조금도 상관없으신’ 실로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니까, 그것을 깨닫게 되면 제아무리 이전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던 인생이라도 절로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바짝 엎드리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 바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라고 다 같은 기독교가 아닌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먼저 기복주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실존은 믿지만 그 하나님을 무조건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할 ‘절대주권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순전히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하나님’,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필요할 것을 원할 때마다 갖다 주는 심부름꾼 쯤 되는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편리하게 ‘부려 먹으려’ 하면서 신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자연히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며 부복하는’ ‘경외의 신앙’이란 그들의 신앙생활에서는 아예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복주의 기독교도 자유주의 기독교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약과에 불과합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아예 하나님의 실존 자체부터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순전히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요 ‘추상적으로 설정해 놓은 초월자’입니다.
  그러니 그런 ‘공허한 신’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신’을 두려워할 리도 없고 그 앞에서 ‘겸손히’ 행할 이유가 전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살한 전 대통령을 두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에 비기며 미화시키고 찬양한다든지,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기독교연맹’인지 뭔지 하는 독재자의 어용종교단체와 교류를 한답시고 뻔질나게 북한을 드나들고 있는 종북좌파 목사들이 바로 그런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들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신앙’이 아예 없는 가짜 목사들이니 무슨 ‘화해의 신학’이니 어쩌니 하는 것을 내세워 ‘겸손히 공산독재자와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만이 이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실천합니다.
  즉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행일치의 생활’을 하는 ‘신전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만 더 말하자면, 진짜 겸손은 오직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내 인생과 내 가정과 우리 교회와 조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장하시는 유일무이한 절대주권자로 철저히 받들어 모실 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좋은 매너만 지키는 겸손이나 자기 수양을 통해 쌓은 덕이 훌륭해서 남들 앞에 점잖게 보이는 겸손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신앙의 삶’,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절로 자신을 낮추고 또한 철저히 의지하는 이 ‘영적 선’을 본인 스스로 체험하면서 또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향학원의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경향학원의 교사들과 교직원, 그리고 성도 여러분,

제가 얼마 전에 경향학원 이사회를 하는 도중에 어느 교장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폐지되고 말았지만,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국사 국정교과서’를 우리 경복여고와 비즈고에서 사용할 수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학생의 70퍼센트가 ‘6.25 전쟁’을 ‘북침’으로 알고 있고, 대학교 졸업할 때 즈음이면 절대다수가 아예 ‘미국을 주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 나라의 지극히 일방적인 ‘좌편향 역사 교육’을 우리 경향학원만이라도 바로잡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장 선생님의 대답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교장 선생님도 국정 교과서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저와 똑같지만 만약 그렇게 추진하려고 하면 당장 전교조에서 데모대를 동원해서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되지 못할 정도로 방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아니 이 개인의 의사 표현 권리가 분명히 보장되어 있는 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편향 교사’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시킬 권리가 있는데, 왜 ‘우파 교사’들에게만 자기가 믿는 대로 바른 역사를 가르칠 권리나 자유가 없는 것입니까?

  경복여고와 경복비즈고의 교사 여러분은 이런 현실을 가만 두어도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제자들이 조국 대한민국을 ‘침략국가’로 배우면서 자라고 있는데, 여러분은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비겁한 교사’, 그저 학생들에게 지식이나 팔면서 먹고 사는, 제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삯꾼 같은 교사’로 지내다가 조용히 퇴직하셔서 연금이나 받아먹으면서 평안히 여생을 살 계획만 세우고 계십니까?
  제가 연초에 학원시무예배 시간에 ‘내 선생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여러분만큼은 학생들에게 악을 악이라고 가르칠 줄 아는 스승이 되어서 그 소중한 청소년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온갖 타락한 윤리와 오염된 사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게 만들 수 있는 ‘생명의 스승’이 되자고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되는데, 여러분은 혹시 그 설교도 그냥 여러분의 학생들 중 일부가 그러듯이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흘려’ 버리셨습니까?
  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이라도 듣고 자라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은 그 평생이 양극단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선’을 학생들에게 똑바로 가르치는가 못하는가는 결국 그 한 인생의 평생을 좌우하게 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 조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십 몇 년 전에 ‘월간조선’에서 읽었던 기사로 기억됩니다.
  서울대 졸업생으로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자진 월북했다가 북한의 현실을 보고서 그제서야 자신의 오판을 깨달은 한 탈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탈출해서 어느 한국 사업가의 집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한국 사업가는 그의 형편을 듣고서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목욕을 시키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 탈북자는 밥을 먹으면서 자기가 고등어를 25년 만에, 그리고 김을 30년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탈북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명색이 서울대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세계에 꼭 알려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에 탈북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탈북자가 그 집에 들어오기 전 문앞에서 서성거릴 때 그를 수상하게 보았던 이웃의 중국인이 공안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그는 식사가 끝날 무렵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강제북송될 것과 그 후에 당할 일이 뻔했던 까닭에, 그 탈북자는 공안의 유치장 안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했습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게 된 한국 사업가는 그 탈북자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여 줄 수 있었던 것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을 길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명색이 서울대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만 할 책임’을 이행하려다가 그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직 아닌 순직’을 당했던 그 탈북자에 비해서, 우리 경향학원의 교사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성인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거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옳은 것’을 가르치고 ‘진리를 알려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는 본업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아닌가요? 그런 여러분이 숫자로 따지면 아직까지는 소수에 있을 ‘좌편향 교사’들이 이렇게까지 이 나라 학생들의 의식을 ‘악한 사상’으로 세뇌시키면서 대한민국 전체를 아예 ‘종북국가’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스승으로서의 양심’에 아무 자극도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그렇게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실제로는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그렇게 ‘인권’을 주장하면서도 지금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동포에 대해서는 이처럼 ‘매정’하고, 겉으로는 ‘같은 기독교인’이요 심지어 ‘목사’라고까지 하면서도 오히려 저 무신론 공산독재자를 추종하는 무리가 이처럼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의식을 무서운 속도로 사로잡아 가고 있는 오늘날, 진정 ‘선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참된 스승은 과연 이 나라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제가 감히 기대해 본다면, 우리 경복여고와 경복비즈고의 교사들 중에 정말 몇 명이라도, 아니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올바르고 용기 있는 교사’가 꼭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양 학교 학생들 중에서나마 진정한 ‘애국신자’가 연이어 배출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먼 장래에 이 경향학원에 진정 ‘사도의 길’을 걸어간 ‘진짜 스승’이 있었다고 역사에 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 곧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참된 선’을 우리 경향학원에 속한 소중한 청소년들에게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뜨거운 가슴으로 가르칠 줄 아는 모든 양 학교의 교사와 교직원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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