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2017-05-14 “제사장 여호야다와 아들 스가랴” 역대하 24장 1-27절/ 석기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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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 2017-05-14
2017′경향의 강단(22)(2017년 5월 14일 / 어버이주일 대예배)
“제사장 여호야다와 아들 스가랴” 역대하 24장 1-27절/ 석기현 담임목사
5월 14일(주) 주일낮예배 어버이주일
1부 오전 7:00 / 2부 오전 9:00 / 3부 오전 11:00

(241)

"제사장 여호야다와 아들 스가랴"

역대하 24장 1-27절/ 석기현 담임목사
언젠가 어느 장로님으로부터 “목사님, 세상에 부자(父子) 관계에 아무 갈등이나 문제가 없는 아버지나 아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단 촌수로 따져도 진짜 ‘1촌’밖에 안 되고 그것도 ‘SNS 일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가장 가까운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의외로 어렵다는 것은 아마도 현대사회로 올수록 더욱 심화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즉 ‘부모님을 무조건 하늘처럼 받들어 공경’해야 했던 옛날에는 무슨 ‘갈등’이 있더라도 표면화될 길이 없었지만, ‘개인의 개성과 권리’가 다른 그 어떤 덕이나 가치보다 훨씬 더 존중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것이 부자 관계의 기본적인 예의와 윤리조차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관계 자체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니 아버지의 훌륭한 것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는 일도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저 유명한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사자성어도 앞으로 몇 세대 못 지나서 고어(古語)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서로 같아야’ 하는 마지막 하나가 기독신자 부자(父子)에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로 아름다운 모범 사례를 하나 보여 주는데, 바로 남조 유다의 제사장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 ‘스가랴’ 선지자였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아들’은 ‘손자’나 ‘자손’을 의미하는 경우도 많은데, 본문의 ‘스가랴’ 역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여호야다의 손자’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경우는 ‘부전자전’이 고스란히 두 세대에 걸쳐 계속 이어진 셈이니 더욱 귀감이 될 만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기독신자가 그런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영적 부전자전’을 이어가기 위해 특히 자녀 쪽에서 부모에 대하여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녀 신자는 평화시대를 누리게 될 때 그것이 부모 세대가 남긴 신앙의 유산임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1절과 2절에 “1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요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요아스”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제사장 여호야다” 덕분이었습니다.
  요아스의 아버지 아하시야 왕이 죽은 후에 그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즉 요아스 왕자의 친할머니가 되는 아달랴는 아하시야 왕의 아들들, 즉 자기의 손자들을 다 죽여 버리고 스스로 유다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아달랴는 원래 북조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이세벨의 딸로서 남조 유다의 왕가에 시집왔던 여인이었는데, 자기 어머니 못지않은 악녀였고 철저한 우상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 아달랴가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대하 22:10)할 때, 제사장 여호야다는 당시 젖먹이에 불과했던 요야스 왕자를 극적으로 구출해 내어 육년 동안을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요아스가 자라나서 칠 세가 되었을 때, 여호야다는 충성스러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족장들을 규합하여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거사를 일으킵니다.
