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5-28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스가랴 10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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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5-28
2017′ 경향의 강단(24) (2017년 5월 28일 / 주일 대예배)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스가랴 10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5월 28일(주) / 주일낮예배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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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스가랴 10장 1-12절 / 석기현 담임목사
세상이 변하면서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천수답(天水畓)’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가지고 농사를 짓는 논이나 밭’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곳곳에 댐이 건설되고 관개시설이 갖추어짐으로써 옛날만큼은 물 걱정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것도 때를 잘 맞추어 내리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흉작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이 하늘만 쳐다보면서 ‘천수’를 기다리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오늘날 사람들이 실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1절에 “1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고 기록한 것이 바로 그처럼 비를 간절히 바라는 농부의 심정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의 “봄비”란 4, 5월에 내리는 비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늦은 비’라고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이른 비’는 10월과 11월에 걸쳐 내리는 ‘가을비’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씨를 움트게 하고 자라게 만들어 주는 비였습니다.
  그에 비하여 ‘봄비’는 곡식을 자라고 익게 만드는 것으로서 풍성한 수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렇게 봄비를 기다리듯이 내가 너희에게 보낼 메시아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를 통하여 그려 주신 축복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본문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바로 6절 상반절에 기록된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는 말씀이 이 10장 전체의 내용을 크게 두 문단으로 나누는 분기점이 됩니다.
  즉 2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해 주시는 내용이며 6절 이하의 말씀은 ‘요셉 족속을 구원해’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과연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에게 약속하신 그 새 삶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비를 기다리듯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삶, 오직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새 생명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의 새 생명은 참된 주권자께로 돌아옴으로써 이전에 우상을 좇던 인생이 이제는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2절부터 6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2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5싸울 때에 용사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6a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유다 족속이 견고하게 되는’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참된 “목자”를 모시게 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목자’는 ‘왕’을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문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유다 족속’만을 강조하여 언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서, 오실 메시아는 정통 왕가를 잇는 유다 지파를 통하여 태어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즉 ‘왕’으로 임하시기 이전의 이스라엘은 온갖 우상에 의존하며 그 지배 아래에 매여 있었습니다.
  “드라빔”은 사람 모양으로 깎아 만든 가정의 수호신이었는데 때로는 그 집안의 상속권을 상징하기도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자기 집안에 복을 가져다준다고들 믿고 살았지만, 실상 그런 우상이 약속하는 복이란 “허탄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복술자”란 ‘점쟁이’를 가리키는데, 그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당신은 이런 복을 받게 됩니다.
 ’라든지 혹은 ‘당신은 저런 재앙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라는 따위의 “거짓 꿈을 말하면서” 백성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우상이나 점술이 사람에게 전해 주는 “위로”란 것은 실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우상 숭배의 미혹을 받으면서 살던 상태를 가리켜 “백성들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양이 참된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방황하게 될 수밖에 없듯이, 사람도 그 심령이 참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면 별 수 없이 그런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미신종교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지경으로 이끌어간 우상숭배자들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셨습니다.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고 선포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여기의 “목자들”이란 그런 우상숭배 사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이방 나라의 왕들을 가리킵니다.
  “숫염소”란 양을 직접 괴롭히는 짐승으로서, 여기서는 그처럼 우상숭배 하던 왕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타락시킨 이방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만드심으로써 그런 불신 세력, 우상숭배자들을 징치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어떻게 “전쟁의 준마”와 같이 ‘견고한 족속’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이방 왕들의 창칼에 힘없이 쓰러지고 이방 민족들의 종이 되고 온 세상에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던 유다 족속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오히려 그런 불신 이방 백성을 대항하여 싸울만한 강력한 백성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대한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모심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4절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강의 군주로, 절대적인 주권자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모퉁잇돌”이, “말뚝”이, “싸우는 활”이, 그리고 “권세 잡은 자”“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오실 메시아께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는 기초’가 되시며 ‘교회를 굳건히 유지하시는 주인’이 되시며 ‘원수를 멸하시는 심판주’가 되시며 또한 ‘진정한 절대주권자’로 오실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왕 중의 왕’으로, ‘진짜 임금’으로 오실 이 메시아를 영접하게 될 때 유다 족속의 모습은 백팔십도로 바뀌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우상숭배 하는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던 패배자들이 이제는 “용사같이... 원수를 밟을” 것이며, 과거에는 우상숭배 종교에 동화되어 살던 옹졸한 겁쟁이들이 오히려 그 대적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신앙의 전사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그 밑에 빌붙어 사는 것은 실로 처참하고 저속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권력, 명예, 성공 - 이런 것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이 우상을 만들 때마다 항상 똑같이 추구하는 불변의 ‘소원 제목’들입니다.
