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5-21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사도행전 19장 8-41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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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향의 강단(23)(2017년 5월 22일 / 총회선교주일 대예배)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사도행전 19장 8-41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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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사도행전 19장 8-41절/ 석기현 담임목사
가끔 무슨 상품 광고에 보면 ‘유사 제품에 주의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회사의 진짜 상품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가짜 모방 제품에 속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말입니다.
  적어도 그런 내용의 광고를 공개적으로 당당히 할 수 있는 회사라면 자사 제품에 대하여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유사제품과는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높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회사라야만 소비자로 하여금 그런 가짜에 주의하라고 경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유사 제품 요주의’ 문구를 광고에 삽입하면서 선전하는 제품은 아주 잘 팔리는 히트상품일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했을 때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참된 ‘주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가짜’들의 정체가 자연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신자와 교회가 오직 ‘성경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떤 ‘거짓 종교’들을 물리치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중심의 전도는 ‘기복주의의 미신 종교’들을 타파합니다.

  8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오게 된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으레 그렇게 해 왔듯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석 달”이 지날 무렵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중 앞에서 기독교의 “도를 비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회당을 떠나 그들과는 달리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시작했는데, 이 ‘두란노 서원’은 당시 에베소에 있던 유명한 철학 강연 장소로서 일종의 학교 건물이었습니다.
  당시 두란노 서원에서는 주로 오전에만 강의가 있고 더운 낮 시간 즉 11시부터 4시 정도까지는 비어 있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아마 이 시간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두란노 서원에서의 강론을 “두 해 동안”이나 계속했는데, 그 결과 “아시아” 즉 오늘날의 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전역에 “주의 말씀”이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중심으로 전파했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자연히 그 지역의 거짓 종교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11절부터 20절의 말씀에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씀 전파 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놀라운 능력” 즉 신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일할 때 두르던 “앞치마” 등을 통해서도 그런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이 병 고침을 받았던 것과 일맥상통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의 ‘사도적 신유’의 능력을 흉내 내려 한 가짜들이 등장했습니다.
  여기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란 당시 주문 따위를 외우면서 귀신을 쫓는 무당(exorcist)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과 영들의 이름을 다 동원했었는데, 그런 까닭에 “시험 삼아” 바울이 전파하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번 시도해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그런 ‘퇴마사’들이 사용했던 “히브리인의 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운운하는 주문에 대한 기록이 역사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 자들 중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이니까 뭔가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남들 앞에 보이는 것을 이용해서 그런 무당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 이름만 자기네들의 주문에 넣어 써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라고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너희들이 도대체 누군데 그 이름을 마음대로 써 먹고 있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귀신도 영적 지각 능력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군대’라는 이름의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도 나타났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 아들 무당’은 오히려 “악귀 들린 사람”의 육탄공격을 당하게 되는 바람에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꼴을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많은 에베소시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는” 회개를 했는데, 그것은 특히 자기네들의 미신적인 과거 생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 중에 회개하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가져 와서 불태운 마술 서적들은 그 값이 “은 오만”, 간단히 계산해서 ‘노동자 오만 명의 일당을 합친 액수’만큼이나 되었습니다.
  그만큼 에베소는 마술과 무당이 횡행했지만, 사도 바울이 선포한 바른 복음이 결국 그 미신 종교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미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복주의’와 필연적으로 결탁하게 됩니다.
  즉 오로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신을 섬기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미신을 믿는 자들의 기원이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집안에서 병마가 떠나가고 돈복은 굴러들어오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독신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미신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의 이름’은 부르지만 그것을 꼭 무당들이 하듯이 무슨 ‘소원성취’를 위해서만 써 먹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저속한 수준으로 격하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기복주의야말로 사탄이 아주 강력하게 미혹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무슨 ‘신유 기적을 위한 주문’처럼 써 먹을 수 있는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일 뿐이지,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불러 쓰거나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오직 당신께서 스스로 정하신 때에 스스로 선택하신 사람을 통해서만 직접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초창기 때부터 미풍양속이라는 미명으로 무장한 온갖 종류의 미신과 정면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정확한 ‘성경중심의 전도’ 덕분에 그런 미신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기복주의’가 아닌 ‘축복주의’의 기독교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이토록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는 미신도 절로 사라질 것 같은데, 웬걸 그와 정반대 현상이 우리나라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불경기가 이어지고 있는 중에도 무슨 ‘신 내림’을 받았다는 무당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전해 준 그 자랑스러운 전통은 당연히 앞으로도 더욱 철저하게 견지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내 전도와 세계선교를 통해 오직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말씀’ 그대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온갖 기복주의의 미신 종교들을 능히 타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중심의 전도는 ‘인본주의의 우상 종교’들을 압도합니다.