  그 결과 아달랴는 왕좌에서 쫓겨나서 죽임을 당했고, 요아스가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야다 제사장의 영적 권위와 영향력은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도 요아스의 개인 신앙생활은 물론 국정에까지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본문 2절이 바로 그것을 두고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되”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비단 요아스 왕이나 백성들의 신앙생활만 지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한 예배자의 자세를 지키고 살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바로 14절 하반절에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삼대 절기 때 드리는 제사들로부터 시작하여 매달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와 안식일마다 드리는 특별 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상번제’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이 이런 제사들을 집례한다는 것은 사실상 제사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임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여호야다는 비록 매일 드리는 제사였지만, 그 제사들 중에 단 한번이라도 습관적으로, 직업적으로, 무의미하게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의 상번제를 통하여 그 날 하루를 살아갈 영력을 공급 받았고, 저녁의 상번제를 통하여 그 날 하루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여 바쳤습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그리고 매 절기에도 역시 그 드리는 특별제사를 통하여 자신이 먼저 특별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야다가 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요아스 왕 앞에서 항상 영력과 권위가 넘치는 제사장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이처럼 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경건생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백성들 쪽을 향하여 자기의 얼굴을 보여 주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몸을 돌렸으며, 백성에게 교훈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자기가 먼저 그 말씀을 들었던 제사장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역대하의 기자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생애 중에서 모든 유다 백성들의 눈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곧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라는 그 장면을 그의 전 생애에 대한 ‘화룡점정’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의 남조 유다는 대부분의 왕들이 그들의 통치 기간 내내 악정과 우상숭배만 일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오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호야다가 제사장으로 살아 있던 기간만큼은 그의 교훈을 따른 요아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드려 성전보수에 앞장서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남조 유다는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도 실로 오랜만에 평화시대를 구가하게 됩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라는 단 한 사람의 신앙이 우상숭배자에게로 넘어갔던 유다를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까지 영육 간에 복을 누리게 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시 그런 평화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청년들과 청소년 세대는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평화시대’인지 전혀 ‘감각’이 없겠지만, 실상 이것은 보통 ‘특별한’ 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시 남조 유다처럼 하마터면 조국을 잃을 뻔했던 위기가 불과 지난 백년 사이에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 한 번은 ‘일제의 강점기’이며 또 한 번은 ‘6.25 남침’ 때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청년과 청소년 여러분들도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는’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절박한 위기였는지를 ‘체감적으로’는 거의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맛을 본 사람만 맛을 안다.’는 것은 역사에서도 철칙이어서 원래부터 ‘평화시대’에 태어난 여러분이 ‘국난시대’란 것이 그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실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 세대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겠습니까?
  요즘은 무슨 현수막을 내걸 때마다 ‘결사반대’라는 문구를 너무나 값싸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분들이야말로 진짜 ‘결사각오’로써 이 조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켰고 북한 공산독재자로부터 지켜내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항일운동’을 하지 않았거나 실제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반공투쟁’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면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아예 존재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선조들이 ‘여호야다 제사장’ 같은 신앙과 용기를 발휘하여 이 나라를 해방시키고 수호하지 못했더라면, 저나 여러분 역시 ‘조센징 아이’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북조선 천국’의 탁아소에서 옥수수죽조차 제대로 못 먹고 피골이 상접한 채로 쪼그려 앉아 있는 ‘미숙아’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자녀 세대가 이런 부모님 세대에게 ‘엎드려 사례’하기는커녕 반항을 하다니요?
  아니 ‘반항’ 정도는 그저 애교에 불과하고 아예 ‘욕설’을 하고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불효 세대가 조성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당신네는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연명하시면서도 오늘날 청년 세대로 하여금은 ‘이밥에 고깃국’을 오히려 ‘다이어트’에 안 좋다고 기피할 정도로 잘 살게 해 주셨는데도, 요즘의 대졸 아들은 ‘유명 브랜드 오리털 파커’를 안 사 준다고 전화통에 대고 자기 어머니한테 쌍욕을 퍼붓습니다.
  당신네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는 구호를 신조처럼 외치며 곡괭이를 휘두르고 지게를 진 끝에 이 나라를 겨우 50년 만에 ‘원조 받던 신생국가’에서 ‘경제대국 세계 10위권을 바라보는 초고속 성장국가’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요즘의 ‘노는 청년’들은 ‘흙수저 타령’을 하고 ‘헬조선 저주’를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럴 수가 없습니다.
  청년 세대 중에서도 이런 불효막심한 동년배 청년들을 진정 부끄럽게 생각할 줄 아는 ‘의식 있는 청년’이라면, 이런 뉴스를 듣거나 보게 될 때 여러분이 매일 밥 먹듯이 하고 있는 ‘SNS’를 통해서 좀 소신 있게, 좀 용기 있게 ‘비판의 댓글’이라도 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기독신자 청년과 청소년들만이라도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복스러운 평화시대를 누리게 해 주신 신앙의 선조와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줄 아는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 신자는 환난시대를 맞이하게 될 때 부모 세대의 신앙을 본받아 순교의 각오로써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17절 이하 22절에 기록하기를 “17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20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22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그를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즉 원래는 왕들만 묻힐 수 있었던 묘지에 장사지냈습니다.