  이런 것들만 내 집안에 들어오게 되면 틀림없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부적이나 성상 따위의 현대판 ‘드라빔’을 현관에 붙이거나 벽에다 걸어 놓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이런 것들만 보장된다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늘날의 ‘복술자’들이 예언해 주는 ‘거짓 꿈’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유리하는’ 즉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곤고를 당하는’ 즉 저주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인생으로 끝나게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헛된 것’들을 믿고 의지하며 그런 ‘진실하지 않은 것’들을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할 주권적인 존재라고 받든다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왕 중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권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 참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이 세상의 ‘가짜 목자’들과 ‘숫염소’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우상, 즉 육체적 쾌락이나 물질적 부요나 정신적 만족 따위를 최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내게 가르쳤던 자들이 얼마나 괘씸한 ‘목자’들인지를 이제는 똑똑히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괜히 부끄러워지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만나면 절로 주눅이 들고, 성공한 사람을 만나면 당장 기가 죽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생 가운데서는 좀 잘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이 하나님 아닌 것을 높이고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 기독신자가 그런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부끄러워할’ 이유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실상에 있어서는 오직 마귀의 앞잡이 노릇하는 인생에 불과하며 그들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떨어지는 영원한 멸망뿐이기 때문입니다.
  화육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증거해 주신 성부 하나님을 전 인류 역사의 유일한 통치자로, 내 생명의 참된 주인으로 깨닫고 영접해야만 그런 저질 인생에서 벗어나 실로 ‘견고한’, 기반이 탄탄하게 잡힌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 속한 ‘양’들을 모으러 세상에 오신 ‘참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금세와 내세에 걸친 절대주권자로 모시는 가운데, 온갖 우상숭배자들의 미혹을 넉넉히 물리치면서 ‘여호와 유일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의 새 생명은 참된 구원주를 모시게 됨으로써 이전에 세상에 얽매였던 인생이 이제는 구속사의 용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6절 하반절 이하 12절에 기록하기를 “6b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7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8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 9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올지라 10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 12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아까 ‘유다 족속’에게 주신 말씀에 비해서 여기 ‘요셉 족속’을 향한 말씀은 조금 다른 각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남조의 유다 족속은 바벨론 포로 시절을 통과하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정통 왕조’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께서 그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그들을 “견고하게” 즉 ‘강한 주권자에게 속한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요셉 족속”에게는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라는 “구원”의 약속이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 족속’ 즉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당한 뒤에 온 백성이 여러 이방 나라로 “흩어져” 사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요셉 족속들에게 있어서 그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기 족속들이 다시 한 곳에 모이게 된다는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요 전혀 실현 가망성이 없는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요셉 족속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리라’는 약속을 본문에서 수차례 반복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자기 양떼를 모으기 위하여 특정한 신호를 보내는 것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백성들 가운데”“내버리고” “흩었던”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아무리 “먼 곳”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 족속에게 있어서는 실로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흩어져 있던 자기네를 다시 완전히 모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때 요셉 족속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자기네를 “내버린 일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구원 역사를 통해 “에브라임” 즉 요셉 족속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실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는” 새 삶의 기쁨을 만끽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10절 하반절 이하의 말씀은 그 후에 요셉 족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나라들, 이전에 자기들을 지배하고 괴롭히던 이방 나라들을 향해 지극히 당당하게 나아가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거할 곳이 부족할” 정도로 그 땅들을 정복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이름으로 행할” 때, 즉 자기를 구원하시고 불러 모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받들고 세상을 향해 전진하는 “용사”로 탈바꿈하게 될 때, 그 이방 족속들의 “교만이 낮아지고” 그 불신 임금의 “규(圭)” 즉 왕권의 상징인 홀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불신 세상의 힘에 짓눌려 살던 인생이 이제는 오히려 세상 앞에 영적으로 왕노릇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굴복시키는 놀라운 인생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까 유다 족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요셉 족속을 향한 예언 역시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신약 성도에게 성취될 약속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요셉 족속이 다시 북조 이스라엘에 모여 “번성”하며 사는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구절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모두 다 이전에는 불신앙의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어져 살던’ 죄인이었습니다.