  본문 23절부터 29절에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때쯤” 이란 바울이 이제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끝내고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을 가리킵니다.
  “이 도”란 바로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전파했던 복음인데, 그 도로 인해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과 그의 공장에 있던 “직공들”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 즉 같은 직종을 가진 자나 거래처 관계자들에게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아데미’란 라틴어로는 ‘디아나’라고 불리던 ‘달의 여신’인데, 열두 개의 유방이 달린 모습으로 조각되었고 풍요와 생식의 신이었으며, 특히 소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위대한 모신(母神)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이 있었고, 거기서 벌어지는 제사는 광란과 음란의 절정이라 할 만큼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상 모형”이란 그 아데미 신전(神殿)의 작은 모형을 은으로 만든 것으로서 에베소 사람들에게는 부적으로, 에베소를 방문한 여행객들에게는 기념품으로서 거의 필수적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야말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도”가 자기네의 그 승승장구하는 “생업”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라고 우상 숭배를 맹렬히 질타하는 것을 그들 역시 날마다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직장 조합’을 동원하여 에베소 사람들에게 바울이 그들의 돈벌이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에베소 시의 자랑스러운 ‘아데미 숭배’의 전통 자체를 말살시키게 될 것이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걷잡을 수 없는 군중심리에 빠져든 에베소 사람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즉 ‘아데미 만세!’를 외치면서 당장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즉 사도 바울의 두 동역자를 붙잡아 가지고 “연극장”으로 몰려갔습니다.
  이 ‘연극장’이란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에베소의 극장으로서 민회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에 ‘복음의 도’가 전파되어 가면서 필연적으로 ‘우상 종교’와도 맞붙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30절 이하 41절 말씀에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붙잡힌 동역자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연극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 즉 당시 소아시아 각 도시의 공무원 중에서 신자가 된 자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바울이 그리로 갔다가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구출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바울의 신변까지 위태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태를 친히 주장하고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연극장에 가득 모인 군중들은 “어찌하여 모였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나” 될 정도로 아주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중에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네는 기독교와 무관함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미리 밝혀 두기 위해 대변인을 내세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평소 유대인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변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아데미 만세!’만 계속 외쳐 대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기장” 즉 그 에베소시의 시의회 회장격인 사람이 나섰습니다.
  그는 우선 에베소가 “큰 아데미”와 그 외에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들을 잘 모시고 있는 “신전지기”로 자타공인하고 있는 도시임을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후에 그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무슨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우리 (아데미) 여신을 비방”한 현행범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소요 사건”을 일으키면 오히려 상부로부터 “책망 받을 위험”만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폈지만 “불법 집회”는 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런 소란이 빌미가 되면 에베소시의 자치권을 빼앗기고 대신 로마 장군이 총독으로 파견되어 에베소 시를 직접 다스리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서기장의 그런 설득에 의해 결국 그 모임은 절로 “흩어지게” 되었고,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과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자연히 위험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정죄하는 도를 가르치고 전파했던 전도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오묘한 섭리를 통해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데미’를 비롯한 헬라의 신들은 다 ‘사람이 만들어 낸’ 우상이었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신도 사람처럼 육체가 있을 뿐 아니라 결혼도 하고 간음도 저지르고 술도 마시고 복수도 하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우상 종교란 ‘사람이 스스로의 머리로 상상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신’을 섬기는, 순전히 ‘인본주의 종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창작물’이 결코 아니라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십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제멋대로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스스로 계시해 주시는 그대로만’ 믿을 뿐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철두철미한 ‘신본주의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 말씀에 똑바로 입각한 전도와 선교는 항상 우상 종교의 헛된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참된 복음은 그것이 전파되는 이웃과 지역사회와 국가에 만연되어 있는 우상 종교인들로 하여금 절로 위협을 느끼게 만들고 필연적인 대립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불교나 유교와 ‘영적 적대관계’가 되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 외의 종교들, 즉 불교나 이슬람교나 천주교처럼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종교’들 사이에는 서로 아무 갈등이나 대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짜들끼리는 ‘유사품 주의’라는 광고를 피차간에 결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이 우상을 섬기는 종교들이니 자연히 서로를 비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이해와 화해라는 미명 아래 ‘종교 통합 운동’ 따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뿐입니다.