  왜냐하면 16절 하반절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여호야다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 동안에는 그의 교훈을 좇아 선정을 베풀었던 요아스 왕이 그가 죽고 나자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요아스 왕은 “유다 방백”들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에 대한 결과도 즉시 뒤따라왔는데, 바로 그 우상숭배의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호야다 제사장 시대에 누리던 ‘평화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환난시대’가 남조 유다에 닥쳐왔던 것입니다.

  23절 이하에 보면 그렇게 국세가 기울기 시작한 유다는 “적은 무리로” 침공해 온 아람 군대를 “심히 큰 군대”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투 중에 “크게 부상”을 당했던 요아스 왕은 오히려 “신하들”의 반역으로 인해 자신의 침상에서 살해를 당함으로써, ‘용두(龍頭)’로 시작했던 그의 치세를 ‘사미(蛇尾)’로 마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아스 왕과 남조 유다가 그런 환난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순전히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24하반절) 때문이었습니다.
  즉 여호야다 제사장이 회복시키고 남겨 주었던 신앙의 유산을 내팽개쳤던 결과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망국의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요아스 왕과 유다 백성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19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백성 앞에 높이 서서” 외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상숭배로 인하여 ‘영적으로 세뇌된’ 요아스 왕과 유다 백성에게는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그 한마디가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온 나라와 백성의 절대다수가 배교의 길에 빠졌을 때 자기 아버지 여호야다 제사장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던 스가랴는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을 경책했던 바로 그 자리 곧 ‘성전 뜰 안’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라고 언급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구약성경에는 역대하가 제일 끝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첫 순교자’와 ‘마지막 순교자’를 언급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가 바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와 동일 인물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손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스가랴 선지자는 그렇게 남조 유다의 ‘환난시대’에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외로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영광스러운 순교자’로서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잠시 동안 고요한 평화시대’를 통과하고 있지만 만약에라도 ‘환난시대’가 닥친다면 과연 지금의 ‘자녀 세대’에서 그런 ‘순교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청년과 청소년들은 이 대한민국이 ‘환난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도 못 꿀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국사를 배웠다면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가 위로는 ‘오랑캐’, 아래로는 ‘왜놈’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당해 왔다는 것을 잘 알 텐데, 앞으로는 이 나라에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도대체 어떻게 장담을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 여러분의 조국은 핵폭탄을 보유하고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하여 온 인민을 굶겨 죽이면서까지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는 북한공산독재자로부터 노골적인 협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과거 그 어느 주변국보다도 적대적인 주적이 휴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지척에 도사리고 있고, 게다가 국내의 정계로부터 법조계, 입법계를 비롯하여 언론계, 교육계 등등에서 이제는 오히려 다수를 차지해 가고 있는 종북좌파들까지 그들과 내통하며 동조하고 있는 판에 도대체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까?

  뭐 불신자들이야 혹 이 나라가 김정은의 손아귀에 들어가도, 물론 배는 곯겠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종북좌파들이야 적화통일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사회주의 복지국가’ 건설이 성취되는 것이니까, 물론 그 꿈의 결말은 지금 북한의 현실을 보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만, 당장은 좋아서 날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들은 영락없는 ‘숙청 대상 제1호’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정작 선거 때에는 명색이 신자라는 유권자들도 그런 문제 따위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나 봅니다.
  제가 ‘반공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신앙 문제’라고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쳐도 ‘목사님, 어느 당에 투표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 문제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태연자약한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라도 다시 한 번 이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와 진짜 전쟁을 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초등학교학생의 70퍼센트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알고 있는 오늘날의 ‘자녀 세대’ 중에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지켜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런 소리를 하는 목사를 ‘색깔론자’라고 몰아붙이는 종북좌파의 선동을 ‘정의로운 소리’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의 ‘청년 세대’는, 공산주의를 기독교의 원수라고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기네 ‘부모 세대’의 신앙마저도 ‘수구꼴통적 신앙’이라고 이미 속으로 멸시하고 있는 것이 혹 현실은 아닐까요?