  거기서 빠져 나왔다가는 살 길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또한 스스로 빠져 나올 힘도 없이 그냥 섞여서 같이 죽어 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악인들이 꾀는 소리를 따르며, 죄인들이 모여 있는 길에 서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오만한 자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랬던 우리를 향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불러 모아 주시는’ 구속 사역이 발동되면서 실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죄인들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선포된 이 복음의 ‘휘파람 신호’를 듣고 이 교회에 ‘같이 모여’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신이 되심을 고백하면서 오직 그 분께만 모든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가운데 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새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이 교회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을 정복해가며 ‘거할 곳이 부족할’ 정도로 복음 운동을 땅끝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먹고 살기’에만 바빠서 늘 세상에 끌려 다니며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던 우리가 지금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고 이 천년왕국을 통하여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당당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벌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망성에 흩어져 살다가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게 된 자들이 이 거룩한 공동체에 부름을 받고 함께 모여서 세상을 이기며 살게 된 이 새 삶은, 이천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 다시 모여 살게 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경이로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전에는 회사 사장의 눈치만 살피고 거래처와 고객에게 굽실거리며 살아야만 했던 인생이 이제는 하늘에 계신 주인께서 내게 맡겨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부지런히 장사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을 위해 요긴하게 쓰임 받는 ‘청지기’로 격상된 것은, 미약한 ‘에브라임’이 ‘애굽과 앗수르’라는 대제국을 압도하는 승자로 탈바꿈한 것이나 다름없는 기적 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한번 택정하신 자를 결코 ‘내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교회를 통해 불러 모아 주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영원한 ‘구원주’로 모시는 가운데, 이제 더 이상 ‘썩을 것’과 ‘죽을 것’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선한 일에 크게 쓰임 받는 ‘구속사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실로 ‘새 생활의 축복’이 절실했습니다.
  더 이상 옛날 같은 꼴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간절함이 그들 모두에게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그 결과 육신생활도 저주 아래 있던 과거로부터 이제는 정말 깨끗이 벗어나서 완전한 새 삶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고국으로 귀환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사무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새 삶이 바로 당신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은혜의 단비가 내림’으로써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야말로 ‘새 생명의 삶이 움트고 자라며 열매가 맺히는’ 축복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오로지 우상에게 지배당하는 인생이요 여지없이 불신 세상에 끌려 다니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해도 실상은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며, 아무리 내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해도 실상은 사탄의 종노릇하는 인생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육강세해 주심으로써 진짜 왕을 모시며 놀라운 구세주를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메시아를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고 온갖 사탄의 미혹에 대하여 넉넉히 이기는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왕 중의 왕’으로 화육강세하신 예수님을 아직도 자신의 심령 속에 진실로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야말로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빈들’처럼 바짝 말라 있는 인생입니다.
  내 인생이 더 이상 그런 메마른 상태로 계속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영접하고 따르기만 하면 절로 ‘많은 과실’을 맺게 해 주는 ‘포도나무’와 같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뿌리의 물기를 빨아들일 길이 없는 ‘둥치에서 잘린 가지’와 똑같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그렇게 마르고 마르다가 결국 ‘아궁이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을’ 심판의 날만 기다려서야 되겠습니까?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과학 다큐멘터리 텔레비전에 보면, 아프리카의 대초원 지대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생명의 활동’이 생생하게 방영됩니다.
  그런 대초원은 일 년 중 대부분이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건기로 이어지다가 우기가 되면 일시적으로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리는데, 그 비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변화가 당장 나타나게 됩니다.
  그처럼 바짝 말라서 흙먼지만 휘날리던 땅이 며칠 사이에 눈을 의심할 정도의 푸르디푸른 초원과 습지로 탈바꿈하고, 땅속 깊이 거의 죽은 것처럼 묻혀 있던 개구리나 물고기들이 정말 거짓말처럼 꿈틀거리면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실로 ‘물이 곧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 단 한 번의 짧은 비가 그 광활한 대초원의 온갖 식물과 동물의 생태계 사이클을 일 년 내내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단비’가 그렇게 메말라 죽어가던 우리를 변화시켜 ‘새 생명’을 누리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의 감화감동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 ‘놀라운 인생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이 생기게 하며 이 ‘고마운 생명의 구원주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따르는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갈급해 하고 간절히 사모해야 할 ‘비’는 바로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우상의 미혹을 벗어나고 불신의 세력을 오히려 타파하는 놀라운 새 생활, 참으로 ‘봄비’와 ‘소낙비’처럼 시원하고 기쁜 새 생명의 은총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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