  지금도 천주교는 소위 ‘선교’라는 것을 할 때에 그 지역에 있던 ‘원주민의 종교’를 인정해 주고 시작합니다.
  즉 그들이 무슨 신을 어떤 이름으로 섬기고 있든지 간에 바로 그 신이 자기네의 ‘천주’와 동일한 신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야말로 ‘원만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전도와 선교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은 사람이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명백히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 종교’는 기독교에 있어서 ‘화목하게 공존해야 할 종교’가 절대로 아니라 오직 ‘싸워서 물리쳐야 할 대적’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든지 오직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그대로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신’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순인지를 똑바로 일깨워 주는 가운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온갖 ‘인본주의 우상 종교’를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중간에 들어 있는 21절과 22절 말씀에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라는 말은 ‘2년에 걸친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의 복음 전파 사역에 큰 열매가 나타나고 많은 성과를 거둔 후’라는 뜻입니다.
  웬만한 목사라면 자신의 목회를 통해 그렇게 큰 교회가 세워지고 주변 지역에 지교회들까지도 많이 세우게 되면 아마 그런 사역지를 떠날 생각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대형교회의 목사’로서 명성을 누리고 은퇴 후에 평안하게 살 꿈에 젖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때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의외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이 두 도시가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방 지역, 주로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해 왔지만, ‘복음의 진원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곳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승천하신 위대한 사건이 벌어진 곳이며 또한 첫 교회가 세워졌던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바울은 그 예루살렘을 로마로 연결시키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는 문자 그대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로마야말로 그 전략적 요충지요 요긴한 거점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서의 사역이 그렇게 큰 부흥을 일으켰던 시점에도 거기서 안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는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더 큰 사명, 곧 예루살렘과 로마를 연결하여 ‘세계 선교’의 길을 개척하는 사명을 그 심령 속에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실로 얼마나 멋있고 지혜로운, 또한 얼마나 크고 충성스러운 복음 전도자의 가슴이었습니까?

  우리 경향교회가 바로 이런 놀라운 비전을 이어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자기 교회 부흥에만 매달리는 목사나 자기 교회 안에서 저희들끼리 누리는 은혜와 기쁨에만 만족하는 교인이 아니라, 항상 ‘지구본’ 하나를 각자의 가슴에 담고 기도하며 헌금하는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짜를 조심하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것은 오직 진짜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진짜라면 당연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짜 제품을 가진 회사가 소비자들이 가짜에 속는 것을 보고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거짓 종교를 향하여 결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으며 당연히 미신에 근거한 ‘가짜 종교’와 우상에 의지하는 ‘유사 종교’들을 비판하고 배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독선이나 맹목적인 비난이 아니라, 진짜가 가짜 앞에서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요 필수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철저하게 입각한 기독교 신앙만이 미신과 우상 숭배에 오염되지 않은 ‘진짜’입니다.
  그런 참된 복음만을 전파할 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놀라운 구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렇게 전도하고 선교할 때 ‘소원풀이 굿’이나 일삼는 기복주의 종교, ‘눈에 보이는 성화나 성상 앞에 절하는’ 인본주의 종교를 타파하면서 ‘14만4천인의 남은 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중심으로 오직 성경이 증거하는 그대로 ‘주의 말씀’을 조국과 땅끝까지 전파함으로써 온갖 잡다한 ‘미신 종교’와 허다한 ‘우상 종교’들을 능히 이기는 ‘보내는 선교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