  제발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떨칠 수 없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청년과 청소년 여러분이 ‘환난시대’를 당하더라도 ‘순교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자세를 확고히 지키고 있으면 오히려 그런 때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런 국난의 시기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꼴이 될 것이 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 임하기 전에 부하 장수들을 모아놓고서 인용했던 ‘사즉필생 생즉필사(死則必生 生則必死’ 즉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병법의 철칙은 신앙의 전투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혹 조국과 민족이 ‘환난시대’를 맞이하게 되더라도 바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그랬듯이 ‘순교의 각오’로 맞서 싸워 끝내 이김으로써 이 축복의 대한민국을 반드시 지켜내는 신앙의 자녀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딱 한 명의 아버지가 남조 유다를 회복시켰고 딱 한 명의 아들이 순교하면서까지 그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모 세대’에서는 그런 ‘신앙의 아버지’들이 딱 한 명 정도가 아니라 무수히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호야다’들 덕분에, 그 ‘순교자 선조’들이 흘린 피가 이 땅을 물들여 놓은 덕분에 우리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자주독립의 민주국가’로 그 주권과 영토와 국민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자녀 세대’에서는 그런 ‘신앙의 아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여호야다 제사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여호와 하나님 경외의 신앙’ - 이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용감하게 바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스가랴’가 과연 우리 후손 중에 과연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순교자의 피를 이어 받아’ 신자가 된 이 시대의 기독청년들과 기독청소년들 가운데서 앞으로 ‘순교자’가 딱 한 명이라도 과연 나올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참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평화시대’는 이미 ‘환난시대’를 까마득히 잊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환난시대’에 대해서도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미명으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해 버리고 있는 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여러분 세대의 절대다수는 이미 누가 침략자였고 누가 우방이었는지를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으니, 반미데모에서는 앞으로도 무슨 ‘열사’가 나올 수 있겠지만 반공투쟁에서 ‘순교자’가 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저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고 장차 이 대한민국의 기독교사에 혹시 ‘단 한 명의 순교자’라도 더 나오게 된다면, 저는 그 순교자가 바로 우리 경향교회의 청년이나 청소년 중에 한 명이 되기만을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왜냐하면 아예 ‘반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목사들의 입에서 사라져 가고, ‘종북좌파’에 대한 비판이 교회의 강단에서 금기시되어 버리는 이 나라의 현실을 볼 때, 그래도 이런 설교라도 듣고 있는 경향교회의 자녀들 중에서조차 순교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다른 어떤 교회가 순교자를 낼 수 있을까요?
  물론 이것 역시 ‘저 혼자만의 착각’이거나 혹은 차라리 ‘말도 안 될 저의 교만’이기를 정말 바라지만, 지금 저의 간절한 소원은 만약 그런 영광을 우리 경향교회가 누릴 수만 있다면 저도 우리 주님 앞에 설 때에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쳤다는 자부심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시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부전자전’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들은 책과 신문으로 교양을 쌓으며 사상을 정립했지만, 여러분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인생을 배우고 정보를 습득합니다.
  여러분의 부모 세대는 ‘문화생활’이란 단어조차 없을 정도로 그저 당장 ‘먹고 살기’에만 바빴고 ‘자녀 교육’만 제대로 시키면 성공인생이라고 여겼지만, 여러분은 소위 ‘3D 직종’을 기피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리고 실업 중에도 ‘청년수당’이라는 것을 받아서 유흥업소도 갈 수 있는 희한한 ‘복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절대로 달라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참 신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과 그 신앙을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는’ 신행일치의 삶입니다.
  이것만은 정말 조금이라도 달라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대대로 ‘부전자전’이 꼭 되어야만 우리의 가정이 살고 우리의 조국과 민족이 생존하며 번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대한민국을 통해 누리고 있는 ‘평화시대’의 복은 오직 우리의 선조들이 남겨 준 ‘신앙의 유업’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가운데, 바로 이 부모 세대의 신앙과 생활을 ‘순교의 정신’으로 끝까지 사수함으로써 혹 장차 ‘환난시대’를 맞이하더라도 반드시 이겨내는 모든 경향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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